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 규격 인증서는 수출상품 비자예요안전기준 통과 못하면 해당국 문전서 퇴짜… 비관세 장벽 뚫기 우해 제품 설계부터 관리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이긴 이유는? ‘대포 등 전투장비들의 표준규격이 철저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규격 인증 심사원’들이다.

이들에게는 나폴레옹의 승전 배경도, 통독후 독일 사회가 비교적 순탄하게 합쳐진 것도 모두 ‘규격’안에서 답이 나온다. 웬만한 세상사의 물음과 대답이 규격 안에서 해결된다.

인증 전문 다국적기업 TUV라인란드 한국지사의 심덕섭(47) 본부장. 그는 표준규격 중에서도 한국 상품을 해외에 수출할 때 요구 받는 규격을 심사하고 관리하는 국제 인증 심사원이다.

자신이 소속된 회사에서 안전규격본부와 기계류 인증서비스 본부를 맡고 있다. 인증은 상품의 안전성에서부터 생산공정관리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 다양한 항목에 적용된다.

“ 벤츠 자동차라고 해도 그냥 우리나라에 들여와 팔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배기가스 등 우리나라가 정한 안전기준을 통과해야만 수입이 가능하죠. 국내에서 사용되는 제품은 한국표준협회 등 국가기관에서 인증하듯이, 저희는 한국 제품이 해외로 나갈 때 상대 나라의 안전규격에 대해 인증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

국제 인증은 ‘관세없는 장벽’으로 불린다. 유럽의 전자제품 관련 인증인 CE, 중국의 CCC, 일본의 PSE 등은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증마크다. 이러한 마크가 없으면 어느 나라 상품이든 본선 경쟁은 고사하고 시장 진입 자체가 원천봉쇄 될 정도로 중요한 부분이다. 수출시 강제사항이기도 하다.

“표준규격 인증 업무는 독일에서부터 시작돼 오늘날까지 약 130년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원래는 독일 정부의 국가시험소, 즉 공무원들의 손에 의해 이뤄지다가 이것이 민영화되어 기업형태로 독일 바깥 나라들로 전파되면서 현재와 같은 다국적 인증기관이 생겨난 거지요. ”

인증은 그 자체로 ‘전문기관의 까다로운 시험을 거쳤다’는 보증서이자 마케팅 수단으로도 이용된다. 이를테면, ‘상품의 비자’와도 같다. 비자가 없으면, 해당국의 문전에서부터 퇴짜를 당하기 마련이다.

최근 전 세계에 걸쳐 리콜이 실시돼 주의를 끌었던 한 중국산 장난감의 경우는 인증에 관련된 아주 단적인 사례다. 현재 세계 시장에 나와 있는 장난감의 약 70%가 중국산이다. OEM(주문자상표부착 방식) 제품들이 대부분이다.

안전규격 검사 및 인증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도 특히 중국산 제품들의 사례에서 빈발한다. 검사 때에는 하자 없는 샘플을 제출해 제대로 인증을 받았다가 막상 인증 후 대량생산하는 과정에서 불량품을 내는 등의 경우가 적지 않다. 국제시장의 요주의 상품들이다.

국내 인증시장 규모는 약 2조원대. 심 본부장이 근무하는 회사의 경우에만, 약 1만2천 명의 국제규격인증 전문가들이 세계 각국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다. 규격인증이 유럽쪽에서 발달한 것은 산업혁명이 가져다 준 결과다.

산업혁명 때 증기기관이 등장해 기계문명의 르네상스시대를 개막했다. 그런데 자꾸 증기기관이 터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들을 막기 위해 고심해 낸 것이 바로 규격 인증 제도다. 반드시 특정 기준을 통과한 것들만 민간에 사용될 수 있도록 사전에 철저한 여과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TUV라인란드의 경우 한국에 들어선 것이 87년의 일이다. 그리고 기계 수출산업이 효자 노릇을 하던 90년대에 IMF 상황을 맞았다. 국내 인증시장에 대 변화가 찾아왔다. 대단위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고급인력을 구제하고 경제적인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는 대안을 찾고 있던 정부의 눈에 띈 것이 인증 분야였다.

인증관련 컨설팅이 서서히 존재를 드러냈고, 정부에서도 ‘중소기업 인증비용 지원자금’ 제도를 신설해 적극적으로 인증 분야에 지원했다. 인증 관련 업체가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인증 분야의 활성화와 동시에 치열한 생존경쟁이 시작된 계기이기도 하다.

