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신문 없이 속전속결 재판 끝낸 檢, 양형사유에도 허점 발견

재판 이후 “반대신문도 안 할 것이라면, 왜 기소했나” 지적도

증인신문도 없이 2회 만에 이뤄진 檢 구형… 추가 신문사항은 없었나

같은 혐의로 입건유예 받은 적 있는 이화경 부회장, 정말 ‘초범’인가

검찰이 오리온 이화경 부회장에 대한 집행유예 구형을 두고 잡음이 나오고 있다. (사진=연합)
한민철 기자

회사 소유 미술품을 횡령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화경(61) 오리온 부회장에게 검찰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구형하면서 상당한 잡음이 일고 있다. 관련자 증인신문도 없이 2회차 공판에 검찰 측 결심이 이뤄졌고, 피고인 진술에 반대신문 한 마디도 없었던 검찰의 양형사유에도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난달 2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1단독(부장판사 황기선) 심리로 열린 이화경 부회장에 대한 업무상 횡령 등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이 부회장이 초범이라는 점 그리고 피해가 회복된 점을 참작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이 부회장은 지난 2015년경, 오리온이 쇼박스와 미술품 임차계약을 체결해 2013년 5월부터 자신의 회사 사무실에 전시·보관해 놨던 1억 7400만원 상당의 미술품인 장 뒤뷔페(Jean Dubuffet)의 ‘무제(Untitled)’를 남편 담철곤(62) 오리온 회장의 성북동 자택에 반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어 이화경 부회장은 지난 2008년 6월경 역시 회사 자산으로 구입해 오리온 양평연수원에 전시하고 있었던 2억 5000만원 상당의 미술품인 마리아 페르게이(Maria Pergy)의 ‘트리플 티어 플랫 서페이스 테이블(Triple tier Flat-surfaced Table)’을 지난 2014년 2월경 자택으로 임의로 반출했고, 대신 모조품을 입고해 횡령한 혐의도 받고 있다.

앞서 지난 8월 30일 열린 첫 공판에서 이 부회장 측은 검찰 측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또 증거로 채택된 부분에 대해서도 모두 동의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사실 이 부회장 측은 고발장에 명시된 대로의 관련 혐의를 ‘완전히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임의로 반출된 미술품들을 횡령할 목적은 전혀 없었고, 단지 해당 미술품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미술품 관리를 담당하던 쇼박스의 유 모 대표 등에 관련 업무지시를 해야 했지만 그것이 원활히 이뤄지지 못했다는 입장이었다.

또 트리플 티어 플랫 서페이스 테이블을 자택으로 운반하는 대신, 모조품을 입고한 경위에 대해서도 진품을 몰래 보유하거나 반출을 숨기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다고 밝혔다.

가품을 만들어주겠다는 지인의 조언이 먼저 있었고, 양평연수원에는 외부인들의 방문이 잦아 미술품이 오염되거나 상처가 나기 쉬워 원래부터 이곳에 둔 가구들은 가품이 많았다는 설명이었다.

정리해보자면 이 부회장 측은 모든 혐의에 대해 인정은 하지만, ‘실수로’ 그리고 ‘모르고 그랬을 뿐’ 전혀 횡령 등을 의도하지는 않았다는 전형적인 반쪽짜리 인정을 한 셈이었다.

상식적으로 회사 명의로 된 ‘공공 재산’을 사용료 지불이나 임대차 계약 체결 등의 절차도 없이 개인 집으로 가져 오는 일이 두 차례나 있었음에도, 이것을 실수라거나 모르고 했다는 해명을 쉽게 납득할 수 있는지 의문의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실 이번 공판에 대한 잡음이 나오는 근본적 원인은 바로 주요 피고발인이 이화경 부회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재판은 지난 3월 30일 시민단체들이 담철곤 회장이 무제와 트리플 티어 플랫 서페이스 테이블 등 수억원 상당의 미술품을 자택으로 임의 반출해 횡령했다며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하면서 시작됐다.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관련자들을 소환해 수사를 펼쳤고, 고발 약 3개월 보름이 지난 7월 중순경 피고발인인 담 회장에게는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오히려 이화경 부회장을 업무상 횡령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고 말았다.

