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부터 탈당준비, 황석영·김지하 등이 결정적 역할… 제3지대 인물에 정가 촉각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한나라당을 탈당한 뒤 외부인사로는 처음으로 김지하 시인을 만났다. 신상순 기자
“시베리아를 넘어, 툰드라를 넘어 가겠다.”지난 3월 19일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외부인사로는 처음으로 김지하 시인을 만나면서 꺼낸 말이다. 순탄치 않은 앞날을 결연히 헤쳐나가겠다는 의지다.

손 전 지사의 탈당으로 대선 지형은 다시 그려질 전망이다. ‘빅3’의 흥행에 바탕한 한나라당의 대세론은 일단 주춤하게 됐다. 일각에서는 12월 대선이 박빙 승부가 될 것이라는 섣부른 전망도 나온다.

손 전 지사는 그의 말대로 새로운 정치세력의 구심점이 돼 대선의 주역이 될지, 아니면 ‘치어리더’로 조연에 머물지는 두고봐야겠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정치권의 주목을 받고 있다. 손 전 지사가 탈당 후 첫 회동의 대상이 김지하 시인인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탈당의 배경과 향후 행보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손 전 지사는 김 시인과의 만남에서 “다른 사람이 살 집을 짓는 목수의 심정”이라며 ‘목수론’을 펴 그가 지을 집(새로운 정치 창출)에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두 사람은 ‘집’의 성격에 대해 ‘중도’를 얘기했다. 중도라는 담론은 손 전 지사가 지난해 6월 30일 도지사 이임식을 끝낸 뒤 배낭을 메고 민심대장정을 떠난 지 85일째 되던 날인 9월 22일 경북 경주시 현곡면의 논두렁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나눈 대화의 연장선에 있다.

그때 김 시인이 “민심대장정이 중도냐”고 묻자 손 전 지사는 “이도저도 아닌 중도로는 사회ㆍ국가 전반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다양한 이해관계를 아우르는 ‘통합’이다”고 답했다.

다양한 계층 아우를 '통합'목표

이들의 대화는 시간을 달리해 손 전 지사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어졌다. 지난 1월 1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찻집. 최열 환경재단 대표와 소설가 황석영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손 전 지사 얘기가 나왔다. 이들에 따르면 손 전 지사가 “한나라당 사람들 중 상당수가 위장취업한 것으로 보이고 열린우리당은 변절했다.

노선대로 정계가 개편되어야 정치가 발전된다”는 얘기를 했다는 것.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정치권 발전의 역할을 하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를 하고 싶다”는 뜻도 피력했다고 한다.

최열ㆍ황석영의 대화를 분석하면 손 전 지사는 올해 초부터 탈당을 준비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행동은 황석영이 먼저 나섰다.

황석영은 1월 22일 “현재의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깨지고, 국민들로부터 폭넓은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합리적 보수에 기반한 정치세력이 만들어질 것”이라며 “새 정치질서 만들기의 총대를 멜 생각이 있다”고 ‘총대론’을 폈다. 그리고 “이르면 봄, 늦어도 여름 전에는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마치 손 전 지사의 탈당과 여야의 분열을 염두에 둔 듯한 발언이었다.

황석영은 손 전 지사와 1970년대 노동운동을 같이 한 이래 30년 넘게 친분을 이어왔다. 손 전 지사가 탈당 기자회견을 하기 전 날에도 황석영과 만나 탈당에 관해 얘기를 나눈 것으로 전해졌다.

손 전 지사 측근들은 “손 전 지사가 제3 지대로 나가 새로운 길을 선택했을 때 도울 사람들이 더 많다”고 조언했고 이 과정에서 황석영이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손 전 지사는 탈당을 전후해 김지하 시인을 비롯해 여러 지인을 만났으며 결행에 앞서 마음을 추스린 서울 강남의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과 낙산사 주지 정념 스님도 적지않은 영향을 준 것으로 전해진다.

명진 스님은 불교내 ‘운동권’ 스님으로 불릴 정도로 개혁적인 인물로 손 전 지사가 여익구 민불련 회장과 함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다. 손 전 지사의 출판기념회나 큰 행사 때 참석해 격려를 해주곤 했다. 정렴 스님 역시 개혁적인 인물로 손 전 지사와 알고 자내온 사이라고 한다.

결국 손 전 지사가 ‘탈당’을 결행하는 데는 김지하와 황석영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에는 ‘영(靈)능력자’로 알려진 차길진(59) 후암문화공간 대표법사가 손 전 지사의 탈당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돈다.

차 법사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팔금산(八金山=釜山)에서 나와 2002년 5ㆍ6월에 뜬 사람이 (대통령이)될 것”이라고 해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예언한 일화로 유명하다. 그밖에 서해교전 발발, 월드컵 4강 진출, 지난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피습을 예언해 적중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으로 날아오를 수 있을까

손 전 지사와는 차 법사와 평소 친분이 있던 조선일보 부국장 출신의 조용택 언론특보의 소개로 알게 된 뒤 몇 차례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수원 언론특보는 “누구의 소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차 법사와 가깝고 만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차 법사는 대선을 앞두고 지난해 9월 그가 밝힌 게송(偈頌) 때문에 주목을 받아왔다.

홀연히 상서로운 빛이 무궁화 동산에 비추고(忽見祥暾暎槿域)

밝은 달에 학이 날아올라 부를 날을 맞이하네(明月鶴飛應召日)

게송 속에 박근혜의 槿, 이명박의 明, 손학규의 鶴 세 글자가 모두 들어있어 세 후보 진영에선 아전인수격으로 이 게송이 자신들의 당선을 예측한 것이라며 논쟁을 벌여왔다.

박 전 대표 측은 ‘무궁화 동산’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학’이 박 전 대표를 가리키는 것이라며 차기 대선에서 박 전 대표가 당선된다는 것이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 측은 ‘明’자에 주목, ‘이 전 시장이 밝아진다는 뜻으로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손 전 지사 측은 “‘무궁화 동산(槿)과 밝은 달(明)은 학(鶴)이 날아오르는 배경일 뿐이다. 그러므로 손 전 지사가 박근혜ㆍ이명박을 꺽고 대선에 승리한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한편 손 전 지사는 대선과 관련 차 법사로부터 앞으로의 행로에 대해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 사이에 끼어 뜻을 제대로 펼 수 없는 처지’라는 얘기를 들었다는 후문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손 전 지사의 탈당에 차 법사의 예언(?)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얘기가 들린다.

차 법사는 최근 2007년 대권의 주인공은 ‘물처럼 부드러운 사람’이라며 이번 대권은 자기가 나서지 않고 남을 밀어주는 사람이 잡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인물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손 전 지사는 향후 행보와 관련, “새로운 창당을 비롯해 모든 정치세력이 미래를 향해, 선진화를 향해 창조적 능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바탕을 마련토록 하겠다"고 신당 창당 의사를 밝혔다.

과연 손 전 지사가 시베리아 툰드라를 넘어 빛나는 학(鶴)으로 날아오를 수 있을 지 다음 행보가 주목된다.

3월 23일 구로 디지털단지 벤처기업협회를 방문한 손 전지사가 기업대표들과 간담회를 갖고 있다. 신상순기자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