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 이유로 탈북자 신분 박탈당해… 난민 인정 안돼, 불안정한 생활 지속북에서 나고 자라 중국생활 곤란… 중국 송환 피하려 탈북자 위장난민 인정·귀화 어려워 국제미아 신세, 생활고 심각

지난 3월10일 서울 중구 중국대사관 앞에서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중국정부의 유엔인권이사회 탈북난민 인정권고 무시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4년 6월 현재,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북한 출신 화교 무국적자는 총 13명이다. 이들은 입국과정 혹은 정착 후에 북한이탈주민이 아닌 화교라는 것이 밝혀져 탈북자 신분을 박탈 당한 이들이다. 대부분 북한에서 화교라는 이유로 차별받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워 탈북자 틈에 섞여 북한을 탈출했으나, 북에서 나고 자란 탓에 중국어가 익숙지 않아 중국에서 생활기반을 닦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이들이 중국공민증을 받기 위해선 중국에서 3년간 '무국적' 상태로 체류해야 하는데, 중국에 도와줄 친척이 있지 않으면 3년씩 무위도식하며 체류하기가 쉽지 않다. 또 중국에 체류하는 중에 공안에 붙잡혀 북한에 끌려가면 화교라고 해도 탈북자와 마찬가지로 취급당하기 때문에 중국으로 송환당하지 않기 위해 국내 입국시 '탈북자'라고 부득이 신분을 속이기도 한다.

간첩으로 몰린 재북화교

<주간한국>이 만난 이들 북한출신 화교들은 모두 불안정한 신분과 불투명한 앞날을 호소했다. 난민 지위도 얻을 수 없으며, 귀화신청도 쉽지 않다고 했다. 40대의 화교 무국적자 A씨는 조부가 13세 때 혈혈단신 북한으로 건너왔다고 했다. A씨의 조부는 국경지대의 한 도시에 자리 잡았다. A씨의 부모도 모두 화교로, 화교학교를 졸업했으나 한국어가 더 편하다고 했다.

A씨가 들려준 사연은 씨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는 "열심히 일만 하다 당했다. 하소연할 곳도 없고, 아파도 병원도 못 간다"면서 "나도 화교지만 북한에 가라고 해도 못 간다. 유씨는 남한, 북한, 영국을 오가고도 민변이 보호해 주는데, 대한민국은 법이 두 가지냐"고 되물었다.

지난해 9월 인천에서 문을 연 난민지원센터 조감도
그 역시 '간첩'으로 몰렸다 혐의를 벗었지만 북한이탈주민보호법과 여권법 위반 등으로 1년의 실형을 살았다. A씨는 2000년대 중반 북한을 탈출해 중국을 거쳐 국내에 입국했다. 합신센터 조사를 무사히 통과, 친구 이름으로 주민증도 받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3년 뒤 누군가가 신고를 했다. 수사관은 그에게 "가명으로 간첩질하러 들어왔냐"고 했다. 호기심에서 다녀온 미국여행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변호사 얼굴은 구경도 못했다. 교도소로 갈 때쯤 씨가 국정원에 의해 구금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1년을 복역하고 보호소로 이감, 중국대사관에 신변보호 요청을 했지만 그를 찾아온 것은 중국대사관 직원도, 인권활동가도 아니었다. 김용화(60) 탈북난민인권연합 회장이 신원보증을 해줘 보호소를 벗어날 수 있었다. 김 회장은 탈북자뿐 아니라 A씨 같은 화교 무국적자에게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김 회장은 "북한에 부모와 형제가 있는 이들이다. 우리와 매한가지"라며 "갈 데도 없고 최소한의 자격은 줘야 하지 않겠나? 하루라도 일을 안 하면 먹고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통일되는 날까지 보호해야 한다. 살게만 해달라"고 호소했다. 탈북난민인권연합 측은 이들 화교들의 신원보증을 책임지고 출입국관리사무소 체류 연장시 동행한다. 그밖에 옷 등의 기부물품을 전달하거나 취업을 알선하기도 한다.

중국대사관 문전박대…추징금 막막

정착하면서 받은 지원금으로 인해 A씨에겐 수천만원 대의 추징금이 부과됐지만 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교도소에서 나오자,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선 그에게 중국으로 가라고 권했다. 중국대사관에 갔지만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는 "중국에 연락이 되는 친척도 없다"며 "내가 아는 무국적자 한 사람도 중국에 갔다가 안 받아줘서 그냥 돌아왔다"고 했다.

