14세때 '한국 무용의 전설' 최승희에 사사

광복 후 한국 무용계에서 서양 무용과 한국 무용이 결합된 '신무용' 장르를 개척해 온 김백봉 서울시무용단장이 올해로 팔순을 맞았다. 그의 제자들은 13, 14일 세종문화회관에서 '한국 신무용 80년사(史)와 김백봉 예(藝)의 삶'이란 제목으로 그의 춤 인생을 기리는 공연을 헌정했다.

김 단장을 찾은 6일 그는 5월 8, 9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정기공연을 하는 자신이 창작한 '심청'(1975년 작)을 준비하느라 손자뻘 되는 후배들을 가르치기에 분주했다.

김 단장은 한국 무용의 전설인 최승희에게서 무용을 배운 뒤 첫 해외 공연을 한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목단강(牡丹江)시에서 했다. 최승희가 1943년 한겨울 목단강에서 공연을 할 때 김 단장(당시 17세)도 무대에 섰던 것.

기자가 95년 목단강에 가 최승희의 발자취를 찾았다고 하자 김 단장은 놀라면서도 반가운 기억을 되살렸다. "그때 겨울은 무척 추웠어요. 그래도 도쿄 최승희 무용연구소에서 무용을 배운 뒤 첫 해외 공연이어서 기대가 컸어요. 더구나 목단강은 나한테 특별한 곳이기도 했죠."

김 단장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목단강에서 트럭 운전을 했고 10세 때 아버지와 그곳에 간 적이 있다.

무용가의 길 터준 아버지

무용가로서 그에게 불멸의 우상은 은사 최승희(1911∼?)이지만 무용가의 길로 이끈 것은 아버지다.

"아버지가 어느 날 잠든 저를 깨워 최승희 선생의 장구춤, 보살춤, 화랑춤 사진 석 장을 보여주며 '조선인으로 훌륭한 예술가이고 우리 민족의 자랑'이라고 하셨어요. 그날 이후 시진을 방 벽에 붙여놓고 드나들 때마다 인사를 하며 '나도 커서 최승희 같은 훌륭한 무용가가 되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리고 1937년경 최승희의 평양 진남포 공연이 있을 때 아버지는 학교장의 허락을 받아 어린 김백봉과 최승희의 공연을 보러갔다. 공연이 끝난 뒤 아버지는 무대 뒤로 딸을 데리고 가 최승희에게 인사를 시켰다.

"나도 무용을 하고 싶어요." 당돌한 아이에 최승희는 미소만 지었고, 그의 남편인 안막은 김백봉이 조선 아이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기뻐하며 "열심히 배우라"고 했다. 그리고 1941년 14세 어린 나이의 김백봉은 최승희에게 무용을 배우러 홀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김 단장은 일본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춤을 배웠다. 언니, 동생이라는 엄격한 규율 속에서 최승희와 선배의 동작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익힐 때까지 머리 속으로 되뇌고 숱하게 동작을 반복했다. 눈치가 보일 때는 연습장 위 다락방에서 구멍을 뚫고 춤 동작을 보며 익혔다.

그러던 어느날 "춤을 추어보라"는 최승희의 부름에 용기를 내 제대로 춤을 춘 게 인정을 받아 본격적인 사사(師事) 받았다. 특별히 개인 교습을 받은 게 아니라 최승희와 함께 무대에 서고 순회공연을 하는 게 가르침이었다.

"최 선생님은 세계적인 무용가가 된 뒤에도 무용은 물론, 의상, 화장까지 소홀히 한 게 없었어요."

1. 최승희의 남편 안막(왼쪽)과 김백봉, 안제승 부부.
2. 스승 최승희(아래 오른쪽)와 김백봉(아래 왼쪽).
3. 1950년대 부채춤을 추고 있는 김백봉.

김 단장은 1944년 스승 최승희의 시동생인 무용이론가 안제승(전 경희대 교수·1996년 작고) 씨와 결혼해 스승과 동서가 됐다. 그리고 1946년 7월 스승 최승희 부부와 함께 월북했다.

"이북에 가서 진남포에 내리니 소련 사람이 우리를 지프에 태워 김일성에게 데려다 줬어요. 김일성의 첫마디가 '최승희 동무, 다니러 왔어요? 살러 왔어요?'였죠. 선생님이 '살러 왔다'고 했더니 모란봉 밑에 있는 요릿집을 연구소로 쓰라며 내주더군요."

하지만 김백봉 단장과 최승희와의 인연은 6ㆍ25로 더 이상 이어지질 못했다. 최승희와 안막이 북한에 남은 반면 안막의 동생인 안재승과 결혼한 김백봉은 남쪽을 택한 것.

이후 김 단장은 남한에서 신무용 개척자라는 고행의 길을 걸었다. 스승인 최승희가 북한에 있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어려움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김 단장은 1947년 평양에서의 '화관무' '지효'첫 발표 이후 1953년 김백봉무용단을 이끌면서 수백 차례의 발표회를 가졌다.

600여 창작무용으로 독창적 춤 세계 펼쳐

김 단장은 스승의 예술세계를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 춤 세계를 펼친 600여 개의 창작무용을 만들어 냈다.

