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러시아당 총선 압승으로 장기집권 탄탄대로대통령 3선 연임 금지하는 헌법 때문에 편법 사용할 듯몇 가지 시나리오 중 실세 총리·당수로 권력유지 유력

‘푸틴 대통령을 위한 선거였다.’

2일 치러진 러시아 총선은 임기 4년의 국가두마(하원) 의원을 뽑는 선거였지만, 실상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대한 신임투표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푸틴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로 보아 그가 이끄는 집권 ‘통합러시아당’이 압승을 거두리란 것은 이미 예상됐던 일이다.

다만 집권당이 개헌선인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확보할 수 있느냐, 그래서 푸틴 대통령이 대통령 퇴임 이후에도 ‘의회 권력’을 앞세워 정권을 얼마나 공고히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가 유일한 관전 포인트였다. 예상대로 통합러시아당은 64%가 넘는 득표율로 압승을 거뒀다.

450석 하원 의석 전부를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뽑도록 한 개정 선거법에 따라 통합러시아당은 개헌 의석인 300석을 훌쩍 넘어 320석 가까이 확보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다 통합러시아당 외에 의회 진출에 성공한 공산당, 자유민주당, 러시아정의당 중 자유민주당과 러시아정의당이 ‘친 크렘린’ 정당이어서 이들이 얻은 의석까지 합할 경우 집권 연합이 얻은 득표율은 무려 80%를 넘는다. 푸틴 대통령이 통합러시아당의 비례대표 1번으로 등록했기에 가능했던 결과였음은 물론이다.

공산당이 의회에 진출한 유일한 야당으로 살아 남았지만, 11%대에 그친 득표율로 집권당을 견제할 뭔가를 한다는 것은 애당초 기대 난망이다.

그러면 푸틴 대통령은 뻔한 승부였음에도 왜 비례대표로 등록하면서까지 집권당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려고 했을까.

의회를 장악하는 것이 푸틴 대통령의 앞으로의 행보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단서는 헌법이 규정한 3선 연임 금지에 있다. 지금까지 2차례 연임한 푸틴 대통령은 이 규정에 묶여 내년 3월 2일 치러지는 대선에 출마할 ‘법적 자격’이 없다. 새 대통령이 취임할 5월이면 권력을 내놓아야 한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신임은 70%가 넘는 지지율이 보여주듯 여전히 절대적이다. 구 소련 붕괴 이후 최고의 호황을 구가하고 있는 경제, ‘강한 러시아의 부활’이라는 모토를 앞세워 미국에 맞서는 국가자존심의 회복에 국민이 열광한 것이다.

총선투표장 앞의 푸틴대통령과 그의 부인 루드밀라.

여야를 통틀어 푸틴 대통령에 대적하거나 그의 뒤를 이을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을 찾기도 어렵다. 어떻게 해서든 푸틴 대통령이 계속 권좌에 남기를 바라는 것이 러시아 국민 대다수의 바람이다.

이번 총선은 이런 여론에 부응해 푸틴 대통령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을 해도 좋다는 ‘백지수표’를 받을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선거였다고 할 수 있다. 집권당의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 헌법의 규정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절대권력을 위한 지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헌법 개헌선을 무난히 확보함으로써 일단 백지수표를 받는데 성공했다.

이제 문제는 백지수표에 무엇을 써 넣느냐 하는 것이다. 지금 크렘린궁 주변에는 푸틴 대통령의 권력유지를 위한 온갖 설이 난무하고 있다. 헌법의 틀을 깨지 않으면서 권력을 연장할 수 있는 여러 편법에서부터 아예 개헌을 해서 연임 금지 규정을 없애자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4, 5가지 방안이 시나리오로 꼽힌다.

첫번째는 푸틴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내년 대선에 재출마하는 방법이다.

통합러시아당 비례대표 후보 1순위인 푸틴은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하원의원의 정부직책 겸임 금지’에 따라 의원직을 수행하려면 대통령직을 포기해야 한다. 이에 따라 대선까지 3개월 남짓 빅토르 주브코프 현 총리가 대통령직을 대행토록 하면 푸틴은 3선 연임 금지 규정에 묶이지 않고 대선에 출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집권당이 개헌선을 확보한 만큼 헌법을 개정해 3선 연임금지 규정을 없애는 것이다. 세번째는 차기 대통령이 취임 직후 조기에 자진 사퇴한 뒤 푸틴이 권좌에 복귀하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이 세가지는 푸틴 대통령이 기존에 한 공약이나 현실성에 비추어 볼 때 가능성이 낮다. 푸틴 대통령은 권력유지를 여러 차례 시사하면서도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 “3선 연임을 하지 않겠다” 등 무리하게 헌법을 왜곡할 뜻이 없음을 일관되게 밝혀 왔다.

이는 시비거리를 만들면서까지 대통령직을 고집하지 않더라도 다른 방법을 통해 권력을 지킬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내년 3월 대선 이후로 전혀 새로운 형태의 정부가 태동할 것”이라는 발언은 같은 맥락이다.

푸틴의 지지자들이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총선 압승을 축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헌법 개정도 대선 전까지 이를 마무리해 푸틴이 입후보하기에는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 23일까지인 대통령 후보등록 마감일도 불과 10여일 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유력하게 거론되는 것이 차기 정부에서 총리로 취임하거나, 통합러시아당의 당수로 나서서 권력을 장악하는 방식이다.

‘실세 총리’는 푸틴 대통령이 지난 10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헌법을 훼손하지 않는 그럴듯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당수직은 과거 소비에트 통치방식을 모델로 한 것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경험한 러시아 국민에게 익숙한 방식이다. 이 경우 권력이 대통령에서 총리나 당수에게 급속히 이양되는 수순을 예상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국부(國父)’라는 지위를 신설해 푸틴에게 대통령에 버금가거나 대통령보다 더 큰 권한을 부여하자는 목소리도 있으나 지나치게 초법적이고 전제적인 주장이어서 실현성은 희박하다. 또 차기 4년은 ‘허수아비’ 대통령에게 맡겨 수렴청정한 뒤 2012년 차차기 대선을 노린다는 관측도 있으나 이는 권력의 속성상 푸틴이 4년 후를 기약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에서 푸틴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 대통령 후계 경쟁도 후끈

대통령직은 일단 넘겨준다는 시나리오가 유력해지면서 푸틴의 후계자 경쟁도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통합러시아당은 17일 열리는 당 대회에서 대선 후보를 지명할 예정인데, 세르게이 이바노프(54)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등 두명의 제1부총리(41)와,주브코프(66) 총리 등 측근 3인방이 현재로선 가장 유력하게 거론된다.

이바노프는 1970년대부터 푸틴과 같은 국가보안위원회(KGB)에서 근무하면서 친분을 쌓은 이력이, 메드베데프는 세계 최대 국영가스회사인 가즈프롬의 회장이자 푸틴과 같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이라는게 무기이다.

그동안 별로 주목받지 못하다 지난 9월 총리로 임명되면서 차기 후계자로 급부상한 주브코프 총리는 전형적인 경제관료지만 별다른 정치적 영향력이 없다는 것이 고분고분한 후계자를 찾는 푸틴에게 오히려 맞는 인물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나이가 가장 많아 대통령이 된 뒤 조기 중도사퇴해 푸틴이 대통령에 복귀하는 시나리오에는 가장 알맞은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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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석 한국일보 국제부 차장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