조사 과정에서 담 회장의 혐의점은 찾을 수 없었지만, 이 부회장의 혐의를 인지했다는 게 당시 검찰의 발표였다.

담철곤 회장 입장에서 당시 검찰의 무혐의 처분은 안도의 한숨을 돌릴 일이었다. 담 회장은 지난 2011년 5월 해외 유명 미술품 10여 점을 오리온 법인 자산 수백억 원을 들여 구입해 자택에 보관해온 사실이 밝혀져 구속됐고, 지난해 4월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담철곤 오리온 회장. (사진=연합)
때문에 만약 당시 고발건으로 담 회장이 검찰에 입건돼 금고 이상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면, 형법 제63조 ‘집행유예의 실효’에 따라 담 회장의 집행유예가 취소될 상황에 놓였다. 담 회장에게는 다행히도 검찰은 그에게 무혐의라는 면죄부를 줬다.

변상 끝·오리온 측의 처벌 불원서 제출했다고, 증인신문도 필요 없었나

이화경 부회장의 이 사건 재판은 두 번째 공판 만에 결심공판을 맞게 됐다. 한두 푼도 아닌 수억원 규모의 횡령사건이 한 차례의 증인신문도 없이 마무리돼 가는 꼴이었다.

이 부회장 측은 결심공판 중 피고인 신문 과정에서 담철곤 회장이 미술품 반출 혐의로 고발을 당하자, 회장이자 남편인 담 회장이 어려움에 처했다는 사실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곧바로 문제가 된 미술품을 원래대로 반환했다고 밝혔다.

그는 미술품이 반출된 기간 동안 사용료 1350여만원의 피해 변상을 했고, 개인 소유의 미술품을 오리온을 위해 무상으로 대여하고 있다며 선처를 구했다.

또 미술품의 실소유주인 오리온 측에서 이번 일로 인한 이 부회장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처벌 불원서를 제출했다는 점 그리고 오리온 해외법인의 해외 거래처에서도 그에 대한 선처를 원하는 탄원을 했다는 부분 등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이 부회장의 이날 법정증언을 통해, 그가 아무리 수억원의 미술품을 횡령한 결과를 낳았더라도 문제가 된 부분을 변상했고 향후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 것임을 다짐하면서 검찰 측에서 양형에 이를 반영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이 부회장의 이런 주장만으로 재판을 끝내기에는 이른 점이 분명히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화경 부회장 측의 입장은 공소사실 모두와 자신의 잘못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횡령 혐의 모두가 ‘실수’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고, 그렇다면 이것이 정말 실수였는지 여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관련자들의 증언이 필요했다.

당연히 미술품 반출에 대해 담 회장 또는 이 부회장 측의 지시를 받은 것으로 고발장에 적시된 쇼박스의 유 모 대표에 대한 증인신문이 필요했다.

또 트리플 티어 플랫 서페이스 테이블의 모조품을 먼저 만들어주겠다고 한 지인 그리고 이 모조품을 양평연수원에 입고한 직원에 대해서도 증인신문이 이뤄져야 마땅했다.

특히 지난 5월 본지와 KBS 추적60분 등을 통해 담철곤 회장의 여러 의혹들을 폭로한 오리온 전직 임원들은 이번 재판 내용을 접한 뒤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본지에 전해왔다.

이들은 이 부회장 측의 미술품 횡령 혐의에 대한 내막을 잘 알고 있었고 해당 고발장에도 대부분의 이름이 명시돼 있었던 만큼 ‘정말 실수였는지’, 이 부회장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들어볼 필요성이 당연히 있었다.

무엇보다 이 부회장 측은 피고인 신문 과정에서 이들 전직임원 중 한 명이 주도해 이 부회장 본인과 담철곤 회장에 대한 허위사실 및 개인정보를 언론과 시민단체에 흘리며 형사고발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괴롭히고 있다며, 마치 이번 고발건 역시 전직임원들로 인해 일어났다는 취지로 언급했다.

그렇다면 검찰 측이 이 부회장의 주장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명확하게 알아보기 위해 증인으로 소환할 필요성이 있는 이들은 분명히 있었다. 그런 특별한 사유가 있다면, 재판부에 구형 연기를 신청해 심리를 조정할 수 있었다.

