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향유하는 안목이 다양해진 요즘 주류문화의 식상함에 반발하는 대중이 늘고 있다. 그 동안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주류문화보다 비주류문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커지는 추세다. 문화를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기엔 이미 둘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하여, 비주류는 이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비주류는 아웃사이더나 이단아가 아니라 ‘비전’이 있고, 예술세계에 ‘비주얼’이 있으며, 무엇보다 앞으로 ‘비상’할 수 있는 재주를 지닌 미래가 밝은 문화인들이다. 뚜렷한 주관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나가는 ‘내일을 꿈꾸는 비(飛)주류’. 그들만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지난 10월20일 제14회 한국뮤지컬대상 시상식이 열린 서울 여의도 KBS홀. 턱시도에 나비넥타이를 맨 배우들 틈에서 유난히 떨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평소 감정 표현에 서툰 남자는 옆에 있던 친구가 “너 지금 떨고 있니?”라고 말하자 긴장한 나머지 아이 같은 목소리로 “응, 떨려!”라고 대답했다. 몇 초 후 남자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순간, 무대 위에는 그 동안 남자와 동고동락하며 뮤지컬을 만들었던 배우, 스태프들이 들뜬 표정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남자를 번쩍 들어올려 승리를 축하하듯 우승의 헹가래를 올렸다.

‘한국뮤지컬 대상 최우수 작품상’이라 적혀 있는 금빛 트로피가 남자의 가슴에서 출렁거렸다. 고진감래(苦盡甘來)란 바로 이런 기분일까. 3년 동안 공들여 제작한 뮤지컬 <내 마음의 풍금>이 6관왕을 차지한 순간 남자는 굳이 눈물을 숨기지 않아도 되었다.

2008년 뮤지컬 시장은 불황의 연속이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뮤지컬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며 때아닌 호황을 누리자 너나 할 것 없이 뮤지컬 제작에 뛰어든 것이 가장 큰 악재로 작용했다. 물론 작품성 있는 뮤지컬도 있었지만 상업적인 붐에 편승한 졸속제작(저렴한 경비와 극히 제한된 소규모 인원으로 짧은 기간에 만드는 제작형태) 작품들이 물을 흐려놓았다.

■ 졸속제작 풍토는 공연시장 공멸의 길

“뮤지컬 한 편을 제작할 때 최소 2, 3년의 기간이 필요한데, 돈벌이를 목적으로 어설프게 만들면 오히려 다른 창작뮤지컬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작품의 질도 많이 떨어지고요. 졸속제작은 뉴욕의 브로드웨이나 런던의 웨스트엔드 등 공연 선진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겁니다.” 한국뮤지컬대상 최우수 작품상의 영광을 안은 공연 제작사 쇼틱커뮤니케이션즈(이하 쇼틱) 김종헌(42) 대표의 뼈아픈 지적이다.

올 한 해 공연계를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참담함’이 아닐까. 많은 공연이 무대에 올랐지만 이름값을 할 만한 흥행작은 드물었다.

게다가 배우와 스태프 등 인적 자원은 한정됐는데 작품이 배로 늘어나면서 그들의 몸값은 절로 올라갔다. 한 배우가 서로 다른 뮤지컬에 겹치기 출연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공연 수요는 예년과 비슷한데 공급이 눈에 띄게 늘어나자 서로 제살 깎아 먹기 식의 경쟁이 벌어졌다.

김종헌 대표는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며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고 회상한다. 2006년 1월 설립돼 성장세를 이어온 쇼틱 역시 경기불황과 뮤지컬 시장 악재의 직격탄을 맞았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의 2층 양옥집을 개조해 만든 사무실을 팔고 급기야 규모를 줄여 대학로 인근 사무실로 이전해야만 했을 만큼 현실은 차가웠다. 더욱이 발렌타인 극장을 인수해 리모델링해서 만든 극장 ‘쇼틱 시어터’도 <난타>를 제작한 공연 기획사 PMC프로덕션에 넘긴 상태였다. 올해 그가 지나온 힘든 시간을 짐작하고도 남을 대목들이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한 자에게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쇼틱의 창작뮤지컬 <내 마음의 풍금>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보상을 돌려줬다. 한국뮤지컬대상에서 받은 상은 최우수 작품상, 연출상(조광화), 극본상(이희준), 작곡상(김문정, 최주영), 무대미술상(정승호), 신인남우상(조정석) 등 6개 부문. 주요 상은 모두 휩쓸었던 셈이다. 6관왕의 영예는 쇼틱에게 위로였고 동시에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채찍질이기도 했다.

