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석] <경계도시 2> 홍형숙 감독 인터뷰2003년 송두율 교수 사건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개봉

오는 18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영화 <경계도시 2>는 원래 <경계도시>의 후일담으로 기획되었다.

국정원에 의해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와 동일 인물로 낙인 찍힌 재독철학자 송두율 교수가 2000년 늦봄통일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귀국하려다 좌절된 과정을 담은 <경계도시>가 국내외에 상영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례적으로 많은 해외민주인사들이 초청된 2003년 9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추진한 송 교수의 귀국이 성사되었다.

홍형숙 감독은 재학 중이던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송두율 교수의 눈에 비친 한국사회의 초상'을 테마로 3주간 졸업작품을 찍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국정원이 체포 영장을 발부하고 송 교수의 친북 활동 혐의에 대해 조사를 시작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송 교수가 노동당에 가입했고, 당국에 의해 김철수로 불린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음이 밝혀지자 반성과 '전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들끓었다. 냉전은 진행중이었다. 후일담을 쓸 때가 아니었다.

영화 '경계도시2'
그야말로 소용돌이였다. 노동당 입당이 북한 입국의 통과의례고, 김철수라는 가명을 의식하고 행동한 적이 없다는 송 교수의 해명은 소용 없었다. 그가 평생 갈고 닦은 '경계인'의 철학은 기회주의적 알리바이로 전락했다.

냉전 이데올로기를 정면돌파하겠다는 뜻으로 "체포영장을 꽃다발"로 받았던 이 철학자에게 한국사회는 수갑을 채웠다. 명목은 국가보안법 위반이되 실질은 괘씸죄였고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혹은 무성의였으며 우리 자신의 콤플렉스였다.

<경계도시 2>를 보면 이제야, 그게 보인다. 세기가 바뀌었건만 <경계도시>의 비극은 매복되어 있었다. 그것도 '냉전 이데올로기'라는 간명한 분석만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넓고도 깊게.

그래서 <경계도시 2>의 주인공은 송두율 교수라기보다 오히려 한국사회다. 홍 감독의 말처럼 "당시 무관심했거나, 알고는 있으되 관망했던, 또는 너무 민감한 일이라 관여하지 못한, 머릿속으로는 송 교수에 대해 어떻게든 판단하고 있었을 우리"다. 영화 속에서 정작 송 교수의 말은 들리지 않고, 우리가 앞다투어 두었던 '훈수'만 들린다. 그가 입국하는 공항 앞 "가면을 벗고 김일성, 김정일과의 관계를 밝히라"는 피켓이나 몇몇 정치인들의 '빨갱이' 발언은 싱거울 정도다.

"그러니까 당신이 김철수냐"고 묻는 기자들은 집요하다. 송 교수 스스로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이 이름이 한국사회에서는 곧 친북 활동, 반체제 범죄이자 '경계인'이 아니라는 편향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이름 하나가 모든 것을 의미하고, 사태를 손쉽게 정리하기 때문에 언론의 입장에서는 그만한 키워드가 없다. 송 교수가 김철수로 불린 정황, 그가 '김철수'로서 한 일 같은 내용은 세세히 논할 가치가 없다. 독일의 한 언론의 표현에 따르면 "관찰자가 아닌 게임 플레이어"로서의 한국 언론에게는 더더욱.

송 교수가 그 덫에 걸리자 그의 귀국을 성사시킴으로써 한국사회의 성숙을 논의하고자 했던 지식인들이 나선다. "문제는 국민들에게 각인된 이미지"라며 "기술적으로" 반성하고 전향하라고 제안한다. 이번에도 이름이 문제다. 국민 정서상 '경계인'은 너무 애매모호하다.

송 교수의 부인인 정정희 여사의 말처럼 "거의 40년 간의 외로운 삶"을 감수하면서 지켜온 소신에 대해 "원칙적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귀국추진위원회의 한 인사가 우려한다. 정 여사가 "차라리 추방당하겠다"고 하자 "송 교수는 개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 여기서 피터지게 살고 있는,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냐"고 되묻는다.

이름에 대한 공방들 속에서 송두율은 사라지고 '송두율'만 남는다. 나와 네가 걸쳐진 채 소통하는 경계'지대'을 꿈꾸었던 경계인은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경계'선'을 넘어오지 못했다.

한 달 만에 송 교수가 결국 구속되면서, 홍형숙 감독도 졸업작품을 포기했다. 다큐멘터리영화 감독으로 살아온 20여 년을 통틀어 최대 고비였다. 이 거대한 부조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송 교수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 위원이라는 핵심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 출국한 2004년 8월까지 꼬박 1년을 기록한 홍 감독은 지쳐 있었다. 그의 카메라에 담긴 것은 "잔혹한 국경선"이고 "지구상의 마지막 경계도시"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였다.

그리고 거의 2만 분 분량의 촬영분을 104분의 상영분으로 만드는 데 5년 여의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의무적으로 본 촬영분 10분 때문에 하루가 꼬박 괴로울 만큼 '거리 두기'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편집하는 것이 옳은지 판단하기도 어려웠다. 한 장면에 대해서도 자문(自問)하고 또 자문(諮問)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포기하고 싶어도 이 오랜 시간 동안 지혜와 힘을 보태준 이들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빚을 많이 진 작품"이라고 7년만에 관객 앞에 돌아온 홍형숙 감독이 말했다.

영화를 개봉하는 소감이 어떤가.

