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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대석] 사비나 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김준기
"리얼리즘은 살아있다"
지속 가능한 예술 개념으로서 리얼리즘 가능성 모색
전시회 '리얼링'에선 '포스트 민중미술'적 요서 넘실






테크놀러지와 후기자본주의의 공고한 결합으로 등장한 사이버 문명이 시대를 장악한 것 같은 지금,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라는 헤겔의 대명제는 시효 만료됐을 지도 모른다. 요컨대 우리는 ‘헛 것’이 지배하는 시대를 관통해 가고 있다. 이 같은 추세에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인간의 뜨거운 체온을 가감 없이 전하려는 기획전 ‘리얼링’에 더더욱 관심이 가는 것은 바로 그런 반(反)시대적 아우라 때문 아닐까. 40점의 개인 작가 작품과 16건의 그룹 작가 작품이 서울 사비나미술관(02-736-4371)에 가득하다.

“전시회 제목은 ‘리얼’이라는 단어에 현재 진행형을 뜻하는 ‘ing’를 붙여 만든 말이죠. 6월 30일에는 참여 작가와 일반 관객의 대화 시간도 가졌어요. 저녁 식사 후 한잔들 했죠.”어떻게 생각하면 잔손질이 무척 들었던 이 전시회를 총괄한 학예연구실장 김준기(37)씨가 전시작을 둘러 보며 말했다. 올초부터 자신이 주체가 돼 온(이 메일) – 오프(전화 등) 라인을 동원해 모은 작품들이다.

리얼리즘 하면 1980년대에 대한 부채의식, 나아가 시대적 콤플렉스라는 테두리에 한정시키는 버릇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세 층 가득 들어찬 갖가지 양식의 작품에서 리얼리즘의 무한한 가능성을 체감한다. 유행하는 말투를 빌면 ‘지속 가능한’ 예술 개념으로서의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자리다. 리얼리즘은 우리 시대에도 유효한 형식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리. 그러나 지난 시절 숱하게 들어 오던 민중미술과는 기법과 의미망이 천변만화의 경지다.

“리얼리즘 하면 얼른 떠올리는 민중ㆍ민족미술은 물론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형상미술, 현장미술, 공공(公共)미술, 진보미술, 행동미술 등을 포괄하는 ‘포스트 민중미술’이랄까요.” 전시작들은 우리의 데면데면한 일상을 일거에 뒤엎어 버리기 족하다. 조각 ‘혁명은 단호한 것이다’는 낫과 도끼를 든 팔뚝이 말없는 선언처럼 버티고 섰고, ‘오월의 노래’ 가사를 명주실과 솜으로 한 자씩 떠낸 ‘유행가 – 오월의 노래’에는 그날의 함성이 뚝뚝 배어 있다. 사진 ‘Hero’는 철가방을 오토바이 뒤에 싣고 도시의 횡단보도를 막 질주하는 중국집 점원을 속도감 있게 포착했다. 이밖에 미선-효순, 이한열 등을 패러디한 작품 등 전시작들은 우리 사회의 어떤 사람들에겐 불편함으로 다가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 “리얼리즘적 태도라는 일반 명사의 지속가능성을 탐색해 보자는 거예요.”


- 작가들이 여전히 공유하는 가치

“1980년대식의 ‘끈끈한 유대감’이 사라지고 개별화ㆍ파편화됐지만, 작가들에게서 여전히 발견되는 가치들을 묶어 내려는 첫 시도”라고 그는 말했다. 그 문제를 두고 평론가 등과 이야기 해 나가면서 그는 그것이 누구든 고민하고 있던 문제라는 사실과 맞닥뜨렸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또 다른 평균률을 지상의 과제로 내세우고 있는 우리 시대와 불화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 징조는 벌써부터 확인됐던 바다. 2001년 혼자의 힘으로 개설한 예술 도메인(www.artoctober.com)이 출발의 신호였다. 주소명을 중복 확인해 본 결과 다행히 중복되지는 않았으나 워낙 찾는 사람이 없어 프리챌 커뮤니티에 링크해 놓은 상태니, 많이들 와서 보시라고 당부한다. 그 이름 ‘10월’은 홍대 앞에 마련한 자신의 카페 간판에도 쓰였다. 자신의 전세 작업실을 개조, 지난 4월까지 2년 동안 홍익대 앞 거리 주차장에서 젊은 예술가들의 처소로 기능해 온 장소다.