'화관무'(1947)'부채춤'(1954) '산조=청명심수'(1974) 등의 소품으로 화사한 춤꾼의 일생을 살았고, 무용극 '반야월성곡'(1948)'춘향전'(1949) '우리마을 이야기'(1956) '고향'(1958) '심청'(1975) 등으로 우리무대에 굵직한 획을 그었으며 대작 '만다라'(1997)라는 일생의 대작을 내놓아 그의 무용일생을 총정리하려는 듯한 열정을 보여줬다.

춤무대만이 아니라 그는 오페라 뮤지컬 매스게임 등 춤이 필요한 각종 무대나 행사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그 중에서 88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2,000명이 춘 '화관무'는 기억될 만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청계천 복원에 맞춰 창작무용 '청계(淸溪)'를 발표하기도 했다.

1953년 무용연구소를 연 후 그는 많은 후진을 길러냈고 대학의 무용전공학과 개설에 앞장서서 수도여사대, 서라벌예대, 한양대 등에서 가르쳤고 서울예고 무용과 개설에 참여했으며 64년부터 92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경희대 무용과 교수로 평생을 무용교육에 앞장서 왔다.

김말애무용단을 이끌고 있는 김말애 경희대 교수 그의 딸이기도 한 안병주 경희대교수 등 우리 무용가로서 그처럼 많은 유명한 제자를 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김 단장의 춤은 자연과 어우러지는 인간 삶의 일상을 때론 청초하게, 때론 화려하면서 우아하고 기품있게 풀어내는 깊은 맛을 지녔다는 평을 받고 있다.

김 단장은 '춤'에 대해 묻자"하나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도쿄 최승희 무용연구소에서의 일화를 들려줬다.

"어느날 혼자 춤 연습을 하고 있는데 최 선생님께서 '하루에 매일 2시간씩 연습을 하면 세계적인 무용가가 될 수 있다'고 해서 속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80 평생 춤을 추어오면서 그것이 얼마나 실천하기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는지 몰라요."

최승희가 말한 '매일 2시간'의 의미는 사실 도(道)를 닦듯 정진하라는 의미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한다.

김 단장은 "춤은 스스로의 정신과 혼이 합일돼 하나되는 상황에서 춤을 추고 그런 노력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인생을 오로지 춤에만 바쳐온 그의 순일한 삶을 의미하는 듯하다.

김 단장은 인생을 춤에 바쳐온 데 대해 회한이 없다면서도 자신의 무용세계를 붙들어주고 도와주준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 도움을 준 분들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13일 김 단장의 딸이자 제자로 어머니를 위한 무대의 안무를 담당한 안병주 교수는 무척 조심스러워했다.

"어머니에게 춤은 가족이자 남편이고 하늘입니다. 언제나 완벽 그 자체를 추구하지요. 그래서 늘 두렵고 딸과 제자들이 어머니의 춤세계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도 돼요."

최승희의 신무용은 우리의 전통 무용과 서양무용을 결합, 독창적인 작품 세계다. 김 단장은 최승희의 맥을 이으면서도 한국 전통춤을 계승한 박기홍에게서 승무를, 이동안에게서 태평무와 승무를 전수받는 등 우리의 전통 춤사위에 무게를 두기도 했다.

김백봉의 신무용은 서양의 무용을 기초로 하면서도 한국 전통무용의 세계를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작품을 창조해왔다. 우리 무용사에 한 획을 그은 그의 중요한 업적이 평가받고 올바르게 뿌리를 내릴 수 있게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김 단장은 헤어지며 의미있는 말을 건넸다. "춤속에서 살다가 사라지겠지. 무용과 떨어졌다는 건 내가 관 속에 들어간 뒤일 거예요."

무용극 '심청'
인간의 고뇌와 번민 춤으로 표현

김백봉 단장은 5월 무대에 올리는 '심청'에 감회가 각별하다. 살갑다고나 할까. "심청이 마지막에 아버지 눈을 뜨게 하고 왕비가 되는 것을 보면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것 같아. 그 고난의 길, 여러가지 불행했던 일, 그리고 감사했던 일들이…"

'심청'은 한국 무용극의 번영기였던 1975년에 초연됐다. 당시 '심청'은 한국적인 소재의 탁월한 안무와 함께 극적인 요소들을 효과적으로 증폭시킨 음악, 미술, 의상, 분장 등 다양한 요소로 인해 한국무용사에 길이 남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그 '심청'이 김 단장의 안무 및 감독으로 서울시무용단에 의해 오는 5월 새 모습을 드러낸다. 한국의 보편적 정서인 효(孝)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고전 '심청'이 춤으로 그 모습을 바꿀 때 어때야 하는지를 제대로 보여줄 예정이다. "권선징악에 초점을 둔 평이한 줄거리 전개에서 벗어나 주인공 심청이 아버지의 개안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과정에서 겪는 인간의 고뇌와 번민을 작품에 그려넣을 것"이라고 김 단장은 말한다.

그는 요즘 80 노구에도 불구하고 매일 현장에 나와 카랑카랑한 소리와 유연한 동작으로 무용단을 어르고 다그치며 '심청'을 다듬고 있다. 무용 인생의 대미를 장식하듯 장면마다, 동작 하나하나에 혼(魂)을 불어넣는 김 단장의 몸짓이 어떤 '심청'으로 탄생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기간: 2006.5.8~9 까지(※만 5세이상 관람가)
시간: 오후 7시30분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티켓: 효도석 50,000원 심청석 30,000원 용왕석 20,000원
문의: 서울시무용단 02)399-1766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