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석영은 5년 동안 징역을 살면서 19번이나 단식 투쟁을 했다. 그랬더니 속은 좋아졌는데 칼슘이 몽땅 빠져나갔나 보다. 석방돼서 보니 이가 엉망이었다. 그 좋던 '이빨'이 무뎌졌다. 요즘처럼 날렵하고 빠른 디지털 시대에는 자기 같은 '아날로그'는 더 이상 '이야기꾼'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도 '구라'다.
소설 '장길산'을 10년 동안 연재할 때 한국일보 기자들이 붙여준 '구라'라는 별명이 문단으로 번져 오래 전부터 '황구라'로 통한다.
조선엔 3대 '구라'가 있다. 백구라, 방구라, 황구라.
'방배추'란 별명으로 통하던 '협객' 가 20대 초반 어느 날 '지식 청년'과 함께 했다. 이 물었다. "자네 주먹 좀 쓴다는데 몇 명이나 상대할 수 있나?" "뭐, 그저 한 삼십명 정도…"
주먹 꽤나 쓴다던 는 그 날 이후 을 깍듯하게 '형님'으로 모신다.
1970년대 유신 독재로 답답하던 시절, 문인들은 청진동에 자주 모였다. 어느 날 청진동 이모집에서 '원맨쇼' 대결이 벌어졌다. 문단의 알아주는'구라' 황석영과 재야의 걸쭉한 '구라'가 한번 붙어야 한다고 김정남(김영삼 정부 청와대 교문수석) 등이 부추겼다. 문인을 비롯해 민주화 운동을 하던 또래들이 30~40명 모였다. '구라 대결'은 다수결의 판정에 의해 황석영이 졌다.
조선의 3대 구라 중 최고는 역시 민족 대서사적 '구라'인 '백구라'. 구라의 서열이 매겨졌다.
1995년 9월 첫 광주비엔날레가 열렸다. 광주 출신으로 한국일보를 거쳐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태홍이 문화계 인사를 초대해 술자리를 만들었다. 평론가 염무웅이 함께 자리한 '방배추'를 자극하려고 "이제 구라들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백구라'는 민중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뒤 목에 힘이 너무 들어가 더 이상 구라를 풀 수 없고, '황구라'는 교도소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으니 '구라'를 풀고 싶어도 풀 수 없게 됐으니 '구라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마디 또 했다. "지금 중원에서 신흥 '구라'들이 물 밀듯이 나오고 있는데 '라지오'가 좋다"고 덧붙였다.
방구라 왈 "앞장 선 놈이 누구냐?"
광주 비엔날레에 큐레이터로 참여하고 있는 유홍준을 가리키며 염무웅 왈 "저기 와 있네."
방구라 왈 "쟤가 무슨 라지오냐. 인생이 없으니까… 쟤는 '교육방송'이야."
모두가 배를 잡고 넘어갔다. 조선의 3대 교육방송은 그렇게 정해졌다. 1대 이어령, 2대 김용옥, 3대 유홍준.
소설가 황석영의 옥바라지를 하던 화가 홍성담이 면회를 와 들려준 이야기에 '황구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창호기자 chang@sp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