또 다른 북한 출신 화교 B씨는 중국대사관엔 가본 일도 없다. B씨는 "중국에 호구가 있는 사람도 문전박대를 당하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취급도 안 해준다"고 했다. 그의 조부는 6.25 전쟁 당시 인민해방군으로 참전했다가 북한에 정착했다. B씨는 국정원 조사에서 화교임이 밝혀져 그 즉시 화성외국인보호소로 보내졌다. 5개월간 보호소에 있으면서 한 인권단체의 신원보증으로 '체류자격'을 얻고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지난 6월 18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탈북자 위장 화교 의 국민참여 재판 청구 즉각 기각 촉구 기자회견'에서 북한민주화위원회를 비롯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그는 "북에서 살기가 어려워서 한국에 왔다"며 "중국에 연락되는 친척이 없어서 중국에 체류하는 것은 고려 안했다. 처음부터 한국에 오고 싶었다"고 말했다. 난민신청과 귀화신청은 고려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하루하루 살기도 힘들다. 그거 신청하자고 여기저기 다니면 일을 못한다. 1년에 한 번씩 법무부에 체류연장을 하러 가는데, 이번에 가서 물어볼 생각이다. 절차를 잘 모른다"고 답했다.

A씨와 B씨는 모두 일만 하게 해주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했다. 체류상태가 늘 불안정하고 공적 기관에서 신분보증을 해주지 않아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태도를 일절 내비치지 않았다. 사실상 이들에겐 난민지위나 귀화 신청을 위한 법률서비스는 먼 나라 얘기다. 같은 화교이지만 얼마 전 한국사회를 뒤흔든 씨 사건 같은 사회적 관심도 전무하다.

이에 대해 통일부 관계자는 "화교라고 해도 북한에서 나고 자라서 중국어를 잘하는 사람들도 아니다"라면서도 "법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사적으론 안타깝지만 뭐라 말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난민 인정 전무…국제미아 전락

13명의 이들 국제미아 중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들을 두고 북한 전체주의의 피해자로 보는 시각보다는 단순히 경제적 이유에 의한 이주민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보다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선 주목하지 않는 듯 했다. 난민조약에선 정치적, 종교적 박해로 본국을 탈출한 망명자에게만 난민지위를 허락한다. 게다가 난민신청은 판정기간도 길고 그만큼 까다롭다. 귀화신청 역시 쉽지 않다. 귀화요건 중 '품행이 단정한 자'라는 요건이 다분히 자의적이기 때문이다. 현재 관행에선 음주운전만 해도 귀화를 제한한다.

유우성
A씨와 B씨 모두 북한영주권은 말소되고 중국 측에선 호적 확인이 되지 않는다. 북에서 나고 자란 중국인에게 중국 호적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김성인 난민인권센터 사무국장은 "한국에 체류한 지 5년이 지나면 귀화신청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면서 "작은 사고라도 생기면 귀화가 어려워진다. 무국적자들에겐 힘들게 살다가 알코올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부적응 사례가 많다"며 관심을 당부했다.

재북화교는 을 어떻게 바라볼까


신상미 기자

서울시공무원 간첩사건 재판이 대법원으로 옮겨져 다툴 예정이다. 지난 18일엔 (34)씨의 불법 대북송금 혐의와 관련해 서울중앙지법에서 첫 재판이 열리기도 했다. 그간 언론과 세간의 관심은 유씨의 입과 그의 소송대리를 맡은 민변에 쏠려 있었으나 정작 탈북자 혹은 유씨와 같은 처지인 북한 출신 화교의 발언엔 관심이 전무했다. 그렇다면 유씨처럼 북한에서 나고 자란 화교들은 유씨 사건을 어떻게 바라볼까.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도입하기 이전엔 북한에서 화교는 차별받는 존재였다. 그러나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부강해지면서 북한과 중국을 오가며 무역에 종사한 화교들이 큰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화교들은 1분기에 한 차례씩 중국에 갈 수 있지만, 국가안전보위부에 뇌물을 주고 자주 중국에 왕래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화교는 보위부와 통전부의 잠재적 정보원이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유씨와 같은 30대인 북한 출신 화교 A씨는 2006년 5월에 있었던 유씨의 북한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견을 밝혔다. 그 역시 유씨처럼 2년 단위로 영주권을 갱신하며 북에서 거주한 화교였다.

"만약 내가 다시 북에 들어가면 수용소에 간다. 유씨가 어떻게 갔다 왔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화교들한테 물어봐라. 북한에서 한국 갔다 온 걸 알면 가만 안 둔다. 연줄이 있는 것 같다"

A씨는 자신도 보위부의 엄격한 관리를 받으며 탈북자 동향을 수집해 줄 것을 보위부로부터 요구받았다고 밝혀 관심을 끌었다. 그는 "우리들은 중국엘 수시로 가기 때문에 북한정보가 중국으로 샐까봐 보위부가 많이 통제한다"며 "원래부터 화교는 보위부가 관리한다. 나도 보위부에게 시달림을 많이 당했다. 자기들 일을 해달라는 제안을 받은 적도 있다. 중국으로 넘어간 탈북자들이 한국에 갔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보상으로 여행증명서 발급 등의 편의를 봐 준다"고 언급했다.

