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가깝게 지내던 친구로부터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학창 시절 나의 선생님이었던 그의 부친에 대해 물었다.

“응, 아직도 건강하시고 매일 일도 하셔.”

“연세가 많으실 텐데 아직도...”

“97세야, 밥을 잡수실 때 천천히 드셔. 아마 젊었을 때부터 그런 것 같아.”


계절이 바뀌면 TV 화면은 새로운 광고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스포츠 마케팅의 각축장인 스포츠채널 쪽은 신상품을 홍보하는 다양한 의류나 신발, 장비 광고로 넘쳐난다. 골프 장비를 광고하는 카피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관용성’ ‘일관성’ 이란 단어다.

드라이버를 광고하면서 ‘관용성’을 말한다. 손바닥만 한 쇳덩이로 된 페이스에 어떤 관용의 미덕을 기대하라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꼭 정타에 맞지 않아도 잘 날아갈 거란 광고다. 또 어떤 골프공은 항상 일관되게 날아가서 멈춘다고 광고한다. 광고처럼 ‘관용성’과 ‘일관성’을 갖춘 드라이버와 골프공으로 라운드를 한다면 오비(OB)도 없고 파온(PAR ON)도 쉬울 것 같다.

아마추어 골퍼 중에 고수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과 라운드를 하다 보면 많은 것을 보고 배우게 된다. 사람들마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비교적 정돈된 자신만의 루틴이 있고, 스윙 폼이 꼭 좋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리듬을 탄다는 것은 거의 공통인 것 같다.

홀에 다가갈수록 신중하고 집중하는 모습에서 그 사람이 왜 고수인지 확실히 알게 된다. 그린에서는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답습하듯 받아들이지 않고 심사숙고하며 살피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아마추어 고수들은 어떤 홀에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설령 그곳이 짧은 파3나 페어웨이가 넓고 평탄한 파4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시작부터 마지막 18홀의 그린까지 일관되게 자신의 게임에 집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마추어 골퍼들 중 70대 타수의 고수들에게 중요한 샷은 세컨드샷이다. 그들은 거의 매 홀에서 파온을 하고 ‘버디 트라이’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80대나 90대 초반 타수의 골퍼들에게는 세컨드샷보다 서드샷이 더 중요하다. 그들은 파온을 하기보다는 그린 근처에서 어프로치를 하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추어 골퍼에게 중요한 거리는 50m 내외라고 불 수 있다. 아마추어끼리의 승부는 거의 이 거리에서 가름한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50m 내외의 샷 결과에 따라 그 홀의 운명이 바뀌기도 하기에 그린 부근의 세 번째 샷은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무엇이든 서두르거나 급한 것은 실수를 유발하게 되어 있다. 그런 경우는 우리가 일상에서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되도록 천천히 움직이고 깃대가 펄럭이는 홀과 공과의 거리를 찬찬히 둘러보면서 공이 떨어져 굴러갈 곳을 응시한다. 그리고 공의 뒤편에서 연습 스윙을 하면서 오직 스윙의 크기에만 집중해야 한다. 다시 한 번 홀을 바라보며 방향을 설정하고 조금 전 연습했던 스윙의 크기대로 아무런 바람도 없는 마음으로 샷을 해야 한다. 천-천-히.

우리는 무관용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서로 편을 가르고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뉘어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관용은 종교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고 한다. 나와 다른 종교를 포용하고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 관용은 더욱 포괄적으로 발전하여 인종과 정치의 영역까지 널리 퍼져 있다.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기는 쉬운 일이 분명 아닐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고 트집잡기 위해 골몰한다면 관용이란 화해의 길로 나가기는 요원할 것이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은 편협하고 각박하여 드라이버 페이스만 한 아량이나 배려도 없을 것이다.

골프는 배려에서 출발하고 여유를 가지고 진행하는 운동이다. 같은 방향으로 걷고, 함께 공감하고 소통하는 놀이다. 배려나 여유, 공감과 소통은 관용과 같은 혈통이다. 상대를 인정하고 관용을 베풀기 위해서는 이 단어들이 정서적으로 곁에 있어야 한다.

97세의 친구 아버지는 식사 시간을 많이 할애한다고 했다. 천천히 씹고 골고루 잡수시기 때문이란다. 음식을 급하게 먹는 습관은 좋지 않다고 한다. 음식뿐이겠는가. 생활에서도 골프에서도 마찬가지다. 조급한 마음으로 먼저 하려고 서둘다 보면 실수하게 된다. 느리지는 않지만 급하지 않고, 빠르지 않지만 안정적인 속도로 살아간다면 좋을 것 같다.

‘관용성의 클럽’과 ‘일관성의 공’을 가지고 아직 푸른 잔디가 펼쳐진 곳으로 가자. 시월의 하늘은 먼바다를 퍼올린 듯 파랗고 아름다울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걷고 되도록 천천히 스윙해 보자.

칼럼니스트 장보구

필명 장보구 님은 강아지, 고양이, 커피, 그리고 골프를 좋아해서 글을 쓴다. 그의 골프 칼럼에는 아마추어 골퍼의 열정과 애환, 정서, 에피소드, 풍경 등이 담겨 있으며 따뜻하고 유머가 느껴진다.



장보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