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⑫ - 13대 종손 김일주(金一柱)씨 유학중 결혼, 딸만 셋… 귀국 후 '종가 바로잡기'에 헌신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1리 능촌 370번지에는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종택이 있다.

주변에는 섬강이 아름답게 흐르고 산세가 수려해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이 관동별곡에서 “한 수 돌아드니 섬강이 어디메뇨. 치악이 여기로다”라고 노래한 곳이다. 인근의 간현 유원지는 국민관광지로도 이름나 있다. 이곳에서 김제남 선생의14대 종손 김일주(金一柱, 1938년생) 씨가 종가를 지키고 있다. 종가의 사당은 예전에 강원도관찰사가 오갈 때 반드시 예를 표했던 곳이다.

종손의 부친 김수영(金壽泳) 씨는 휘문고보를 졸업해 서울에 거주했다. 그가 서울에서 머문 곳은 ‘경제(京第)’라고 하는데 연흥부원군 종가의 경제는 서울 중구 입정동에 99칸이나 되는 큰 집이었다고 한다.

종손의 선대(先代)는 서울 계동궁(桂洞宮)에도 살았다. 이는 증조부인 김세기(金世基)가 형조판서를 지낸 것과 관련이 있다. 연흥부원군 후손의 문과 급제는 국왕까지 기뻐했던 경사였다.

“연흥부원군의 직계 자손에서 다시 갑과(甲科)에 급제한 사람이 나왔으니 천리(天理)는 속일 수 없다. 내일 연흥부원군과 부부인(府夫人) 노씨(盧氏) 내외의 사당에 치제(致祭: 임금이 죽은 공신을 제사 지냄)토록 하라. 제문은 내가 직접 지을 것이다. 헌관(獻官)은 영의정을 보내도록 하라.”

정조18년(1794)의 기록이다. 김세기가 고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자 국왕은 “이 집에서 과거 합격자가 난 것은 대단히 희귀한 일이니 연흥부원군 내외의 사당에 승지를 보내 치제하고 새로 급제한 김세기에게는 악공(樂工)을 보내줄 것이다”라 했다. 이를 통해 당시 조정에서 연흥부원군을 기리는 정도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종손의 첫인상은 ‘저 어른이 종손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우선 풍채가 좋고 고등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유학파이고 미국에서만 30여 년을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구사하는 영어의 발음부터 달랐다. 그리고 또 하나, 태권도 실력이 9단이다. 살아온 이력이 놀라움의 연속이다.

종손은 원주의 지정초등학교와 원주중, 서울 경신고를 나와 성균관대학교(57학번)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1964년에 미국 캔사스주 캔트 주립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거실 벽에는 65년 5월 23일자 미국 아크론 비컨 저널(Akron Beacon Journal) 선데이 매거진에 푸른색 태권도복에 검은 띠를 맨, 마치 영화배우와 같은 포즈로 찍힌 사진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다. 그때가 6단이었다니 종손은 태권도계에서 고수 중의 고수였던 셈이다.

미국 태권도계 대부인 이준구(李俊九·76) 씨 이야기를 꺼내자 “그와는 잘 아는 사이”라고 반가워했다. 워싱턴시에서 ‘이준구의 날’을 선포했을 정도로 유명한 그와 초창기부터 태권도를 함께 했다니 또한 놀랍다.

종부에 대해 묻기도 전에 종손은 먼저 “저는 미국에서 결혼을 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소위 본토 발음으로 ‘카랜’을 불러 친절하게 소개했다. 한복을 입은 큰 키의 미국인 ‘킴 카랜(Kim Karen, 1946년생)’이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14대 종부이다.

종부는 미국에서 남편과 같이 캔트 주립대학을 나와 그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남편을 따라 10년 전 한국으로 들어와서는 서강대학교에서 초빙교수 자격으로 영어는 물론 영상미디어, 뉴스, 영화, 광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약 3년간 강의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에 있는 친정 어머니 노환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씩 고향을 방문한다고 했다.

조상의 뿌리에 대해 물었더니, 영국계와 독일계의 피가 섞였다고 한다. “이번 독일월드컵 경기 때 응원하시느라 바빴겠다”고 우스개 말을 건네자 “미국, 한국, 영국, 독일을 모두 골고루 응원했다”고 즐겁게 맞장구친다.

▲ 종손 김일주씨와 가족

종부는 여느 서양 여자와는 달리 미국에서부터 남편을 극진히 받들었다고 한다. 미국 뉴욕에 살고 있다가 잠시 귀국한 종손의 여동생인 중년 부인이 음식을 장만하다가 우리쪽으로 다가와 자세하게 부언한다. “우리 올캐는요, 더할 수 없이 오빠에게 잘해요. 오빠가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심지어 발까지 씻겨 줄 정도예요. 바가지 긁는다는 것은 애초에 생각조차 하지 않아요.”