하나의 수출상품에 국제인증마크 하나가 붙기까지 짧게는 1개월, 대개는 수개월이 걸린다. 제조사의 의뢰가 들어오면 인증기관에서는 먼저 관련 비용에 대한 견적 회의가 열린다.

상담에서부터 최종 인증서 발급까지 어떤 작업, 얼마의 비용이 들지를 계산하는 단계다. 의뢰사와 계약이 성사될 경우 기술 회의가 열린다. 이때부터는 엔지니어가 본격적으로 관여한다.

“기술회의 때에는 저희쪽 검사관과 의뢰회사인 제조업체의 설계자들이 함께 모여 설계 단계에서부터 혹시 하자는 없는지 미리 진단하고 문제가 있으면 수정하도록 요구합니다. 심사원의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규격 적합 여부에 대한 판단 속도와 정확성이 높기 때문에 경력이 유용합니다. ”

기술회의는 간단할 때는 1시간, 복잡한 것은 며칠씩 걸리기도 한다. 요즘은 제작 후 하자가 발견될 경우 생길 금전적, 시간적 손실을 막기 위해 애초에 제품 설계 단계에서부터 인증기관의 자문을 받는 추세다.

제품이 실제로 만들어지고 나면 규격 인증을 위한 정식 서류 절차가 진행되고, 서류검사가 끝나면 최종 검사인 제품검사가 이어진다. 상품에서 하자가 발견되면 이를 지적하고 수정하도록 요구한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정해진 표준규격에 위반된 사항이 없도록 끝까지 고치게 한 뒤 마침내 인증서 발급으로 모든 여정을 마무리한다.

발급된 인증서는 해외 수출시 통관 과정을 비롯해 최종 사용자, 즉 그 나라에서 해당 제품을 수입ㆍ판매하려는 업자에게 절대적으로 요긴하게 쓰인다. 과정 전체를 통틀어, 하자가 많을 땐 1년을 끄는 경우도 있다.

“제조회사에서 이미 제품은 다 만들어놨는데 인증을 받으러 가져왔다가 규격이 맞지 않아서 다시 설계하고 새로 만들어야 하는 일도 왕왕 벌어집니다. 기존 생산품을 폐기하고 다시 만들어야 하므로 금전적으로도 막대한 손해로 이어지죠. ”

규격 인증의 상당 부분은 상품의 안전성에 관한 내용들이다.

검사 항목이 시시콜콜하리만큼 세밀하다. 유리컵 하나만 해도 입이 닿는 부분의 유리 두께, 강도 등의 구체적인 기준이 세밀하게 정해져 있다. 특히 자기통제 능력과 위험 인식이 미약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완구제품은 섬세한 안전규격을 요한다.

예를 들어, 어린이용 장난감 인형의 플라스틱 눈이나 장난감의 부품은 직경 15mm 이상이어야 합격품이다. 그 수치보다 작으면 아이들이 삼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완구에 부착된 끈이나 고무줄도 길이가 220mm 미만이어야 한다. 행여라도 아이가 갖고 놀다가 목에 감길까봐 이를 막기 위해 정한 기준이다.

220이라는 숫자도 어린이들의 평균 목둘레 조사 자료에서 나온 것이다. 그 끈이나 고무줄의 두께가 평균 1.5mm 미만이어도 또 탈락이다. 너무 가늘면 아기들의 살갗을 파고들 수 있어서다.

이 모든 인증용 검사는 육안 검사에서부터 계측 검사 등 엄격하고 정밀한 방법으로 진행된다.

“ 어려움이라면, 제조자의 어려움이 곧 저희의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검사상 저희가 지적한 사항을 제조업체에서 고쳐야 인증이 가능한데, 이를 수정하자면 업체측의 제조 원가가 올라가 가격 상승 상황이 발생하고, 더불어 해외시장에서의 경쟁력이 떨어져 그 업체로서는 큰 타격이 될 수 있거든요.