“시상식 며칠 전에 아는 선배를 통해 ‘아무래도 이번엔 아닌가 보다’라는 소식을 접했어요. 당일 행사 담당자와 눈이 마주쳐 미리 귀띔을 부탁했을 때도 ‘미안합니다’라는 부정적인 힌트만 주더라고요. 그런 와중에 갑작스레 쇼틱의 <내 마음의 풍금>이 호명됐으니 제겐 기적이나 마찬가지였죠. 그때의 행복한 기분은 아마도 평생 남아 있을 것 같아요.”

내 마음의 풍금 공연 장면

■ 창작팀 완벽한 조화에 적격 캐스팅

김 대표는 <내 마음의 풍금>이 높은 평가를 받은 비결은 대본, 음악, 연출, 무대 등을 맡은 창작팀의 완벽한 조화에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 배우’와 ‘그 스태프’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만큼 적격의 캐스팅 역시 수상 비결이었다.

“최우수상을 비롯해 6관왕의 영광을 차지한 순간 저를 믿고 함께 해준 배우, 스태프들에게 마음의 채무를 좀 덜었다고 할까요? 그것이 올해 가장 기뻤던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6관왕 수상은 제작자인 김 대표가 다음 작품에 매진할 수 있는 좋은 ‘처방전’이 되기도 했다. 쇼틱은 올해 <컨페션 시즌2>, <소리도둑>, <내 마음의 풍금> 등 세 편의 창작뮤지컬을 무대에 올렸다. 특히 야심작이었던 <소리도둑>은 기대만큼 흥행을 하지 못했지만 그가 가장 애착을 가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소리도둑>에 대해선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부모가 못나서 자식이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죠. 하지만 <소리도둑>에는 분명 빛나는 미덕이 있어요. 이런 신념을 가지고 신중하게 다시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는 올해 쇼틱이 올린 작품을 냉정하게 분석하면서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대표는 공연 프로듀서 출신이다. 아니, 그 전에 배우이기도 했다. 공학도였지만 배우가 되고 싶어 연극 동아리에서 대학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기 위해 3년 동안 보기 흉한 보철기를 끼고 다닐 만큼 그에겐 무대를 향한 강한 열정이 있었다. 20대엔 배우와 연출가로, 30대엔 공연 프로듀서로 맹활약하며 청춘을 보낸 김종헌 대표. 그에게 젊음은 치열함, 그 자체였다.

“저의 20대와 30대 시절은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치타’와 같았다고 할까요.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에서 1%의 가능성을 발견하면 저는 도전장을 내밀었죠.”

■ '난타 신화' 송승환의 오른팔 출신

20대에 PMC프로덕션의 기획실장이었던 그는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런던으로 훌쩍 떠날 만큼, 한마디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바람의 아들’ 같은 사람이었다. 수중엔 택시 운전을 해서 번 항공권 값이 다였지만 그는 런던에 가면 막연히 성공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더 컸다.

세계적인 공연 프로듀서인 카메론 매킨토시를 만나 매킨토시 극단의 아시아 지사장이 되어 돌아오리란 원대한 꿈은 엉뚱하게도 난타 에딘버러 페스티벌 런던지사 공연 프로듀서로 변형되었다. 하지만 그는 런던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카메론 매킨토시처럼 훌륭한 뮤지컬 제작자가 되리라는 꿈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3년 동안 런던 생활을 하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다시 PMC프로덕션에서 공연 프로듀서로 일했다. 김 대표가 난타 신화를 이룩한 송승환 PMC프로덕션 대표의 오른팔이었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딱 10년간 PMC에서 공연 프로듀서로 일한 그는 쇼틱을 창립했다.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남들은 불혹의 나이에 무슨 모험이냐고 말렸지만, 제겐 마흔이 불혹이 아니라 ‘유혹’이었지요. 바로 오래 꿈꿔왔던 공연 제작자로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였지요.”

김 대표는 공연계의 틈새시장을 비집고 들어가 새로운 사업으로 성공할 수 있는 아이템이 무궁무진했다. ‘쇼틱’(Showtime is creative의 약자)을 출범시킨 것도 그만한 준비가 돼 있었던 셈이다. ‘아티스트 마켓’, ‘콘텐츠 쇼핑몰’, ‘공연 중개업소’라 불리는 쇼틱은 처음부터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공연을 만들지 않았다. 기존 제작사들이 기획, 창작, 제작을 모두 전담했다면 쇼틱은 철저히 분업화된 방식을 추구했다.