50대의 함경도 출신 B씨 또한 보위부와 화교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보위부 외사과의 특별관리 대상인 것은 맞다"며 "함경도에서 나가려면 증명서도 잘 안 떼줬다. 친척, 친구 결혼식에도 못 갔다. 차별이 심해서 대학에도 못 갔다"고 증언했다.

중국공민증을 보유하고 탈북여성과 결혼해 한국에서 거주 중인 C씨도 유씨에 대한 생각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그는 인생의 절반을 북에서 살았고 그 후 중국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결혼했다. 특히 고향 동창 중엔 유씨를 아는 이도 있다고 밝혔다.

"왜 남한서 그를 감싸고 도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렇게 여러 번 드나든 것을 북한서 모를 리가 없다. 중국 국적을 갖고 있으면 북한에 자유롭게 갈 수 있다. 만약 국적이 없다면 중국측 변방외사과에 가서 뇌물을 주고 한 달짜리 임시 통행증을 받을 수 있다. 1년에 2번까지 받을 수 있다. 유씨의 경우 여권이 없었다면 불법으로 경비대에 뇌물을 주고 건너갔을 가능성이 있다. 회령서 살았고, 화교들은 원래 경비대를 다 알고 있으니까. 장례식에 참석하면 보위부가 모를 리가 없다. 다만 그가 보위부에 뇌물을 주고 무사히 빠져나왔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유씨는 항소심 최후진술서에서 "보위부에 뇌물을 줬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라고 진술한 바 있다. 또 유씨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것은 2007년 5월로, 모친의 장례식 당시인 2006년께엔 중국 국적이 없었고, 북한 영주권도 말소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불법대북송금사업에 대해서도 C씨는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모르겠다. 잘못된 것이다"라며 "단 1원만 보내도 조용히 보낼 수 없다"고 확신했다.

여러 해째 한국에서 무국적자로 살아온 한 북한 출신 화교는 "유씨 덕분에 우리 입지만 더 좁아졌다"며 "전엔 1년에 한 번씩 출입국관리소에 가서 체류연장을 했는데, 유씨 사건이 터진 후로는 더 자주 오라고 한다. 국적이 없어서 한국에서 막노동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자주 신고하러 가는 것이 쉽지 않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국내 체류 중인 13명의 무국적 북한 화교 중 9명이 오는 9월 연장을 앞두고 있다. 이들은 유씨 사건의 여파가 자신에게 미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유씨는 북한이탈주민보호법 위반으로 1심과 항소심에서 유죄를 받았다. 탈북자가 아니라는 것이 인정이 된 것이다. 법무부는 그의 향후 거취에 대해 "답변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라며 말을 아꼈다. 반면 통일부 관계자는 "씨는 중국국적도 받은 것으로 안다. 최종심에서도 북한이탈주민보호 및 지원법 위반으로 유죄가 확정되면 대한민국 국적은 박탈될 것으로 보인다. 그후엔 중국정부의 재량"이라고 봤다.

이와 관련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지난 4월 25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유씨가 '국제미아'가 될 것을 우려해 최종심에서 북한이탈주민보호 및 지원법 위반 건을 적극적으로 다투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기자회견을 두고 수많은 탈북자들이 분노했다. 북한이탈주민보호법에서 탈북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자의 국적이 명확히 명시되지 않은 것을 왜곡해 해석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에 대해 한 법조계 인사는 "탈북자 정의조항 자체에 '국적'에 대한 언급이 없고, 북한에 거주했던 외국인에게 이 법이 적용될 것인가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없다. 따라서 민변이 최종심에서 북에서 나고 자란 화교도 북한이탈주민이라는 것을 다툴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만약 최종심에서 유씨가 북한이탈주민이 맞다는 판결이 나온다면 나머지 13명의 화교에게도 탈북자 지위를 주는 것이 옳다는 '형평성' 논란이 제기될 것이다.

한편 기자가 만난 복수의 북한이탈주민들은 유씨가 북한이탈주민보호법을 위반해 유죄를 받은 상황에서 추방을 당해 북한으로 되돌아간다면 "영웅 칭호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유씨가 북한 불량정권이 그토록 바란 일, 남한사회와 탈북자공동체 사이를 악화시키고 혼란시킨 장본인이라는 점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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