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시행착오로 사업경륜 쌓아 휴대폰 게임업계 최강자로 우뚝타임지 선정 '세계 기술대가 14인' 등 다양한 타이틀리스크 감수는 사업의 기본… 찬스 만나면 과감한 베팅

타임지가 뽑은 ‘세계 기술대가 14인’, 영국의 모바일콘텐츠 전문월간지 ME가 선정한 ‘2007년 세계 톱50 경영인’, 한국 모바일게임 업계의 대표주자. 그녀의 이름 앞에는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다. 그녀는 이미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시장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바로 박지영(33) 컴투스 대표다.

컴투스는 휴대폰 게임의 최강자다. 2007년 매출 228억 원, 영업이익 73억 원, 순이익 66억 원을 달성했다. 특히 영업이익률은 무려 32%에 이른다. 매출 197억 원, 영업이익 49억 원, 순이익 37억 원을 기록한 2006년과 비교해 매출 성장률은 15.7%, 순익 증가율은 무려 76.3%나 됐다.

우리 나이로 서른 넷의 젊은 여성 CEO. 그 연륜에 회사를 이 정도 규모로 키우고 또한 계속 성과를 높여 나가는 데는 분명 남다른 뭔가가 있지 않을까.

모든 기업인이 그러하겠지만 박 대표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지금의 사업(모바일게임)을 시작했다. 그는 나이는 젊지만 경험은 웬만한 경륜의 사업가 못지않다. 좀 과장하자면 해보지 않은 사업이 없을 정도다.

박 대표는 1996년 고려대 컴퓨터학과 4학년 때 남자 동기(지금의 남편인 이영일 부사장), 선배(현유진 팀장)와 함께 컴투스를 설립했다. 첫 사업 아이템은 MP3 플레이어를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하드웨어 분야라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어 PC통신에서 PC하드웨어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시작했다. 정보를 올리는 한편 컴퓨터 판매도 했지만 비즈니스 모델로 적절치 않았다. MP3 음원 보급도 생각해봤지만 저작권료가 만만찮아 포기했다. 또 주식정보 제공사업도 검토했지만 전문분야가 아니라 포기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6,000만 원을 들여 PC통신망 통합검색엔진을 제작했지만 사업파트너의 인식 부재로 실패하고 부채만 떠안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 통신망 안의 정보검색은 반겼지만 다른 곳의 정보검색에 대해서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근근이 쇼핑몰을 운영하며 사업유지는 해나갔지만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분야가 엔터테인먼트 관련 사업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시련의 연속이었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 최초로 시도한 분야는 DDR(Dance Dance Revolution) 게임의 가정용 발판 개발이었다. 당시에는 DDR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이를 가정용으로 구현해보자는 구상이었다. 어렵사리 시제품을 만들어 100여 명의 얼리게이머(early gamer)들 앞에서 시연을 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엄청난 열광과 갈채가 쏟아졌다.

성공을 확신한 박 대표는 큰 돈을 투자해 본격 양산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경험 부족으로 문제가 불거졌다. 요모조모 세밀하게 따져보지 않아 생산자 측과 마찰이 생겼고 이로 인해 단가가 많이 올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초저가의 중국산 제품도 수입되기 시작했다. 졸지에 큰 빚을 지게 되었다. 박 대표 나이 스물 다섯 살 때인 1999년의 일이다. 앞이 캄캄했다. 이 빚을 어떻게 할 것인가?

첫 번째 맞은 큰 위기였다. 하지만 궁즉통(窮卽通)이라고 했다. 궁하면 통하는 법이다. 지금의 남편 이영일 부사장이 당시 모 회사에 근무했는데 그 회사 사장이 컴투스의 가능성을 보고 과감하게 투자를 한 것이다. DDR 사업을 진행하면서 틈틈이 모바일게임을 준비했던 박 대표는 새로운 투자 자금으로 빚도 갚고 본격적으로 모바일게임 사업에 나섰다.

다행히 시작은 순조로웠다. 시장이 막 형성되던 때라 쉽사리 업계 1위가 되었다. 또 2000년 무렵 벤처캐피털을 통해 많은 돈을 투자 받으면서 사업은 본궤도에 올랐다.

