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감각과 혼의 결정체한땀한땀 맺고 묶는 수작업으로 세상에 하나뿐인 책 만들기

[한국의 장인들] 예술책 작가 김나래
예술적 감각과 혼의 결정체
한땀한땀 맺고 묶는 수작업으로 세상에 하나뿐인 책 만들기


제 1회 국제아시아북아트페어가 2004년 6월 서울에서 열렸다. 일본에도 없는 이런 국제예술책시장이 한국서 열렸다는 사실은 대단한 일이었다. 비록 미국 영국 호주 일본 등 해외 참가국의 작가들이 만든 예술책이 국내에서는 별로 팔리지 않아 의욕적으로 참여했던 세계적인 예술책 화랑인 독일의 두룩앤북은 전시했던 작품을 떠나는 길에 이웃나라 일본에서 다 팔고 갔지만. 이 대회가 2005년 6월에 다시 열릴 예정이다. 올해보다 해외 부스가 20여개 더 늘어 나는 성장세이다.

2년 연속의 국제아시아북아트페어를 총괄 기획한 이가 김나래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손꼽히는 예술책 장인이다. 71년생이니 겨우(!) 서른 넷. 장인으로 불리기는 너무 젊은 나이이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나라에서 서양식 개념의 예술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90년대 후반에 이 흐름을 이끈 선두주자 중 하나인데.

글·그림·이야기를 담은 책
물론 그는 장인이라기보다는 작가로 자리잡고 있으니, 그 분야에서는 가장 활발한 작가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지난 4년간 예술 서적 전문 서점인 아티누스에서 예술책 판매를 총괄했고, 그가 올해 국제아시아북아트페어에 내놓았던 작품 한 벌은 삼성디자인스쿨(SADI)이 소장해 전시중이다.

그가 만든 예술책은 붓으로 말아 놓은 부직포부터 나무 껍지로 표지를 한 종이책, 병풍처럼 접은 그림책, 담밖의 정경과 담 안의 정경을 사진으로 찍어 투명한 비닐에 프린트한 후 겹쳐서 만든 책 등 다양하다. 이렇게 책의 모습이 다양하다면 보통의 오브제와 책이라는 것이 무엇이 다른 걸까? “서양식 예술책에서 책의 정의는 우선 열리고 닫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텍스트가 있거나 이미지가 있거나 텍스트와 이미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야기가 들어 있어야 책입니다.”

김씨는 세종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미술 잡지 기자를 1년 동안 하다가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미술 잡지 기자를 하면서 작가들은 인터뷰해 보니, 대체로 작가들이 하는 일이 동양화 서양화 조각 설치 판화 등 5개 정도로 국한되더라고 했다.

“미술을 전공했지만 이런 것과는 다른 걸 하고 싶었고 좋아 하면서도 평생을 할 일을 찾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그래서 95년 가을에 무작정 런던으로 떠났다. 가족들이 그 보다 이태전 미국 시카고로 유학을 갔는데, 어머니가 ‘미국에는 언제든 와서 공부할 수 있으니 미국과는 다른 유럽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권유한 것이 런던을 찾은 계기였다.

당시 유학원을 통해 런던 남부의 바닷가 도시인 헤이스팅스에서 하루 8시간 이상씩을 꼬박 작문과 회화 공부에 매달리면서 다른 무언가가 무얼까를 찾다가 이 지역대학에서 예술책에 대한 책을 봤다. 뉴욕서 활동하는 책예술가인 키스 스미스가 쓴 ‘시각 도서의 구조’(Structure of the Visual Book)라는 책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그는 그가 찾던 무언가가 바로 예술책이라는 것을 느꼈다.

책이 텍스트와 이미지를 다 가져야 한다면, 그는 텍스트와 이미지 양쪽에 고르게 관심과 재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씨가 예술책 작가가 된 데는 아마도 텍스트(글)와 이미지(그림)을 함께 하며 살아 온 성장 과정이 큰 힘이 된 듯 싶었다.

유년기의 추억은 훌륭한 소재
그는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태어나고 구로구 독산동에서 자란 서울내기였지만 シ?9식구가 되는 대가족 가운데서 성洋玖?서울내기답지 않은 시골스러움을 체득하며 자랐다.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둘과 그의 부모, 자녀 셋이 그의 식구였다. 동시에 아버지가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면서 외국의 정보에도 꽤 빨랐다. 게다가 두 딸 이름을 순한글인 ‘소래’와 ‘나래’로 지을만큼 부모는 문화적으로 꽤 앞선 사람들이었다.

그가 책으로 즐겨 만드는 텍스트들은 대부분 그의 독산동 시절에서 나온다. 그는 7세 때 독산동의 정원이 너른 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아버지가 어느날 병아리 열 마리를 사 오시더니 잔디밭을 다 걷어 내고 거기에 큰 닭장을 지었어요.” 나이 드신 부모님께 소일거리를 만들어주려는 뜻이었다고 한다. 또 하루는 할아버지가 시장서 파는 똥강아지와 고양이를 안고 오시고, 어느날은 고모가 세퍼드를 끌고 와서 그의 집은 그야말로 동물 농장이 되었다.

