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L 첫 여성 심판위원장 강현숙KBL 심판 관리에 동분서주 "공정한 판정이 농구 살길"선수·기자 떠들썩한 결혼후 아이 셋 키우다 다시 코트로 "난 영원한 농구인"

어제는 부산, 오늘은 경기도 고양.

2011~2012 프로농구가 개막된 뒤 더욱 바빠진 사람이 있다. 바로 한국프로농구(KBL) 사상 첫 여성 심판위원장 강현숙(56)씨다. 1973년부터 1980년 은퇴할 때까지 8년 동안 태극 마크를 달고 코트를 주름 잡던 원조 '얼짱 스타'였다.

지난 19일 고양 오리온스와 원주 동부의 프로농구가 벌어진 고양실내체육관에서 강 위원장을 만났다. 이날 인천시 부평구 삼산월드체육관에선 인천 전자랜드와 전주 KCC의 경기까지 모두 2게임이 열렸다.

강 위원장은 바빴다. 오후 7시 경기시작에 앞서 심판실에서 오리온스-동부전을 맡은 장준혁 주심과 봉하민, 최성철 부심에게 경기 진행에 꼭 필요한 전달 사항을 지시한 뒤 인천 경기를 맡은 박웅열 주심에겐 전화로 지시 사항을 이야기했다.

강 위원장은 '코트 위의 포청천'인 KBL 심판진 34명을 직접 관리한다. 라운드별로 각 경기마다 심판을 직접 배정하고, 각 체육관마다 돌아다니며 경기 진행을 파악한다. 그리고 잘잘못을 가려낸 뒤 매일 오전 10시 서울 강남구 신사동 농구회관에서 경기 분석을 하면서 심판들을 재교육한다.

- 프로농구가 시작됐습니다. 6개월의 대장정을 이끌어 갈 심판들에게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정규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는 1라운드, 지금은 1쿼터 초반부터 집중하라고 말합니다. 처음에 심판이 콜을 잘못하면 계속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일관성 있는 판정을 내리라고 매번 이야기합니다."

- 올해 바뀐 것이 있다면.

"룰이란 것이 갑자기 바뀔 수는 없는 일이구요. 예전부터 있었던 애매한 판정 중에서 인텐셔널 파울을 엄하게 콜하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입니다. 팬들이 즐거워할 수 있는 농구가 되려면 '빠른 농구'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고의성이 있는 파울에 대해선 주저하지 말고 휘슬을 불어야 한다는 것이 KBL의 입장입니다."

신임 한선교 KBL총재는 수장의 자리에 앉자마자 남자 농구가 겨울 실내 스포츠로서 인기를 이어가려면 학연, 지연 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소신을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다. 그래서 주변의 조언을 듣고 왕년의 여자 농구 스타플레이어였던 강현숙 대한농구협회 이사에게 심판위원장직을 제의했다. 파격적이었다. 일부에선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도 많았다.

- 심판위원장을 제의 받았을 때 심정은.

"남자 농구 쪽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라 많이 고심했습니다. 섣불리 답을 할 수 없었어요. 그러면서 왜 신임 총재께서 여자인 저에게 이런 제안을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그리고 가족들과 상의했습니다. 저야 남자 농구 쪽에 달리 인맥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니 투명한 판정, 공정한 판정이 프로 농구가 살 길이란 판단을 한 것이구나 생각했지요."

- 가족들의 반응은.

"가족들이 용기를 많이 주었어요. 남편은 남자 농구지만 평소 하던대로 소신껏 사심없이 하면 뭔가 제대로 할 일이 있을 것 같다고 힘을 실어 주었고요. 딸 셋은 '엄마 대단하다'며 '이젠 엄마의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등을 떠밀어 주었어요. 그러면서도 워낙 민감하고 힘든 일이라 신경을 많이 쓰다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어떻게 하냐며 걱정도 했고요."

강 위원장은 외환은행 선수 시절이던 1978년 동아일보 체육 기자였던 남편(김종완 현 재외동포재단 사업이사)을 처음 만났다. 늘 국가대표로서 태릉선수촌에서 합숙훈련을 하는 날이 많아 제대로 데이트도 못했다. 어쩌다 훈련이 없는 일요일이면 성당에서 만나 짧은 데이트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시나브로 서로 아끼는 마음이 깊어졌고, 1980년 11월24일 명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 당시에는 미녀 여자 농구선수와 체육기자의 러브 스토리가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을 텐데요.

