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영화> 박동훈 감독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등 겪은 3세대 이야기 블랙코미디 톤으로 그려

16일 개봉하는 영화 <계몽영화>는 한 가족의 계보도다.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할아버지, 한국전쟁을 겪고 개발독재 과정을 통과한 아버지,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고 IMF 직후 엄마가 된 딸까지 3세대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얽힌다.

'주류'적 삶에 대한 욕망으로 각각의 시대마다 당연하고도 적당히 처세해 온 가족사는 한국사회의 대중적 근현대사다. 할아버지 정길만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다니며 틈틈이 독립운동하는 친구의 홀어머니를 돌보고, 아버지 정학송은 평생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가장 역할에 분투한다.

엄격한 가정 교육 하에 자란 착하고 반듯한 딸 정태선은 서울 상위권 대학을 나왔고 아들의 조기 영어 교육을 위해 기러기 엄마가 됐다.

이런 전형성은 곧 대표성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사람들도 평범히 지향하곤 했던 삶의 서사다.

나름의 애환과 고충도 상식적이다. 정길만의 친일 행위는 어떤 극렬한 저항도 무력했던 상황에서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선택한 바였고, 가부장으로 군림했던 정학송은 "그래도 전쟁 때에 비하면 세상 좋아졌다"고 되뇌며 술과 클래식 음악에 탐닉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는 데 급급해진 정태선 세대에게 학생운동 했던 시절은 추억이다. 정태선은 외로워하는 남편에게 "이만하면 당신도 주류니 징징대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자신은 미국에 애인이 있다.

딱히 악하거나 특별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러나, 어딘지 비틀린 데가 있다. 정길만이 일본 순사 앞에서 친구를 범인으로 지목할 때, 정학송이 카라얀의 공연을 제대로 녹음하지 못했다고 어린 정태선을 때릴 때, 분을 참지 못한 그녀가 강아지를 목 매달 때 영화는 섬뜩하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먹고 사는 게 우선이니까', '남들 하는 대로니까' 같은 이유로 합리화해 온 한국사회 근현대화에 내재된 폭력성이기 때문이다.

<계몽영화>는 우리가 공공연히 간과해 온 폭력성이 어떻게 일상적으로, 또 결정적으로 작동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경험이 낳은 "살고 보자"는 척박한 사회적 목표는 아파트에 투자하고, 사교육에 매달리며, 약자를 외면하고 돈 앞에 조아리며 경쟁 논리로 스스로 목 조이는 오늘날 대중문화의 악착 같은 뿌리다.

그 점을 모를 리가 없는 데도 '이탈'을 두려워하며 관습의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한국사회를 영화는 블랙 코미디의 톤으로 그려낸다.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안타깝다는 듯. 영리한 우리들의 모양이 우습고도 슬프다.

지난 8일 <계몽영화>의 박동훈 감독을 만났다.

영화는 어떻게 구상했나.

-2005년에 만든 단편영화 <전쟁영화>에서 출발했다. 60년대를 배경으로 선으로 만난 남녀가 마치 예비역들이 군대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나누듯 서로의 전쟁 경험에 공감하다 결혼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영화를 끝내고 아쉬움이 남았다. 이런 세대성이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까지 풀어내 보고 싶었다. 가족을 통해 그들의 위아래 세대 이야기까지 담은 것이 <계몽영화>다.

일제 강점기, 개발독재 시기 등이 주요 배경이다. 이 시대를 선택한 기준은.

-시대사회적으로 형성된 비틀리고 모순적인 태도가 가족 내에서 전이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태도가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시대를 선택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은 현재 사회 분위기의 근원인 것 같다. "살고 보자"는, 도저히 중요한 가치관이 될 수 없는 목표가 당연하게 여겨지게 된.

일상이 세밀하게 묘사된다. 겪어보지 않은 시대를 재현하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

-최소한 오류가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생활사 자료를 많이 봤다. 강준만, 한홍구 선생님이 쓴 역사책도 도움이 많이 됐다.

80년대나 현재에 대한 묘사에는 감독 자신의 경험도 녹아들었을 것 같은데.

-정태선이 나와 동갑이다. 80년대에는 그녀처럼 아버지를 위해 녹음과 녹화를 많이 했다.(웃음) 아버지가 카라얀을 좋아하셨다. 태선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양손 가득 맥주를 사들고 최루탄 연기가 매캐한 길을 걸어오는 장면도 경험이다.

전쟁을 겪은 세대 중 정학송처럼 유난히 오디오와 클래식 음악 등 서구 '신문물'을 애호하는 취향을 가진 분이 많은 것 같다.

-전쟁 경험에서부터 달아나 집착할 데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강박이 다음 세대에 대한 강요로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93학번인 정태선을 바라보는 시선은 감독 자신의 세대를 향한 것인가.

-퇴색된 세대랄까. 대학생 때는 아직 학생운동을 했지만 지금은 사교육에 열을 올리는 기러기 세대다.

영화 속에서 태선의 가족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남편이 '주류적' 삶의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괴로워 하다가 태선의 외도를 알고 자살까지 시도한다. 게다가 아들이 그 광경을 본다. 그들의 가족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의 조기 영어 교육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계약'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까. 그들을 통해 한국사회의 앞날을 뿌옇게 보여주고 싶었다. 아들에게 남은 상처가 어떻게 확장될지 고민해 봐야 한단 뜻에서.

인물들이 한국사회의 전형들이다. 그 점을 표현하기 위해 배우들에게 요구한 바가 있나.

-그들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왜곡되고 비틀려 보일지라도, 스스로 잘 모르고 시대에 묻어간 인생들이라고 말이다.

어떤 관객이 봐주었으면 하나.

-영화가 다루는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보면 좋겠다.

다음 영화는 계획하고 있나.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구상하고 있다. 당시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 너무 이분화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일상을 정확하게 그려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사람들이 어떤 욕구를 가지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았는지 말이다. 우리는 다뤄지지 않았던 것을 발견해주거나 무의식을 포착해주는 영화를 봤을 때 괜찮다고 느끼지 않나.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