궁극적으로 우리나라 수출산업을 더 원활히 돕고자 하는 저희 역할의 궁극적인 목적을 생각하면 중간 입장에서 상당히 딱하고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

씁쓸한 경험도 있다. 최근 한 보안경비시스템의 센서 규격 인증을 의뢰 받은 일이 있다. 인증의 정확성과 제조사의 신뢰도를 위해 이들은 늘 그랬듯이 가장 최악의 상태를 선택해 규격 검사를 진행했다. 인증 후 뒤탈을 막기 위해서라도 오히려 제조업체를 도와주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의뢰사에서 이들의 수정 요구 사항을 맞출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미 고객인 외국 수입업자가 무조건 자신들의 제품을 사기로 약속돼 있으니 상관없다며, 그냥 기본 사양대로만 검사해달라고 끝까지 고집했다.

결국 원칙적인 선에서 검사를 거친 뒤 인증서가 발급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가장 우려했던 상황이 결국 터지고 말았다. 현지 시판중 클레임이 걸린 것이다. 해당 상품을 인증했다는 이유로 인증기관에게까지 반품의 책임이 거론돼 한동안 심란한 실랑이를 치렀다.

인증의 원칙과 수출경제의 보조자라는 접경선에서 겪는 이들만의 남모르는 고충이다. 형태상으로는 민영사업이지만 일 자체의 특수성 때문에 사실상 국가기관에 못지않은 책임감과 소명의식을 갖고 일한다. 공익적인 성격이 짙은 전문직이다.

심 본부장은 86년 홍익대 전기공학과를 졸업, 대기업의 전기, 기계분야 부서에서 근무한 뒤 95년 현재의 회사에 입사했다. 엔지니어 경력만 약 10년, 그 후 인증 심사원으로 일한 것만 올해로 약 13년째를 맞는다.

“원래는 인증을 받는 입장이었다가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이리로 오게 되었습니다. ”

입사 당시 실무경험을 가진 한국인 경력사원으로는 거의 최초였다. 엔지니어로서의 경력이 적지 않은 강점이 되었다.

최근 중소기업인 한 반도체 생산회사에서 이들로부터 인증을 받아 간 일이 있다. 국내 대기업들에 반도체 제조공정 자동화 장비를 공급하던 회사였다.

유럽 반도체 시장쪽에서 ‘CE인증만 받는다면’이라는 전제하에 조건부 수출 계약을 맺은 상태로 심 본부장측을 찾아온 것이다. 절차를 밟아 원하던 CE인증을 받은 이 기업은 이후 행복한 뒷소식을 연이어 들려주었다.

올해 상반기만 해도 인증 후 수출량이 전년도의 같은 기간보다 약 10배로 뛰어오르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렸다. 세계 시장으로 진군하는 우리 산업체에 날개를 달아준, 인증 심사원으로서 가장 흐뭇한 결과였다.

“한국 경제계, 특히 중소기업들의 성장과 해외 진출에 저희 또한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 뿌듯합니다. 십여년 이 일을 해 오는 동안 저희가 쌓은 최신 기술 정보와 노하우를 인정한 정부기관이나 대기업쪽에서도 인증에 대해 문의하러 올 때도 있습니다. 여러 면에서 매우 의미있고 보람있는 일입니다. ”

인증 심사원 지원자들에게 필요한 초간단 번역 퀴즈 하나. 인증 관련 자료에 쓰인 shall과 should는 각각 어떻게 풀이해야될까? 그저 ‘해야한다’는 뜻의 미래형과 과거형? 틀렸다. 그래서 ‘대형사고’가 벌어지기 일쑤다.

shall은 강제사항, should는 권장사항을 뜻한다. 자칫 단어 하나만 오역해도 수출기업의 운명이 휘청거린다. 인증 심사원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한국 경제를 소리 없이 함께 움직인다.

● 국제규격인증 심사원이 되려면

기계나 화학, 정보기술(IT) 등 각 산업별로 관련 분야 전공자가 유리하다. 채용시 우선 선발된다. 특히 기업체에서 인증 관련 업무를 담당했거나 해외 무역 실무자, 엔지니어 출신 등의 경험을 가진 편이 좋다.

경력자로 스카웃 되는 경우가 많다. TUV라인란드 코리아의 경우, 입사후 기초 교육기간을 통해 전문가 트레이닝을 받은 뒤 실전 투입된다.

다국적 인증기관에서 근무하려면 일반 비즈니스 영어를 넘어선, 인증 관련 전문용어로서의 외국어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실력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국제규격인증업체는 TUV라인란드 코리아 외에 2~3개가 있으며, 모두 다국적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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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