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해서 외면하고 싶지만,'부디 잊지 말아야 할' 가난한 삶들

[문학과 페미니즘] 공선옥의 <홀로어멈>
불편해서 외면하고 싶지만,
'부디 잊지 말아야 할' 가난한 삶들


<멋진 한세상> 공선옥 소설집, 창작과비평사, 2002.

1991년 등단한 공선옥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쓴다. 80년 5월의 광주를 작품화했으며, 힘들고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여성의 삶을 담아낸다. 그런 그는 여러 면에서 동시대 여성 작가들과 변별된다. 90년대는 여성 작가들의 시대라고 할 만큼 다양한 여성 작가들을 배출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도시적 정서를 지닌 섬세하고 지적인 여성을 자신들의 소설에 등장시켰다.

그것은 90년대가 여성의 사회활동이 양적ㆍ질적으로 성장해 기존 사회에서는 소외되었던 여성들이 한층 지적이고 영민해져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면을 중심에 놓은 90년대 여성 작가들의 문학은 섬세한 감성, 지적이고 심리적인 치열한 사유, 세련된 비유, 잘 다듬어진 문체 등이 특징이다.

그런데 공선옥은 그런 전반적인 흐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가 그려내는 여성들은 모든 면에서 단연 독보적이다. 그 여성들 삶의 기반은 도시보다는 시골이며, 기구하게만 살아가는 그들은 외모, 학벌, 직업 등에서 무엇 하나 잘 난 구석이 없고, 그렇다고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이거나 냉철한 이성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하루하루를 억척스럽게 악다구니하며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일 뿐이고,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생존’ 그 자체다. 그래서 공선옥 소설은 인간과 삶의 냄새를 풍긴다. 향기가 아닌 냄새, 한 인간과 삶의 지독한 냄새다. 공선옥 소설에서 가난의 실체, 그 진실과 고통이 아무런 작위 없이 생생하게 전해지고, 독자는 그것들이 너무 구질구질하고 남루해서 차라리 외면하고 싶기까지 한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그의 소설에는 토속어(“덥기만 오살나게 덥네요”“이를 작신작신 갈아마시며” “어뜨케 되긴 어뜨케 되라우, 죽제 인자” “오져죽겠다는 듯이”)와 비속어(“이 년아”“나쁜 년”“개새끼, 다들 똥물에 빠져 죽어라”)가 난무하며, 소설 속 구어들은 너무 생생해 문어체에 익숙한 독자들을 낯설게 만들기도 한다. 결국 공선옥 소설은 정제되고 세련된 글이라기보다는 살아있는 거친 말이고, 문학이기 이전에 생생한 삶이다. 그 앞에서 그럴 듯한 수사가 무슨 소용이랴. 작가 역시 “나는 생존을 위하여 소설을 썼을 뿐 소설을 쓰기 위해 살았던 것은 아니다. 내게 소설은 삶보다 우선하지 않았다”라고 당당히 밝히고 있다.

“그런대로 멋진 한세상일 법도 한데 말입니다. 네? 뭐라구요? 개 같다구요?”
공선옥 소설에서 삶의 진실은 포장되지 않고, 가공되지 않은 생(生)인 것이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가난 속에서 억척을 부리는 힘 없는 사람들(‘멋진 한세상’의 한 대목, “그때는 말이지요. 미치게 도둑질이 하고 싶었습니다. 왜냐구요? 하도 없어서요”처럼)에 진저리를 치다가도, 그저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으로 웃어넘기는 그들의 능청에 ‘아이고’를 연발하며 무릎을 치고 폭소를 터트리고 만다.

늘 힘겨운 삶을 특유의 낙천성으로 해학적으로 받아넘기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쩌면 영원히 힘겨울 것만 같아 웃다가도 울고 한숨을 쉬게 된다. 절박하지만 구수하고 씩씩한 그들의 태도 때문에 웃음을 짓다가도, 결코 나아질 것 같지 않은 힘겨움과 절망에는 어쩔 수 없어 한숨을 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음의 <정처 없는 이 발길>과 <멋진 한세상>의 문장들은 공선옥 소설의 웃음과 한숨의 연결 지점을 잘 보여준다.

“희망은 가슴에 그것을 품고 있는 동안에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법이었다. 최소한 그 희망이 깨어지는 순간까지는 편안할 수 있는 거였다. 만약에 그 희망이 깨어진다 해도 그리 손해날 것은 없을 터였다. 희망하는 그 순간에 편안했으면 본전은 건진 셈이니까.”“소망과는 달리 희망 없는 현실이 눈앞에 딱 버티고 서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 현실이 무슨 괴물이나 되는 것처럼 간담이 다 서늘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그런대로 멋진 한세상일 법도 한데 말입니다. 네? 뭐라구요? 개 같다구요?” 이처럼 삶의 비애와 해학이 한데 섞여 한 마당의 판소리처럼 그의 소설은 짜여진다. 어처구니없는 모순과 역설들이 공선?소설에 苡?있고, 공선옥은 특유의 입담으로 생생한 삶의 거친 활기를 마음껏 펼친다.

“내 외로움이, 내 가난함이 사실은 내 힘”
‘홀로 어멈’은 이혼 후 아이 셋을 데리고 시골의 폐교에서 살아가는 한 여성, 정옥의 이야기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신발공장을 다니면서 산업체 부설 야간 중ㆍ고등학교를 마친 정옥은 남편이 해고당한 후 “이제 갓 셋째 아이를 낳은 정옥을 두들겨팼”고, “사회에서 실패한 남자한테 가장 만만한 것이 자기 마누라인 것은 공식”이니, “자기가 그런 만만한 마누라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이 소름끼쳐” 이혼했다.

