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5세대 '떠오르는 별' 누구인가 교제폭 넓은 일본통, 아베 총리 집권 후 중·일 관계 훈풍 불러

중·일 간의 봄바람은 한국에는 꽃샘바람인가.

지난14일 필리핀 세부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중국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와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사이의 회담이 연장되는 바람에 10여 분 동안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이와 관련, 15일자 일본 산케이(産經) 신문은 아베 총리가 노 대통령에게 ‘고립감’을 안겨주기 위해 일부러 중·일 정상회담을 지연시켰으며 그 때문에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이 격분했다고 전했다. 노 대통령의 이례적 만찬 불참의 진정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런 씁쓸한 에피소드는 아베 총리 집권 후 중국과 일본 간의 밀월 무드가 어느 정도에까지 진척되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전임자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를 ‘왕따’시켰던 원자바오를 ‘왕따 작전(?)’의 협력자로 만들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중·일 간 훈풍을 가장 반겨할 중국 사람은 바로 왕이(王毅) 주일 중국대사일 것이다. 그가 주일대사에 부임한 2004년 9월은 양국 사이에는 시베리아 바람이 쌩쌩 불었다.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반발, 중국이 모든 정상외교를 단절하는 강수를 두었지만 고이즈미는 요지부동이었다.

왕이는 주일대사 부임 전 최연소 외교 부부장에다가 리자오싱(李肇星) 외교부장, 다이빙궈(戴秉國) 외교부 상무부부장에 이어 외교부 내 서열 3위였다. 또 6자회담의 의장을 맡아 국제무대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다. 차기 외교부장 1순위로 거론되던 그에게 주일대사직은 신세 망칠 자리처럼 보였다. 한때 그가 캐나다 대사로 나갈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는데 이는 그를 차기 외교부장으로 염두에 둔 고위층이 그의 경력관리를 위한 배려라는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왕이는 캐나다 대사가‘ 아닌 주일대사로 나갔다. 위기는 기회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왕이는 ’니마이메(二枚目 : 일본 전통극 가부키의 미남역)‘로 출연해도 좋을 정도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일본인에게 호감을 주는 수려한 용모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주일대사로서 일본 TV에 등장할 때는 항상 굳은 얼굴이었다. 부임 3개월 뒤인 2004년 12월 리덩후이(李登輝) 대만 전 총통의 입국 비자를 취소하라고 공개 항의했으며 다음해 4월엔 교과서문제로 중국 전역이 반일시위에 휩싸였을 때는 외무성에 불려가 일본 정부의 경고성 우려를 전달받았다. 2005년 10월 17일 고이즈미가 5번째로 야스쿠니를 참배하자 “중·일 관계를 파괴한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초강경 성명을 발표하고 국내로 소환되기도 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왕이는 양국관계의 장기적 발전을 위한 일본의 자세 전환을 촉구하는 발언을 계속했다. 그는 중국과 일본이 역사문제, 대만문제, 그리고 전략적 선택이라는 3대 도전을 슬기롭게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일본이 지적재산권 문제로 주저하는 무역자유화협정(FTA) 체결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기도 했다. 서로가 필요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역설한 왕이의 그간 노력이 정치성향에 있어 고이즈미와 다를 바 없는 아베가 야스쿠니 참배를 중단키로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세부에서 열린 중·일 정상회담에서 원자바오는 올해 4월 일본을 방문할 것임을 재확인했다. 6월에는 후진타오 주석의 방일도 성사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 9월이면 왕이가 주일대사에 부임한 지 3주년이 된다.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귀국하게 된다. 만일 그가 리자오싱 후임으로 2008년 외교부장에 오른다면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전형적 사례가 될 것이다. 미국통인 리자오싱이 국무위원으로 승진하면 일본통인 그가 주미대사를 역임한 양제츠(楊潔篪) 부부장을 제치고 외교부장이 될 공산이 크다.

베이징 출신의 왕이는 1953년생으로 올해 54세이다. 문화대혁명 당시 헤이룽장(黑龍江)성에 하방되어 6년 동안 있었는데 “겨울에는 알루미늄 도시락에 싸구려 고량주를 담아 가 마시며 영하 30~40도의 추위를 견뎠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베이징 제2외국어학원 일어과를 나와 29세에 외교부에 들어갔다. 학력도 변변치 않고 늦은 나이에 외교부에 들어 왔지만 뛰어난 능력으로 40대에 양제츠, 선궈팡(沈國放)과 함께 중국 외교를 이끌고 나갈 재목으로 간주되었다. 82년 외교부 근무 이래 일본 문제에서 손을 뗀 적이 없었으며 89년부터 94년까지 5년간 일본대사관에서 참사관과 공사를 역임했다. 일본 대사관 시절 언론인과의 유대를 돈독히 해 “왕이와 나는 친구”라고 스스럼 없이 말하는 일본 언론인이 여럿 있을 정도다. 또한 테니스를 통해 미국과 러시아의 외교관들과도 친교를 넓혔다.

왕이는 아주사(亞洲司) 부사장으로 있던 94년 11월 28일 한국 베이징 특파원단과 간담회를 가진 바 있다, 미·북한 간의 제네바 합의가 이루어진 직후 이루어진 이 간담회에서 왕이는 거침없고 솔직 담백한 자세로 답변, 강한 인상을 주었다. 2001년에 리펑(李鵬)과 장쩌민을 각각 수행하여 남북한을 방문한 것을 비롯,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리펑이 방한 중 영화 ‘친구’를 관람하고 출연진을 만나는 등 외교적 이벤트를 벌여 화제를 뿌렸는데 이는 왕이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이재준 객원기자 중국문제 전문가 webmaster@chinawat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