쇼틱이 총괄 지휘해 작품을 만들면 제작은 외부에서 맡거나 쇼틱과 공동제작 방식으로 공연을 올리는 것이었다. 쇼틱 창립 첫해에 퓨전사극 뮤지컬 ‘키스미타이거’와 코믹스릴러 ‘살인사건’, 로맨틱코미디 뮤지컬 ‘컨페션’ 등 소형 창작뮤지컬 3편을 올릴 수 있었던 비결도 공연계의 틈새시장을 잘 파고든 전략 때문이었다.

“창업 첫해엔 남들처럼 성장통도 겪었죠. 안정적인 직장이었던 PMC프로덕션에서 작품 하나 올릴 때마다 수명이 1년씩 단축된다고 투정을 부렸는데, 얼마나 낭만적인 투정이었는지 나중에야 알게 되었죠. 하지만 그 사이 쇼틱은 좋은 창작뮤지컬로 대중에게 인정도 받았어요. 지금은 경기가 안 좋다 보니 경상비를 최대한 줄이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요. 신작 발표는 다소 지연될 것 같고요. 대신 쇼틱의 ‘캐시카우’가 될 수 있는 작품을 마련해 놓고 새롭게 도전할 생각입니다.”

■ 무거운 책임감에서 에너지 얻기도

성공을 향해 질주하던 그에게도 슬럼프는 있었다. 뜻밖에도 한국뮤지컬대상에서 6관왕을 차지한 바로 직후였다. “자식이나 마찬가지인 작품을 3년 동안 품고서 예쁘게 태어나기를 바라다가 순산하고 난 후의 ‘산후 후유증’ 같다고 할까요? 마치 태릉선수촌에서 금메달을 목표로 치열하게 연습한 선수가 그 목표를 이루었을 때 저와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기쁨과 성취감 후에 오는 몸과 마음의 에너지 고갈이랄까, 뭔가 근력의 상실감 같은 걸 느꼈죠.”

이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배낭 하나 짊어지고 도보여행을 떠났다. 그가 선택한 여행 코스는 제주 올레길이었다. “제주 올레길과 아직 개척되지 않은 새로운 길을 걸으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집안의 장남으로서, 회사의 리더로서 지닌 책임감이 제 등에 짊어진 무거운 짐과 같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지금 당장은 짐 때문에 힘들고 곤혹스러워도 어찌 됐든 숙소에 돌아가면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게 바로 그 짐 안에 들어있는 것들이잖아요.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든 게 바로 짐이고, 내일을 꿈꿀 수 있는 것도 바로 짐 때문이더라고요.”

잡다한 생각을 버리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조차 치열한 ‘고난의 행군’을 선택한 그는 한가지 깨달음을 얻어 서울로 돌아왔다. 그것은 역시 책임감이었다. 슬럼프는 자연스레 극복된 셈이었다.

“혼자만의 도보여행을 다녀오길 잘 한 것 같아요. 지금은 새 작품에 대한 책임감으로 다시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중이죠.”

새 작품은 외국소설을 원작으로 한 창작뮤지컬인데 2010년께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내년에는 봄이 오면 <내 마음의 풍금>을 한층 진화시켜 다시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또 12월쯤에는 오스카 와일드 원작의 창작뮤지컬 <행복한 왕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김 대표는 공연 프로듀서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바로 ‘존중’이라고 말한다. 예술가를 존중하고 관객을 존중할 때 최고의 공연이 탄생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예술가와 관객의 중간에서 좋은 작품을 만드는 ‘교량’과 같은 존재다.

■ 프로듀서는 예술가와 관객의 교량

“주방에서 칼을 들고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주방장이 예술가라면 프로듀서는 매니저라 할 수 있어요. 주방장과 고객 사이를 조율해서 서로 기분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프로듀서의 할 일이죠.”

김 대표의 이메일 아이디는 ‘adam’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첫째는 ‘쇼틱의 첫 번째 사람’이고, 둘째는 한자로 아담(我談)인데 ‘나의 이야기’란 뜻이자 그 이야기를 제작하는 예술가란 뜻이다.

20대와 30대를 거쳐온 그의 질주는 40대에도 이어질 것이다. 쉰 살쯤 그의 모습은 어떨까.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나 <에비타>, <오페라의 유령>으로 유명한 영국의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50주년 생일 때 자신의 작품에 출연했던 스타들과 함께 기념 콘서트를 열었죠. 무척 감동적으로 봤는데, 저도 쉰 살이 되는 해에 제 작품에 출연했던 스타들과 쇼틱의 이름으로 콘서트를 열고 싶어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 생각이에요.(웃음)”



류희 문화전문라이터 chironyou@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