또 검찰 측에서 여러 참고인들을 소환해 조사를 벌였던 만큼, 이 부회장 측의 주장에 대한 반대신문도 당연히 필요했다.

오리온 측은 이번 사건에 대해 이화경 부회장의 선처를 바라는 처벌불원서를 제출했다. (사진=한민철 기자)
이번 사건에서 중요한 부분은 단순히 횡령을 한 사실 자체만이 아닌 횡령 의도의 유무였고, 고발인들은 의도가 있었다는 반면 이 부회장 측은 그런 의도가 없었다는 입장으로 의견이 상충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찰은 이날 결심공판에서 반대신문이 있냐는 재판부의 말에 간단히 고개를 저은 뒤, 의견을 말해달라는 재판부의 요청에 이 부회장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구형했다. 그가 ‘초범’이라는 점 그리고 피해가 회복된 점을 참작했다.

증인신문도 없었는데 심지어 반대신문조차 하지 않고 구형을 내린 검찰 측 결정에 순간 방청석의 기자들과 오리온 전직임원들 모두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또 이 전직임원들은 초범이라는 검사 측 양형 이유에 납득할 수 없다며 재판이 끝난 뒤 크게 한숨을 쉬었다.

만약 이화경 부회장이 아닌, 오리온 일반직원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면(?)

지난 2011년 5월경 담철곤 회장이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구속됐던 시기, 검찰은 이번처럼 미술품 횡령 혐의를 받고 있던 이화경 부회장에 대해 자금의 출처가 담철곤 회장의 계열사이며 담 회장이 구속기소된 점 등을 참작해 입건유예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입건유예는 경·검찰이 유죄를 인정하지 않지만, ‘범죄혐의’가 분명히 있고 단지 입건할 필요가 없어 내리는 조치다.

때문에 이날 재판이 끝난 뒤 이 부회장이 같은 혐의로 유죄 처분을 받은 전과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엄밀히 말해 같은 범죄혐의를 받고 입건이 유예된 만큼 그를 초범이라서 참작한다는 검찰 측 판단에 잡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날 재판의 방청에 참석했던 오리온 전직임원은 “이 부회장이 양평연수원에 원래부터 가품을 많이 뒀다고 했지만, 2011년 제가 관리할 당시에는 가품은 전혀 없었고 고가의 가구 그림을 연수원에 배치했었다”라며 이 부회장의 증언 대부분을 납득할 수 없다고 밝혔다.

특히 또 다른 전직임원은 이화경 부회장에 트리플 티어 플랫 서페이스 테이블의 가품을 만들어주겠다고 조언했다는 지인은 당시 구속돼 구치소에 있었던 상태로 그런 조언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절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그 외에도 자신들이 알고 있고, 실제로 겪었던 사실과 이 부회장의 증언내용이 맞지 않는 부분이 상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날 이화경 부회장의 법정증언 중 언급된 전직임원은 오리온 측과 개인 소송 중인만큼 이후 더욱 강력하게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 부회장의 재판 증언에 대해 그의 언니인 이혜경 전 동양그룹 부회장도 대응해 나갈 조짐이 들리고 있다.

검찰개혁을 외치는 윤석열 지검장의 서울중앙지검은 이화경 부회장 측에 반대신문 한마디도 없이, 그리고 초범이라는 오류로 양형이유를 말한 채 집행유예를 구형했다. (사진=한민철 기자)
무엇보다 이날 재판에서 가장 의문을 들게 했던 이는 검찰 측이었다. 분명히 다툼의 여지가 있었던 사항에 대해 반대신문이 한마디도 없었던 점 그리고 쟁점 사항 마다 관련자가 등장했고 그 관련자들에 대한 증인신문이 필요했지만, 속전속결로 재판이 진행된 점은 재판 이후 잡음을 내기 충분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만약 이번 횡령 사건의 당사자가 이화경 부회장이 아닌 오리온 일반 직원들로서, 이들이 수억원 상당의 회사 미술품을 자신의 집으로 무단으로 반출한 뒤 이를 변제하고 자신의 실수였다고 해명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반성한다고 할지라도, 과연 검찰이 집행유예 구형을 내릴 수 있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이다.

‘검찰 개혁’이라며 성역 없는 수사 그리고 공정한 수사를 외치는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의 의지가 아직 부족하다는 쓴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한민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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