“사실 처음에는 투자를 받을 필요성을 못 느꼈습니다. 부담스럽게 왜 남의 돈을 쓰지,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하지만 그때 투자를 받지 않았다면 생존하지 못했을 겁니다. 투자 덕분에 게임제작에 필요한 연구개발을 할 수 있었고 시장개척도 할 수 있었습니다. 꾸준한 기술개발이 회사 성장의 원동력이었지요.”

또 다른 어려움은 수익성이었다. 휴대폰이 급속하게 보급되면서 사업 인프라는 저절로 구축되었지만, 무료서비스를 한 까닭에 1년 반 동안이나 매출이 없었다.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하지만 그는 장차 사업환경이 개선되면 수익이 생길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인재를 뽑고 게임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돈을 투자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2001년부터 수익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변화도 있었다. 인프라 변화가 그것이다. 사업 초기에는 개발 프로그램이 WAP(Wireless Application Protocol)의 세계였지만 자바(JAVA) 플랫폼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WAP 개발자 중 자바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설 자리가 없어졌고 대규모 인원 교체가 일어났다. 힘든 결정이었지만 변화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다. 이런 발 빠른 적응 덕분에 컴투스는 모바일게임 1위라는 타이틀을 이어갈 수 있었다.

사업을 하다 보면 때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박 대표는 겉보기에는 약하고 여성스럽지만 속은 강한 사람이다. 이 때다 싶으면 과감하게 베팅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1위를 고수하던 컴투스에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추억의 게임인 갤러그 라이센스를 경쟁사에게 빼앗기면서 1위 자리를 내준 것이다. 매출이 급격히 떨어졌다. 만회할 방법은 대표 게임 테트리스의 라이센스를 취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경쟁이 너무 치열했고 가능성도 낮았다.

박 대표는 승부수를 던졌다. 파격적인 제안으로 계약을 성사시킨 것이다. 사실 계약금으로 낼 돈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렵게 돈을 마련해 계약금을 지불했다. 은행 잔고는 ‘제로’가 됐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러나 테트리스로 인한 시너지 효과 덕분에 컴투스는 1위 자리를 되찾고 매출도 오르기 시작했다. 미래에 대비해 3가지 종류의 게임 개발을 미리 마쳐 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반 제조업은 몇 년에 한 번씩 위기가 오지만 변화가 빠른 IT업계는 하루하루가 위기다. 컴투스가 바로 그렇다. 산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산이 있었다. 2003년 영업부진에 따른 코스닥 상장 보류는 컴투스의 또 다른 위기였다. 기대가 컸던 임직원들은 분열되고 사기도 떨어졌다. 게다가 남편인 이영일 부사장은 중국법인으로 갔고 핵심 개발팀장은 군대에 갔다. 몇몇 주요 직원이 경쟁사로 옮겨 어려움은 배가되었다.

말 그대로 비상이 걸렸다. 결단이 필요했다. 부득이 팀장급 급여를 70%로 동결했다. 이 과정에서 이탈하는 팀장도 있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처럼, 부족하지만 남은 인원으로 결속을 다지며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새 임원이 참여하고, 군대 갔던 팀장이 복귀하고, 새 게임이 히트를 치면서 활기가 되살아났다.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자생력이라는 소중한 자산을 얻은 것이다.

“오늘의 1위가 내일의 1위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시장 규모에 비해 경쟁업체 숫자가 많은 국내 여건 속에서 살아 남는 것은 정말 치열한 전쟁입니다. 컴투스의 핵심 경영방침은 두 가지입니다. 개발과 글로벌마켓 진출이지요. 끊임없는 개발만이 살 길입니다. 또 좁은 국내시장을 벗어나 세계시장에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 동안 글로벌마켓 개척에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습니다. 서서히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데 지켜봐 주세요.”

IT업계에서 10년 이상 사업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여성 CEO가 1위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더더욱 보통 일이 아니다. 젊은 여성들에게 기업가 정신의 모델이 될 만한 박 대표가 특유의 리더십을 계속 발휘해 세계 모바일게임 시장의 패자(覇者)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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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