아버지쪽이 동물에 관심있었다면 엄마는 식물쪽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닭장 옆에 텃밭을 일궈 땅콩과 고무마 감자 고추 깻잎 같은 것을 키웠다. 여기서 그는 고등학생 때까지 살았다. 그의 집은 서울이면서 작은 시골이었던 셈이니 70년대생 서울내기치고는 꽤 풍성한 자연의 혜택을 받은 셈이었다.

닭의 배를 가르면 그 안에 달걀로 미처 태어나지 못한 노란 알이 가득 들어있던 것이며, 고양이는 개와 다투기 싫어 담장에서 주로 살던 모습들은 화투를 즐기시던 할아버지의 모습과 함께 그의 유년기를 장식했고 이것들은 영국 유학 시절 모두 좋은 책의 소재가 되었다.

영국에서 그는 런던국립예술대학교의 5개 컬리지 가운데 하나인 캠버웰컬리지의 대학원에 들어갔다. 빅벤이 바로보이는 런던 중심가에 있는 이 대학은 1896년에 개교한 전통의 대학이지만 예술책 과정은 92년에야 개설한 곳이었다.

그는 8대1의 경쟁률을 뚫고 95년 이 대학의 예술책 과정 정원 9명 가운데 낄 수 있었다. 일본인도 1명 들어 있었다.

97년 이 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다시 18세기 예술책 제본 학교를 1년간 다녔다. 98년에 이 학교를 졸업하면서 한국으로 돌아 왔다.

서양식 예술책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눈다. 코덱스는 종이를 접어 실로 묶어 표지를 단, 일반적인 책이되 손으로 만드는 수제본 책이다. 그 다음 병풍책(fold book), 부채살책(fan), 죽간(blind)형이 있다.

예술책 분야서 전문성 인정받아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예술책하면 코덱스 수제본을 말하는데 김씨는 사실 이 분야는 좀 약해 보였다. 오히려 그는 병풍책 같은 ?으로 예술책을 지향했다. 그리고 다양한 종이 소재를 개발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이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 받아 그가 만든 책은 4점이 키스 스미스의 2003년 개정판에 수록되었다.

김씨는 귀국하던 해에 영등포 경방필백화점 문화 센터에서 예술책 10주 과정 강좌를 개설한 데 이어, 명지대 시각디자인과에서 마련한 북 아트 과목을 강의하면서 국내의 ‘책 예술가’들을 쭉 키워내 왔다. 2002년부터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북프레스라는 개인 아카데미를 열어 예술책 과정을 가르치고 있다.

그가 처음 경방필백화점 문화 센터에서 가르칠 때 첫번째 수강생은 단 3명. 폐강될 줄 알았더니, 문화 센터에서 좋은 일이라며 계속 하라고 지원을 해 준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무척이나 감동해서 영국에서 가져온 재료를 공짜로 나눠주면서 제자를 키웠다. “아이엠에프 직후였는데 그래도 그 다음 강좌에는 다섯명이 들었으니 성공한 셈이지요.”

그는 예술책 동호인들을 모아 내년에는 ‘북아트협회’를 만들 참이다. 그를 통해 외국어로 된 용어도 새로 정리하고 예술책의 세계를 널리 알리고 싶은데, “협회가 생겨나면 이해관계에 따라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고 어르신들이 만드는 즉시 발을 빼라고 해서 걱정이네요”라고 했다. 하긴 협회 일보다는 진득하게 고운 책을 만들 장인하나 성장하는 것이 한국에는 더욱 귀한 일인데.

▲ 책 만들기

책 만드는 법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전통 문화에서도 정제 옻이니 정제 감물이니 하는 것은 오히려 일본제를 들여 와야 하는 반면, 책만들기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문화 인프라에서도 선진국이다. 종이와 밴드, 속지를 꿰매는 실, 표지용 가죽 등 수제본 책의 재료는 물론 책을 꿰매고 풀로 붙인 후 눌러주는 프레스 기계 등이 모두 한국에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책을 꿰매는 실은 국내에 따로 없어 김씨도 초기에는 면실에 왁스칠을 해서 썼는데 어느날 건축현장에서 줄 그을 때 쓰는 ‘노삐끼’ 실을 썼더니 아주 좋더라고 했다. 책 등을 이어주는 밴드는 레이스상에서 구할 수 있다.

코덱스 수제본 책을 만들려면 우선 종이를 접어 석장 정도씩 겹쳐 한 묶음을 만들어주는 게 첫번째 요령. 여러 개의 묶음을 잇달아 쌓은 뒤, 접혀진 쪽 옆면에 ‘밴드’라고 불리는 얇고 가느다란 천을 세 개 정도 제일 뒷장에 붙여준다. 한 묶음마다 꿰매는 실을 안쪽에서 바깥?으로 박음질을 해서 밴드와 연결되게 꿰매 준다. 계속 이어 준 다음에 묶음끼리 접착이 잘 되게 책 등 부분에 목공용 접착제를 손으로 발라준다.

북프레스기에 눌러 놓는다. 3일 정도 눌러놓은 책을 꺼내어 커버를 만들어 붙이면 책이 완성된다. 이 때 커버는 속지보다 위 아래 안쪽 옆면이 3mm 여유있게 자르면 된다. 또 속지와 커버 사이에 딱딱한 보드지를 넣어 준다.

서화숙 기자


입력시간 : 2005-01-04 15:59


서화숙 기자 hssu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