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보전의 천재' 한국전쟁 전후 역사적 사건 개입… 한국 이해하고 도와

국군의 사격 훈련을 참관하고 지도하는 도널스 니콜스(오른쪽)
'1950년 6월 25일 전쟁발발' 극비 보고서 존재 봉인된 비밀 풀린다
6·25 둘러싼 첩보전 북한 대남첩보국'니콜스 파일'엔 어떤 내용이
북파공작원의 아버지 한국 정보기관 창설 주역
그레고리 장군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로렌스'로 니콜스 보고서 남겨

그레고리 장군은 도널드 니콜스를 가장 가까이서 보아온 인물 중 한명이었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로렌스라는 제목으로 니콜스에 대한 보고서를 남겼다. 이 보고서를 끝으로 니콜스에 대한 연재를 마무리한다.

1차대전 당시 전쟁용어였던 아라비아의 로렌스라고 알려진 인물에 대한 논문, 책, 영화, TV방송 등이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 '한국전쟁'이라고 알려진 큰 사건에서 많은 인물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훈장도 받고 대중적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니콜스다. 그는 존 웨인과 같은 인물이 가진 용감함, 대담무쌍함, 복잡함 등을 가지고 있다.

그와 함께 일을 한 동료들이나 부하들은 종종 그를 한국의 로렌스라고 부른다. 이 별명보다 더 잘 어울리는 별명을 찾기는 힘들다. 역사가들이 재평가하듯이 아리비아라는 먼 이국땅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 장소에 로렌스가 있었다는 사실이 영국으로는 매우 다행스런 일이었다.

로렌스처럼 니콜스의 업적도 거의 전설에 가깝다. 반세기 전에 로렌스가 겪었던 사건과의 유사성이 한가지 더 있다. 니콜스는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업적으로 돈과 바꾸기를 원치 않았다. 즉,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공표하지 않았다.

선전포고없이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침공했을 당시 니콜스가 남한에 있었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그도 역시 적절한 시대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던 적절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군사적 정치적 전략을 수행하고 미정부가 원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고도의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을 이해한 니콜스

한국전쟁이 예기치 않게 각종 논란과 국제적 분노를 동반해 발생하자 대부분의 미국사람들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때 미국 대사와 미군사고문을 제외하고는 극소수의 전문가들만이 남한에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그 전문가 중 한명이 니콜스였다.

그는 한국의 관습, 전통, 언어를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철학과 관점도 이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많은 서양사람들이 포착하지 못한 점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즉, 약 4000년동안 한국은 숱한 외세의 침공 속에서 억압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한인들이 가지고 있는 침공자에 대한 제거 욕구는 그들 가슴에 강렬하게 불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요약하자면 니콜스는 많은 한국사람들에 의해 같은 동포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의 친구들은 길거리의 고아나 거지에서부터 시골마을의 촌장 그리고 정부와 군대의 고위관료들까지 광범위했다. 그는 서양인으로서는 아주 드문 대우를 한국민으로부터 받았다.

그는 한국에서 아주 짧은 시간에 정보 조직을 구축했는데, 한반도의 여러 도시와 무인도에 정보망을 구축하기도 했다. 이 정보망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를 비롯해 아주 극소수였다.

니콜스가 만들고 효율적인 정보직으로 훈련시킨 이 조그마한 왕국은 원래 제 6004정보부로 의도되었던 것이다. 만은 정보 장치 중에서 개조된 탱크와 레이다를 장착한 개조된 함선도 포함돼 있었는데, 이것들은 모두다 니콜스 자신이 직접 설계한 것이었다.

니콜스는 아주 신중하게 특수 정보요원들과 기술자들을 선발하고 훈련시켰다. 정보수집가, 번역가, 외국 자료 전문가, 보고서 작성요원, 탈출 전문가, 자동차 기술자, 해양 기술자 등 아주 다양했으며, 이들은 특수 임무에 필수적인 사람들이었다.

결과적으로 타당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 일본 심지어 워싱턴 당국에서까지 즉각적인 정보활동을 요청했다. 이 정보들은 니콜스의 부대원들에 의해서 제공되었고 전쟁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정보가 제공되었다.

한국에서 요구되어지는 특수정보를 제공해줄만한 능력을 가진 부대는 아시아에서 니콜스의 부하들 밖에 없었다. 그는 공군 기술 정보팀에게 확고한 원칙과 엄격한 훈련계획을 강조했다. 일단 아군에게 유리한 적의 장비가 발견되면 정보팀이 짚차, 보트, 낙하산 등으로 빠른 속도로 그 지점으로 이동해 가야함을 강조했다.

이런 종류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매우 촉박하다. 즉, 적군이 비행기, 레이다 등의 장비를 아군이 가져갈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는다. 그것은 종종 어떤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두 개의 반대 세력사의 경주와 같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에게 요구되는 훈련규율, 인내력 등이 특수 임무에도 요구된다. 공군기술정보팀의 전문가들이 빙판 위의 빗길을 헤쳐나간다든가 무성한 숲 속을 헤쳐나가 미사일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을 이동하는데, 위의 자질들이 요구되어진다. 천둥번개가 머리위에서 내려치는 동안에 그들은 늪 속에서 대기하거나 전진해야 한다.

이를 악물고서 대부분의 일을 했으며, 대략 미사일과 같은 굵기의 나일론 줄로 미사일을 묶어서 밖으로 끄집어내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계속해 마침내 동이 트기 전에 성공하는 일도 있었다.