현재 내부수리 등으로 업그레이드중인 이 카페는 그 동안 독특한 색깔의 전시회로 주목을 받아 왔다. 2003년 봄의 ‘A4 반전’은 그의 기획력이 크게 돋보인 자리였다. A4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Art For’란 어떤 말의 이니셜인 동시에, 실제상의 A4 용지를 뜻한다. 즉, ‘Art For No War(반전을 위한 예술)’과 요즘 종이 크기의 대명사가 된 A4를 합쳐, 중의적(重義的)으로 표현한 전시회 제목이다. 대중성, 기동성, 공격성 등을 절묘하게 아우른 김씨의 감각이 돋보인다. A4 크기 화면의 비디오에 작품까지 선보였던 자리였다. 모 신문사 부장이 왔고, 신문들은 중간 톱으로 대응했으며, 평단은 그에게 ‘ 시사기획자’라는 문패를 달아 주었다.


- 일상성의 미시담론은 ‘적’

그의 카페에서는 별난 전시회도 자주 열렸다. 현재 미국 대통령 부시를 비꼰 ‘I Vote For Bush’나 칼이 꽂힌 성조기 그림 등(전미영 작)도 열렸다. 그 밖에 국내 정치 상황을 빗댄 게릴라성 전시회나, 서울에 소개될 기회가 적은 지방 작가들의 전시회 등 그는 항상 주류와 불화해 왔다. 그것들을 뭉뚱그려 그는 “예술가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몸짓”이라 한다. 그는 “삶의 총체성을 부정하고 일상성 속으로만 파고 드는 갖가지 미시 담론은 리얼리즘의 적”이라며 “90년대 이후 쩨쩨하게 지내 온 예술가들의 몸짓이 시작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리얼링’처럼. 그는 “누군가가 멍석 말기만을 바래왔다”며 이 자리의 의미를 짚었다. 카페를 운영하면서 그는 우리 시대 예술가들 간의 대화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실감했다 한다. “막연히 어디선가 (작업을) 하고 있겠지라는 정도의 생각만 하며 지내다 보니 형편없이 개별화ㆍ파편화돼 있더군요.”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번 전시회를 두고 그는 “대중의 관심을 추수하기보단 미술사적 의미를 길어 올릴 수 있는 전시회를 계속 이어나갈 첫 단추”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매듭은 미술 동인 두렁의 ‘두렁전’에서 지워질 것이다. 지금 사비나 미술관에 들어서자마자 펼쳐져 있는 대형 걸개 그림이 이를테면 ‘기대하시라 개봉박두’편인 셈이다. “생활한복 창작 그룹 ‘질경이’, 아동 일러스트레이터 이억배, 만화가 장진책 등 분산 활동을 펼치고 있던 미술 동인 두렁을 통해 새로운 미술사적 의미를 도출해 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그래서 어쩌잔 말인가? “삶의 영역에서 미술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이는 거죠.” 그렇다면 지금의 이른바 예술적 양상들은 삶의 영역 밖에 있다는 말인가? 아니 그렇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예술의 자율성만을 강조, 스스로 현실과 괴리돼 가고 있는 포스트 모던적 태도가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는 야무진 계기가 이렇게 생기고 있다. 오는 가을이면 다시 문을 열 카페 ‘10월’은 여전히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소임을 다할 계획이다.



장병욱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 2004-07-07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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