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사진으로 되돌린 달동네의 추억'난곡이야기' 사진전 갖는 운동권 출신의 출판인

[한국 초대석] 신(新) 인문주의자 김영종
흑백 사진으로 되돌린 달동네의 추억
'난곡이야기' 사진전 갖는 운동권 출신의 출판인


“제가 운동권 출신이었다는 점 외에도, 원래 우리 사회의 아웃사이더들에 대해 관심이 많죠. 상경해서 처음으로 자리 잡았던 곳이 삼양동의 달동네이기도 했고….” 새벽까지 이어졌던 전시회 개막 축하 파티의 피로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듯, 전시장에 나온 김영종(49)씨의 머릿결이 부시시하다. 오늘은 TV에서 녹화까지 있는 날이다. 방송 취재팀이 와서 녹화 준비로 부산을 떨었다.

4월 14일, 서울 사비나 미술관에서 시작된 전시회 ‘난곡 이야기’가 사람들의 발길을 붙든다. 지하에서 2층까지 100여점 내걸려 있는 흑백 사진과 드문 드문 매직으로 펼쳐져 있는 글귀가 추억의 앨범속으로 우리의 의식을 데려 간다. 제 2의 IMF를 미처 벗어나지 못 한 우리를 괴롭게 하고, 다그치는 컨텐츠의 집합소다.

흑백 사진속의 광경은 바로 얼마 전까지의 현실이었고, 군데 군데 매직펜으로 씌어져 대자보처럼 나붙은 소설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치부를 겨냥한다. 시각적으로 난곡 동네를 재현한 작업과 함께, 김씨는 난곡에서의 삶을 한편의 소설처럼 재구성했다. 한편 1층 입구에는 신간 도서들이 눈에 띈다. 전시회를 고스란히 옮긴 책, ‘난곡 이야기’다(청년사 펴냄).

‘서민의 애환’이니 ‘훈훈한 인정’이니 하는, 바깥 사람들이 달동네의 삶을 묘사해 오던 관습적 수식 따위는 그의 전시작들 앞에서 꼬리를 내릴 각오를 해야 한다. 요컨대, 그는 무한경쟁에 치여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21세기를 정신 없이 달려 가는 사람들에게 딴죽을 걸고 싶은 것이니까.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관악구 신림 12동, 일명 난곡. 도시 빈민층, 또는 좀 더 이념적으로 말하자면 사회 비공식 부문의 마지막 집결지. 이 전시회는 사라진 현장을 우리 시대에 오버랩시킨다.

- 시대의 아픔, 솔직한 영상으로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이상 리얼할 수 없는 풍경 속에 일견 뜬금 없이 보이는 사물들이 천연덕스레 등장한다. 이를테면 골목에 가로 놓여진 역대 대통령 초상(이승만에서 김대중까지), 근접 촬영한 전라의 여인과 담배연기, 달동네를 배경으로 거꾸로 매달린 태아, 가난의 풍경을 비웃듯 등장한 초대형 만원권 지폐 등은 적빈의 동네를 한꺼풀 벗기면 드러나는 풍경일 터이다. 그래서 사진들은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난곡, 그 을씨년스런 풍경을 현장 설치라는 기법을 통해 포스트모던적으로 재현해 내는 데 모두가 유기적으로 조응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전시회는 그의 표현을 빌자면, 사진과 소설의 ‘설치 작업’이다.

“2001년 겨울부터 1년반 동안 난곡을 출입하면서 주민들과 인터뷰 하고 사진을 쭉 찍어 왔죠. 훗날 소설을 쓰기 위한 기초 작업이기도 했어요.” 그가 책에서, 판소리체 혹은 무당체 소설로 이름 붙인 글은 팍팍한 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건데기일 터이다. 서서히 대상의 실체속으로 들어가는, 마치 슬로 푸드 같은 작업 태도 덕분이랄까, 이번에 그가 풀어 놓은 영상들에서는 어색함이나 과장 따위란 없다.

“생산자, 소비자, 경제 논리 등등의 말씀을 하시면 복잡해지니까, 정리해 줘서 말씀해 주십시오. 10초짜리 인터뷰예요.” 어젯밤의 피로를 애써 뒤로 하고, 카메라 앞에서 이번 전시회의 의의 등에 대해 차근 차근 설명하고 있는 그의 말을 나꿔 채는 PD. 김씨는 그러나 “마지막 달동네인 난곡에서 주민 공동체마저 깨져 나가는 현실을 그들의 시각에서 고발하고자…”라며 말을 부드럽게 해 줬다. 그러나 또 잘렸다. “그렇게 말씀 하시면 2분은 걸리겠는데요.” 김씨는 또 주문대로 해 준다. 그렇게 잔뜩 호들갑을 떨고 제 할 일을 하고 나더니, 방송팀은 싹 돌아 섰다. 김영종이라는 만만찮은 텍스트의 얼굴에 머쓱함 같은 것이 훑고 지나갔다.