남보다 앞서는 이유

니콜스에게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가 보고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을 정보원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차에 실려 끌려오는 미사일을 정보부 본부로까지 몰고 온 것은 완전히 지치고 먼지투성이의 팀이었다.

몇 분 후에 그들은 정보부의 지휘관인 니콜스 앞에 조심스럽게 서서 경례를 올렸고 임무를 완수하는데 사용된 전동적인 군대 방식을 사실대로 설명했다. 니콜스는 임무에 대한 공식적인 보고 파일만을 계속 대충 훑어보면서 부하들의 경례에 대한 답을 하고는 "왜 이렇게 오래걸렸나?"라고 무심하게 한마디 던지곤 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입술은 미소를 띠고 있고 그의 눈은 자랑스러워하는 빛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니콜스는 책사 맡에 앉아서 일을 하는 사무원이 아니라 거의 야전에서 더 열심히 뛰는 실무위주의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부하들에게 기대하는 훈련이나 육체적 건강과 단련의 기준을 직접 자신도 실천했고 책임감을 느꼈다. 다양하고 복잡한 책임감을 가지고 그는 그의 일상적인 업무를 하루 평균 17시간씩 일했다.

낙하산에 대한 전문가이며 2차세계대전 당시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낙하산 학교의 졸업생인 그는 주기적으로 C-47기를 한강의 모래 언덕위로 비행시켜 능숙하게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훈련을 했다.

그는 또한 놀랍게도 민첩하게 산을 오르는 등산가였다. 종종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일지라도 자기보다 젊고 민첩한 부대원들 보다 먼저 산 정상에 도달하곤 했다.

공식적으로 1953년 7월 27일 밤 10시 정각에 이 우울한 한국전쟁은 끝이 났다. 실질적으로 휴전회담은 비합리적이며 정당성이 부족했다. 휴전협정은 단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시기적절했을 지는 모르지만 우리들에게는 결코 그러지 못했다.

판문점에서의 유엔대표와 공산주의자 대표간의 첫 1년 동안 협상은 자유세계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격분하게 했다. 또 이 휴전회담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련된 가증 유능한 미국 군인이나 외교관들은 대단한 인내를 해야만 했다.

원칙적인 문제에서 그리고 합리적인 기초를 바탕으로 한 의미있는 협상이행을 바라면서 미국대표단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환선적인 진술을 반박할 가능한 모든 지지나 데이터를 요구하고 있었다.

니콜스는 그의 방대한 지식을 모아서 공산주의자들의 허구와 왜곡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가치있는 정보나 데이터를 휴전협상팀에게 제공할 수 있었다.

엄격한 조련사이며 의식적이고 완벽주의자이면서 부적격함과 불충분함을 참지 못하는 니콜스는 종종 그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과도하게 엄격하고 냉담하게 형식적으로 대하기도 한다. 반면 몇몇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한국의 서울에서 그가 고아들을 위해 고아원 시설에 많은 지원을 하는 것을 알고 있다.

한국의 성장과 가려진 것들

영등포의 산골에 위치한 그의 본부는 한국내의 활동과 전문적인 작전을 수행하기 때문에 매우 엄격하게 통제된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때마다 니콜스는 조그마한 꼬마나 어린 고아들을 엠뷸런스에 태워서 부대 내로 초청한다. 병영과 막사를 꽃으로 예쁘게 장식하고 크리스마스 트리와 선물구러미를 준비하며 니콜스와 그의 부하들은 산타클로스로 위장해 고아들을 성대하게 맞이했다.

니콜스의 면면을 결론짓기 전에 50년대 한국과 다소 비슷한 베트남에서 우리의 현실문제에 관한 몇 가지 사항을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니콜스는 두 나라와 관계가 있다. 만약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공통된 시간과 발전, 그리고 사건들 사이에 평행선을 그을 수 있다면, 또한 이들 나라를 공산주의자들의 지배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 의문을 품었던 1950년 대의 중상자나 의심많은 사람들에 의해 비교가 된다면, 베트남의 이익을 위한 우리 노력의 결과와 효력을 확신하기엔 10년이나 2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남한은 세계에서 가장 공산주의와 적대관계이고 서방과 가장 견고한 동맹국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50년대 초반에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에 의해 예견된 것과 같이 전쟁이 끝난 후 짧은 시간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이 나라는 세계 GNP성장률이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이다. 지적인 자유와 정치적 안정, 교육의 발전, 경제발전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우리는 한국 서울의 생활수준의 향상을 주시하고 수 많은 현대식 빌딩을 주목하고 공장들, 전국에 세워지는 산업센터들을 주목해야 한다. 이 나라의 경우를 생각했을 때 우리는 종종 자기나라 이익만 고집할 게 아니라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외부적인 투자와 노력을 쏟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국은 약 200년 전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많은 외부협력이 이루어졌다. 미국에 와서 미국의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죽을 때까지 헌신해서 독립운동을 한 프랑스 귀족 출신의 라파예트는 미국 정부에 의해 시민권이 주어지고 20만달러와 하나의 구를 선물받았다.

폴란드 출신 플라스키와 코스쿠스코는 미국 군대내의 퇴폐하고 무례한 무리들을 사지진작시키고 훈련시켜 정예부대원으로 육성했으며 포그벨리 전투에서 어두운 밤동안 위싱턴 장군을 도와 부대를 재개편하고 최신식 전략과 전술을 경험없고 미숙한 부하 장교와 사병들에게 가르쳐 무적의 군대로 만들었다.

니콜스는 위와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다.



정리= 윤지환기자 musasi@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