옆에 가만히 있던 종손도 슬쩍 거든다. “이 사람이 생선 매운탕을 특별히 잘 끓입니다. 내가 좋아하니까 그것을 배워서 그래요.” 마누라 자랑은 팔불출이라지만 ‘세상 사는 재미가 이런 것인가’하고 부러움이 들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이다.

대화 도중 종손이 베푼 친절함과 주변에 대한 배려에 또한 감명을 받았다. 이러한 스위트홈은 내외가 함께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람 사는 것은 인종과 지역을 떠나 동서고금이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이 집에서 새삼 배운다.

종가를 방문한 날은 마침 연흥부원군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날이었다. 대략 60여 명의 후손들이 모였는데, 제사를 마친 뒤 음복을 하는 장면에서 종부의 훌륭한 모습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종손은 여러 제관들의 식사를 면밀히 살폈다. 미국 생활이 몸에 밴 때문이지 모른다. 주변 제관의 국이 다 비워지기가 무섭게 그는 종부에게 국을, 반찬이 떨어지면 반찬을, 그리고 식사를 끝낼 때쯤에선 다시 커피를 갖다 달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종부는 힘든 기색 없이 아주 부드러운 태도로 응대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가까운 가족 제관 몇 명이 모이는 사가(私家)에서조차 제사 모시는 일을 큰 부담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이는 ‘나는 제사가 싫다’라는 제목의 수필집까지 냈다고까지 한다. 명절이 지나면 늘상 TV프로에 여자들이 출연하여 제사의 부담과 남자들의 비협조를 민망한 정도로 성토하기도 한다. 이것이 이 시대 우리 사회의 익숙한 풍경이다.

종손의 서재를 둘러보았다. 책상에는 방금 사용했음직한 노트북이 놓여 있고, 서가에는 동서고금의 도서가 꽂혀 있다. 경제학을 필두로 태권도, 불교, 한옥 관련 서적들이 주류다. 그리고 한켠에는 연안 김씨 족보가 가지런하다.

영어로 된 불교서적이 많은 이유에 대해 물었더니, 자신의 둘째딸이 콜럼비아대학에서 불교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맏딸은 미국에 사는데 컴퓨터엔지니어이며, 막내딸(1975년 생)은 지금 부모를 따라 한국에 와 승마장을 운영한다고 한다. 그녀 역시 버클리와 콜로라도대학에서 수학한 재원이다. 올림픽 프리게임에 출전한 적이 있을 정도의 태권도 실력을 갖춘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은 뜻밖에도 총각김치다. 한국인의 피는 속이지 못하나 보다.

딸만 셋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종손은 “양자를 물색 중”이라고 말했다. 종통(宗統)을 계승하려는 종손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 당시로서는 드물게 미국에 유학한 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30여 년을 살다가 오직 보종(保宗: 종가 유지)을 위해 가족을 데리고 귀국한 종손이 서울이 아닌 한적한 시골 종가 옛집에 정착을 택한 결단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로 종손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결심이었을 것이다.

▲ 조부 사진

대화 내내 줄곧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또 오랜 미국 생활을 했음에도 귀국을 결행했고, 종가를 지키며 또 대를 잇기 위해 양자까지 들이려는 결정을 내리게 된 동인(動因)은 무엇일까?

그래서 종손으로서의 받았을 가정의 가르침에 대해 물었다. 종손은 대뜸 “어려서부터 대우가 달랐어요”라고 시작한다.

영남에서도 종손의 맏아들이나 맏손자는 장자, 장손이라 해서 문중에서 각별하게 대우한다. 어리다 해서 함부로 ‘하대’를 하지 않음은 물론 문중의 어른들은 가문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고 애쓴다. 이때 명문가다운 교육도 수반된다.

그것이 바로 뿌리를 잊는 시대에 가문의 법도나 문화 그리고 전통을 계승하게 하는 명문가의 옹골찬 힘이다. 종손으로서의 자의식은 문중 어른들의 교육으로 인해 체계가 잡히는 것이다.

하지만 종손은 그런 반듯한 명문 가문에서조차 내부에서 잠깐의 일탈은 있었다고 고백한다. 노종손의 서세(逝世)와 연이은 젊은 종손의 유학으로 종손의 자리가 비게 되자 문중 내 일부 후손들이 문헌(文獻)이며 재산을 넘보았다는 것.

그래서 종손이 귀국한 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정말로 불필요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해야 했다. 사패지(賜牌地: 국가에서 공을 인정해 내려준 토지)의 일부는 그때 없어졌지만 남아 있는 수십만 평의 땅은 종손의 현명한 대처로 이제는 이 가문의 정신과 함께 면면히 이어지게 됐다고 한다. 천만다행이다.

깨어있는 종손이 부재한 문중은 어떠할까? 종손 흔들기, 문중 재산 송사 등….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하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