빚진 마음이 크다. 개봉 후 송두율 교수를 비롯해 영화에 나오는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래도 우리 스스로 한국사회를, 아프더라도 정직하게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당시 사건을 실감하지 못한 젊은 관객들이 어떻게 봐줄지 궁금하다.

송두율 교수는 영화를 봤나.

2006년 가편집본을 완성한 후 진척될 때마다 보이고 의논했다. 송 교수의 트라우마가 심해서 마음이 아프다. 2004년 베를린으로 돌아간 후 한국사회와의 연을 거의 끊었다. 이 영화를 보고도 "상처를 헤집는 것 같다"고 말하더라.

송 교수의 '경계인'이라는 철학적 개념이 정치 공방에 의해 기회주의적 알리바이 정도로만 이야기되는 상황이 씁쓸하게 보였다.

내가 이해하기에 송 교수의 '경계인'은 가늘고 날카롭게 양쪽을 구분하고 대립시키는 '선'이 아닌,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섞이는 '지대'로서의 경계를 넓히는 역할이다. 한국사회가 이런 뜻을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경계'라는 말 자체가 정치적으로 예민하게 해석되는 분위기니까. 송 교수의 행적에 대한 평가를 떠나 그 철학적 성과를 한국사회가 끌어안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여전히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보편적이지 않나. '경계인'은 이를 각성하게 만드는 개념이다.

감독 자신의 레드 콤플렉스를 돌아보는 과정도 영화의 중요한 한 축이다. <경계도시> 상영 당시 "송 교수가 김철수든 아니든 무슨 문제냐, 문제는 그가 들어올 때 대한민국이 그를 안을 수 있느냐는 것"이라고 말했던 감독도 송 교수가 스스로 김철수임을 알았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 한다.

송 교수는 이를테면, 한국사회라는 리트머스 시험지에 떨어진 민감한 시약이었다. 냉전 이데올로기는 이제 일상과 무관한, 철지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생히 살아 있었다. 나의 신념도 흔들렸고,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치던 많은 이들도 자신이 반대하던 잣대로 송 교수를 판단했다. 공포스러웠다.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원인이 냉전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하나. 물론 강력한 영향을 미쳤지만, 오늘날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그 도구적 편리함 때문에 지속되는 것 아닐까. 영화 속 언론의 보도 태도가 그것을 증명한다.

냉전 이데올로기는 연원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적을 구분하는 그 단순하고 선명한 법칙이 오늘날 일상의 여러 영역에서 작동하고 있다. 연예인의 행동 하나에 여론이 들끓는 것도 한 예다. 개인에게 전체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폭력성이야말로 내가 레드 콤플렉스를 넘어 지적하고 싶었던 부분이다. 송 교수에게 훈수가 쇄도했다는 점은 그만큼 한국사회가 인권에 대한 이해와 인간 존재에 대한 예의가 없다는 증거다. 민주화 되었다고 하지만 일상적 민주주의는 아직 먼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단순히 이념에 대한 것도, 지나간 일에 대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합리적 이성, 인간에 대한 존중이 아닌 전략적 판단을 상식으로 만들고 있다. 이 점이 정권이 좌냐 우냐, 라는 문제보다 더 심각한 사회 문제다.

송 교수 귀국을 추진한 이들이 나중에는 그의 반성과 전향의 수위를 놓고 옥신각신하는 광경을 보여준 것은 용기 있었다. 이상을 지향하고 진보를 믿으면서도 한편으로 전략을 고려해야 하는 한국사회 지식인들의 고민이 생생했다. 그 광경을 보는 심정이 어땠나.

카메라 뒤에 있지만 계속 관찰해야 할지, 저 안에 뛰어들어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편집할 때도 힘들었고, 상영할 때마다 여전히 힘들다. 송 교수더러 경계인이기를 포기하라는 것처럼 공감할 수 없는 말들이 있더라도 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지 알고, 개인 자격으로 횡포를 부리는 게 아니라 불가피하게 악역을 맡고 있는 것임을 아니까. 고맙게도, 당사자들이 이 장면에 대해 "당신이 진심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편집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원칙이 있었나.

우선 송 교수가 입국한 후 한 달간의 소용돌이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려고 했다. 그 안에 한국사회의 현주소와 치유되어야 할 상처, 자성할 부분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고 힘들어한 상황이니만큼, 특정 개인에게 책임이 지워지는 차원으로 보여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인권을 보호하려는 뜻이었고, 나아가 초점을 한국'사회'에 맞추려는 것이었다.

송 교수가 입국한지 열흘만에 처음으로 홍 감독은 그와 단 둘이 있게 된다. "들어야 할 얘기가 너무 많았고, 무엇보다 앞으로 이런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송 교수는 너무 지쳐 있었다. 간절히 침묵을 원하는 신호 앞에서 홍 감독은 갈등했지만, 그냥 "지고 말았다."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정적이 흐르는 장면이다.

출국하기 이틀 전에야 송 교수는 고향인 제주를 찾을 수 있었다. 귀향의 길은 그렇게 멀고도 험했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마냥 좋아하는 송 교수를 카메라는 애틋하게 바라본다. "송 교수가 어린 아이처럼 보였어요. 고향이라는 게 그런 건데..."라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던 홍 감독이 말을 잇지 못했다.

홍형숙 감독이 인권과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말할 때, 이 장면들이 떠올랐다.



박우진 기자 panorama@sportshankoo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