전남대 75학번이었던 그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수배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한신대로 적을 옮기기도 하면서 ‘도바리’(도피)와 검거(국가보안법 위반 등)를 반복했다. 1979년 10ㆍ26 직후 검거된 그는 이후 출판 사업에 전념, 82년에 사계절출판사를 세웠다. 북한에서 인정 받는 홍명희판 ‘임꺽정’을 출간했던 일로 다시 수배 받던 그는 도피중 ‘일하는 자의 철학’과 ‘사회구성체 이행론 서설’ 등 이념 서적을 출판, 95년 출판사 사장 일을 그만 둘 때까지 감옥 신세만 4차례 졌다.

- 아내는 영원한 동지

요컨대, 생의 표정이 아웃사이더적인 그 무엇으로 점철돼 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부하(負荷)를 비껴 가지 않았다. 92년부터 3년 간, 진보적 서적 출판의 모임인 한국출판문화협의 회장일을 맡은 것은 그 연장선상이었다. 판금과 압수수색 등의 조치에 대해 그는 구속자 항의 농성과 유인물 배포 등 몸으로 부딪쳤다. “개인적으로는 서양의 근대사상, 제국주의에 대한 동양의 사상적 대응 등을 집중 탐구한 때였죠.” 그러나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다.

중앙아시아 연구회 회원이기도 했던 그는 95년, 발해를 체감하기 위해 행장을 꾸렸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김호동 교수 등 사계의 권위자 4명과 함께 했던 여정이었다. 카메라를 메고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를 돌아 다닌 그는 귀국한 지 얼마 안 돼 또 길에 올랐다. 돈황-하서주랑-이란-터키-로마 등 내ㆍ외몽고를 중심으로 비행기와 지프차편을 통해 두 달 동안 돌아 다녔다. “출판사 퇴직금을 털었죠.” 열정이고 호기심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일기와 슬라이드 등을 총동원한 현장 작업에서, 그것은 정치(精緻)함으로 바뀌었다. 이듬해, 그는 내몽고와 티벳 등지를 촘촘히 기록해 나갔다. 난곡의 기록이 이토록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어 매는 데는 저 같은 내공이 축적돼 있었던 까닭이다.

그 뒤로, 그는 ‘실크 로드 전문가’로서 확실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그 신호탄이 역사 소설 ‘빛의 바다’(1999년)였다. 발해를 고구려의 임시정부로 가상, 학계로부터도 적극 평가 받은 작품이다. 이어 나온 에세이집 ‘티벳에서 온 편지’(2001년)에서는 대승 불교의 성지, 티벳을 소개하면서 현대 문명의 탐욕을 비판했다. 이듬해에는 중앙아시아 약탈사를 다룬 ‘실크로드의 악마들’이 선보였다. 그의 실크로드 사랑은 오는 6월께 출판될 ‘실크로드 새롭게 읽기’로 다시 집약된다. 그의 사랑, 실크 로드에 대해 쓴 책들은 모두 사계절출판사에서 발간돼 왔다.

사계절출판사는 그의 모든 것이다. 이 진술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다. 자신이 만든 그 출판사는 1995년 이래 그의 아내 강맑실이 사장으로서 꾸려 나가고 있는 까닭이다. “한신대에 편입해 사회과학연구회 회장을 하고 있을 때 만난 운동권 여학생이었죠.” 정치, 예술, 영화 등 모든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의견을 주고 받던 두 사람은 사랑에 대해서도 진지한 담론을 나눴다고 한다.

이 ‘운동권 아버지’에게 물었다. 잇달은 수배와 도피의 경험이 남긴 것은? 난곡이라는 시대의 치부를 막 천착한 그는 말했다. “당대가 요청하는 것에 조금아라도 부응하려고 노력한 거랄까요. 내일의 밑거름이 되는, 좋은 경험이었어요.” 대학생인 그의 자녀들이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고 이념적 성향이 강하다는 데, 무척 자연스럽게 들렸다. 이번 선거에서 그는 어딜 찍었을까? “사람은 열린우리당, 당은 노동당예요.”

장병욱차장


입력시간 : 2004-04-22 14:19


장병욱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