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조수미<Ich Liebe Dich>로 5년 만에 정통 클래식 앨범 발표… 국내외 공연도

"내겐 음악이 종교 같아요."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할 정도로 음악은 소프라노 조수미의 삶 구석구석을 물들여놨다.

소소한 기억들마저 음악과 이어진 탓인지, 수십 년 전의 묵은 기억은 때때로 스멀스멀 피어올라 감정을 휘저어 놓곤 한다.

2006년 발표했던 바로크 앨범 에서 바흐의 음악을 녹음할 때도 어린 시절 바흐와의 악연 아닌 악연이 떠올랐다.

어릴 적 피아노를 쳤던 꼬마 조수미는 하루 여덟 시간, 바흐의 인벤션(invention) 연습이 끝나기 전까지 방에서 한발 짝도 나와서는 안됐다.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 방식은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가 아닌 '속박의 아버지'로 여겨지게 만들었다.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쫙 끼칠 정도로 싫어하는 작곡가였어요. 바로크 앨범을 준비할 때 처음엔 고생 좀 했죠." 그러나 음반 작업은 종종 놀라운 마술을 부리기도 한다. 앨범 속에 있는 바흐의 '커피 칸타타'는 그를 향한 견고한 마음의 빗장을 풀어준 곡이다.

"악보를 본 순간, '바흐 시대에도 커피가 있었단 말이야?" 하면서 굉장히 놀랐어요. 그 노래를 연습하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참 많았는데 그러지 못해 답답했죠. 그런데 제가 잠깐 꿈을 꿨었나 봐요." 환영처럼 탁자 위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바흐가 마주 앉아 있었다.

200여 년의 시공을 뛰어넘은 바흐와 소프라노 조수미. 그녀가 그를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건넨 질문은 "선생님! 그때도 커피가 있었어요?"였다. "우리 시대 커피는 너희가 지금 말하는 마약 같은 거였다. 그 당시 커피를 찾던 사람들은 현실을 회피하고 싶거나 시대를 앞서가는 아방가르드한 사람들이었지. 바흐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런 경험 하면서 음반을 만드는 것이 놀라운 작업일 수 있구나 생각했어요." 덕분에 악몽 같던 바흐의 기억은 한층 친근한 이미지로 덧칠해졌다.

바흐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바로크 앨범 이후 한동안 크로스오버 앨범에 힘을 실었던 그녀가 5년 만에 정통 클래식 앨범을 발표했다.

지난 26일 발매된 독일 가곡집 로, 이 앨범은 5년 전과는 달리 소녀 시절의 황홀한 경험을 떠올렸다. "처음 접한 독일 가곡은 브람스의 자장가였어요. 아버지가 듣던 LP 음반은 소프라노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의 것이었죠. 너무나 감동적이었어요." 1983년, 소프라노 조수미는 오스트리아 짤쯔부르크에서 슈바르츠코프의 마스터 클래스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한동안 이탈리아 오페라에 푹 빠져 독일 가곡은 다음 기회로 미루던 참이었다.

"당시 스무 살이었는데, 이탈리아 오페라를 통해서 저의 열정을 더 보여주고 재능을 확인하고 싶었어요. 독일 가곡이 가진 절대적이고 깊이 있는 음악을 이해하긴 어렸던 거죠. 늘 슈바르츠코프처럼 아름다운 독일 가곡을 부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이번 앨범을 통해 아름다운 추억과 소중함을 꺼내 보이게 됐어요."

앨범엔 모차르트 외에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멘델스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낭만파 거장들의 곡이 수록되어 있다. 국내 음악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곡들로 구성된 앨범은 오히려 편곡에 공을 들였다. 피아노 6중주를 통해 화려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살렸고 목소리와 각 악기 간의 '앙상블'에 초점을 맞췄다.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 첼리스트(클라우스-디터 브란트)를 제외한 협연자들이 20대의 클래식계 라이징 스타들이라는 점이다.

재독 바이올리니스트 김수연과 강주미, 더블베이스 유망주 성민제, 한국계 독일인 피아니스트 크리스토퍼 박, 독일에서 활동 중인 기타리스트 이정민, 중국인 비올리스트 웬시아오 쳉, 피아니스트 에프게니 보자노프가 그들이다. 조수미는 젊은 연주자들과의 레코딩 결과에 진심으로 만족한 눈치였다.

"자장가가 세 곡이나 들어 있죠. 슈베르트, 모차르트, 브람스. 세계 수많은 언어로 번역돼 너무나 잘 알려진 곡이지만 어떻게 다르게 표현하느냐, 어떤 악기를 쓰느냐가 관건이었죠. 편곡과 앙상블의 도움이 컸다고 봐요. 원곡과는 달리 무척 현대적으로 편곡됐어요. 다들 마음에 들지만 전 이들 곡 중에서 모차르트 자장가가 가장 마음에 듭니다."

이번 앨범을 라이브로 만날 수 있는 공연이 3월 28일 서울 공연을 시작으로, 마산(4월 3일), 대전(7일), 고양(9일), 인천(11일)에서 열릴 예정이다. 독일 가곡과 함께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의 아리아 '여기 계신 숙녀 여러분'도 선보인다. 고난도의 기교와 섬세한 감정 표현을 동시에 드러내야 해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소프라노 아리아'로 꼽힌다. 앨범 외에는 국내외 무대에서 단 한 번도 선보인 적 없던 곡으로 그녀에겐 새로운 도전인 셈이다.

국내 공연 외에도 중국, 일본, 싱가폴, 미국, 캐나다 투어 등이 이어진다. 여름에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을 초연한다. 오는 10월, 보스턴에서 개막하는 제1회 아메리칸 성악 콩쿠르의 명예 심사위원으로도 위촉된 그녀는 언젠가 '수미 조 어워드'를 제정해 한국 음악가들을 돕고 싶다는 바람도 전했다.

한편, 최근 런던에서 개막한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신작 뮤지컬 (뮤지컬 <오페라 유령>의 후속작)에서 소프라노 조수미는 또 한 번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신작 앨범에 참여하면서 초연에 초청된 것. 그녀는 뮤지컬 OST의 한국 특별반에서 동명 주제곡의 한국어 버전인 '사랑은 영원히'를 불렀다. 크리스틴의 완벽한 탄생으로 웨버를 비롯한 제작진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내년이면 소프라노 조수미가 세계무대 데뷔 25주년을 맞는다. 그에 맞춰 성대한 기념 공연도 예정되어 있다. 아직 밝힐 단계는 아니지만 굉장히 흥미로운 프로젝트들이 많다는 그녀는 '아시안 게임'이라는 말을 흘려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