"태릉선수촌에서 합숙훈련을 하는데 어느 날 농구 담당기자라며 취재를 하면서 저를 눈여겨 봤던 것 같아요. 당시 대표팀은 정주현 선생님(감독)과 신동파 선생님(코치)이 맡고 계셨는데 선수가 기자와 이야기하는 것도 쉽지 않을 때였어요. 그러면서 자주 왔다갔다 하고 선생님에게 슬쩍 제 이야기도 했던 것 같아요. 나중에 들었지만 선생님들에게도 '운동하는 동안 절대 지장 없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고, 저에게도 똑같은 언약을 하더니 끝까지 그 약속을 지켜줬어요. 주변 사람들의 평도 좋았고요. 그렇게 인연이 돼 결혼했고, 아이 셋 키우면서 가정을 꾸려 나왔어요."

이제 사위까지 본 강 위원장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잖아요"라며 아주 편하게 웃었다.

강 위원장은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를 하느라 결혼 준비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1980년 11월20일 장충체육관에선 외환은행과 코오롱의 가을철 여자 실업농구 연맹전 준준결승전이 열렸다. 현역 선수로서 마지막 대회에 출전한 외환은행의 주장 강현숙은 꼭 우승을 하고 싶었다. 대표팀에 나가 있느라 소속팀에선 제대로 성적을 내지 못한 탓에 늘 미안한 마음이 가득 했다. 그러나 경기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58-59. 외환은행은 1점차로 패했다. 등번호 11번과 영영 헤어져야 하는 강현숙은 코트에 서서 울었다.

강현숙의 마지막 경기는 동아일보를 비롯한 모든 일간지의 체육면을 장식했다.

- 마지막 경기가 너무 아쉬웠겠습니다.

"선수로서 아쉬움이 많았지만 여자로선 참 다행이었어요. 준결승과 결승까지 올라갔으면 결혼식 하루 전까지도 코트에서 땀을 흘려야 했으니까요. "

강 위원장은 광희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농구공을 잡았다. 농구 선수가 됐다는 소식에 아버지는 신발주머니에 '농구 선수 강현숙'이란 글씨를 보기 좋게 써주셨다. 그리고 어려운 가정 형편과 운동 여건 속에서도 남다른 노력으로 무학여중 때부터 주목 받는 선수가 됐다. 여고에 진학할 때는 농구 명문이었던 몇몇 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무학여고로 진학해 청소년 대표로 활약했다.

1973년 실업팀에 갈 때도 스카우트 대상 1호였다. 당시 여자실업농구의 활성화를 위해 신생팀에게 유리한 조건을 준다는 원칙에 따라 자의반 타의반 창단 준비를 하고 있던 '시온합섬'에 가야 했다. 그러나 '시온합섬'은 오래지 않아 팀을 해체했고, 이 팀의 선수들을 모두 외환은행이 영입하면서 본격적으로 국가대표로서 명성을 떨쳤다.

1979년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선 조영란, 송금순, 정미라, 홍혜란, 홍영순, 박찬숙 등과 함께 세계 최강 미국을 격파하는 등 선전을 거듭한 끝에 준우승을 일궈내면서 '베스트 5'에 뽑혔다.

또 1980년 9월 홍콩에서 열린 제8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선 중공을 101-68, 무려 33점차로 대파하는 등 5전전승으로 2연패를 달성해 최고의 해를 보냈다.

여자 농구의 승전보가 전해질 때마다 주장 강현숙은 뉴스의 중심이었다.

- 여자 농구의 한 시대를 이끈 주인공이었고,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와 지난 9월 아시아선수권대 회 때는 국가대표 선수단 단장을 맡았습니다. 후배들에게 하고픈 이야기가 있다면.

"여자 후배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늘 교차합니다. 젊은 선수들이 국제 무대라는 큰 물에서 놀다 보면 분명히 크게 성장할 수 있는데 제가 뛸 때와는 다르게 일방적으로 국가대표로서의 자긍심만 강조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잖아요. 프로 선수들이다 보니 몸이 재산이고, 국가대표로 올인하다가 혹시 부상이라도 하면 프로로서 자기 몸값을 할 수 없고요. 모든 농구인들이 현실과 국위 선양이란 부분을 조화롭게 풀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지요. 아무튼 운동할 수 있는 여건은 너무 좋아졌으니 즐겁게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후배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강 위원장은 1980년 은퇴 이후 잠시 외환은행에서 코치로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 그러나 아이가 생긴 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내와 엄마로서의 역할'이라고 판단, 한동안 농구계에서 멀어져 있었다.

강현숙 위원장은 '영원한 농구인'이다. 심판위원장을 맡은 것도 농구 발전을 위해 작은 힘을 보태겠다는 사명감이 강하게 작용했고, 여자 농구인들도 농구 발전을 위해 한 몫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책임감도 강하다.

그래서 몸은 바쁘지만 기꺼이 오늘도 전국의 체육관을 바삐 찾아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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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창호기자 chang@sp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