이후 지방신문에서 신춘문예로 등단한 정옥은 글 써서 먹고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생활비가 적게 드는 시골”로 왔다. 폐교에 살림을 차리고, 네 식구의 한 달 살림을 단돈 오만 원으로 꾸려간다. 그는 악다구니를 치며 아이 셋과 살아가는데, 원하는 머리띠를 사오지 않았다고 투정을 부리는 어린 딸에게는 “머리 띠를, 돈 천원을 그 자리에서 작살내버리고”, 이웃들에게 “고릴라 같이 푸푸거리며”, “니 엄마 어디 도망 안 갈 테니 걱정마라 이 년아”라고 아이의 “등짝을 후려쳐” 아이를 울리고, “니 엄마가 어떻게 살고 있는데 엄마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동네 우세를 사고 만들어, 이 년들아”라며 딸들에게 호통을 치기도 한다. “술이 일단 몸 속으로 들어가면 제정신이 아니라서 힘든 일도 힘든 줄 모르고 하게 된다”“하여간 힘들 땐 술이 보약이다”라고 생각하며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엄마가 홀로 어멈, 정옥이다.

공선옥 소설의 여성이 독보적인 이유는 바로 이런 점에 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여성, 신화적인 동시에 봉건적인 여성의 삶을 재구성한다. 그러나 그들이 지닌 모성은, 기존의 많은 작품들에서 미화되었던, 언제나 자식들을 배려하고 모든 것을 희생하는 아름다운(실은 아름다운 것으로 신화화되고, 하나의 이데올로기화되어 버린) 모성과는 다르다.

그 여성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개별 욕망을 꿈꾸는, 술 먹고 담배 피우고 아이들을 마구 대하고 짜증을 일삼는 그렇고 그런 엄마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신의 아이를 배반하는 것은 아니고, 개별 욕망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 한 몸 추스르기조차 어려운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꾸역꾸역 제 자식들을(때리고 화를 내며 악다구니를 하면서라도) 보듬고 살아간다.

“엄마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도 자식”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불편하고 이질적인 존재로 설정되는 아버지는 쉽게 조연으로 추락하고,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그들은 오히려 모계가족을 이루며 잘 살아간다. 그리고 그 언저리에는 “남자는 쾌락 때문에 자의와는 다르게 아이를 만들지만 여자는 속 깊은 곳에서 좀 더 근본적인 욕구, 어미이고 싶은 욕구에 의해 아이를 낳고 기르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성이란 무언가를 속에 품지 않으면, 키워내지 않으면 안 되는 속성을 가진 것이 아닐까”(‘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라는 사고가 자리한다.

‘홀로 어멈’ 정옥이 사는 모습은 이렇다. 비가 많이 와서 전기는 나가고, 그는 “부러진 고춧대 세”우고, “옥상에 올라가 방수비닐” 치고, “물 안 나가는 하수구 뚫고” “비 맞고 해야 할 짓은 다 하며”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다니고” “이제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중얼거리지만, “비 맞는 닭들 생각에” “잠도 편히 못 잔다.” 다음 묘사는 그들 가족의 살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마음이 급해져서 아직도 훌쩍이는 둘째더러 뛰어가면 바람에 눈물이 마를 거라고 첫째, 둘째 앞서 뛰어가게 해놓고 자기는 셋째를 등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마지막으로 머리에 닭 상자를 인 뒤 드디어 홀로 어멈, 정옥이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비온 뒤 끝에 솟아오른 해맑은 아침 해가 그들 네 식구를 눈부시게 비추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의 교통비를 요구하러 간 교육청에서 그는 악다구니를 부리다 수모를 당하고, 이후 교육장과 대면하고는 이야기가 잘 된 것이 고마워 닭이라도 한 마리 줘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앞으로 그녀에게 폐교를 빌려주지 말라는 교육장의 하달을 듣게 된다.

그런 기막힌 상황들을 살아가지만, 홀로 어멈 정옥은 자신의 힘이 오히려 ‘외로움’과 ‘가난함’에 있다고 말한다. “제 속에서는 또 그것이, 그 뜨겁고 등등한 것이 가득히 차오르고 있다는 것을 함부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외로움이, 내 가난함이 사실은 내 힘이라는 사실을. 그 힘이 자기를 이곳에 오게 했다는 사실을.”

그런데 공선옥의 소설 앞에서 막막해지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살았고, 밥이 없어서 굶은 적 없으며, 돈이 없어 공부를 중단한 적도 없어 ‘그런 사람이 그 삶들에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障?遮?생각이 앞서기 때문이지는 않을까. 게다가 아득바득 악을 쓰며 치열하게 사는데도 늘 힘겹다는 대목들과 마주치면 아예 말문이 탁 막힌다. 하지만 이 모두는 어쩌면 구차한 변명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실은 그 가난하고 궁핍하며 누추하고 질퍽한 삶들이 불편해서 외면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공선옥은 쉬지 않고 말한다. 21세기 풍요롭고 잘 사는 세상의 어디엔가 힘들고 또 늘 힘들 수밖에 없는 삶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그러니 불편해도 그 삶들을 외면하지 말라고 소리친다. 그는 소설의 소재가 된 사람들이 “처해있는 현실이” 자신이 “쓴 소설보다 더 기가 막히다”며, 그들의 삶을 “부디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당부한다. 그들의 삶을 얼마나 받아들일지는 분명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최소한 그들도 우리와 함께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은 잊지 말자는 것이 공선옥 소설의 일관된 중심이다.

권민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4-26 14:47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