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애인을 사랑해 그녀와 삶과 꿈을 나누다 차현숙 소설집, 문학동네, 1997

[문학과 페미니즘] 차현숙의 <나비, 봄을 만나다>
남편의 애인을 사랑해 그녀와 삶과 꿈을 나누다
<나비, 봄을 만나다> 차현숙 소설집, 문학동네, 1997


1990년대 이후의 한국문학, 그 중에서도 여성 작가들의 문학에서 불륜은 가족 제도 내에서 사랑과 성이 더 이상 조화를 이룰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소재로 자리해왔다. 한편에서는 남편의 외도로 인해 상처 받고 소외되는 여성들의 삶과 내면이 그려지기도 했지만, 많은 소설들에서 불륜은 부부의 일상적이고 진부한 삶의 권태에서 일시적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매혹이자 가능성으로, 소외되고 상처 입은 자아가 보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로 다루어졌다.

차현숙의 ‘나비, 봄을 만나다’는 그런 면에서 다소 독특하다. 주인공은 불륜으로 상처 받고 아파하기기보다는 오히려 남편의 애인과 사랑을 나누고 새로운 삶을 꿈꿔간다.

다만, 여성 인물들의 상실과 방황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거나, 그 상처의 치유가 너무 손쉽게 이루어지는 점은 다소 아쉽다. 또 소재의 설정이나 결말이 너무 낭만적이어서 결국 어떤 낭만적 신화나 환상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 역시 지우기 힘들다.

차현숙 소설은 여성들이 그 고착된 성적 구도를 막 벗어나려는 지점, 그 구도를 인식하고 스스로 탈출구를 찾고자 몸부림치는 바로 그 지점에 위치한다. 차현숙 소설의 페미니즘적 가치는 가정에 안착한 여성들의 일상적 삶과 내밀한 의식을 차분하고 섬세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는 말이다. 이는 곧 사회와 남성이 여성에 부여하고 요구하는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진다. 가족 내의 관계 속에서만 규정되는 닫혀진 여성의 삶에 대한 꼼꼼한 성찰은 결국 한 개인으로 자아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은 여성의 내적 욕망을 드러내고, 어떤 식으로든 그 욕망의 살 길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평생의 삶이 나쁜 꿈인 사람도 있단다”
‘나비, 봄을 만나다’는 몇 개의 겹을 갖고 있다. 우선 주인공인 그녀를 둘러싼 과거를 보자. 시골 소읍의 교사였던 아버지는 본처를 두고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 그녀를 낳는다.

그 사실을 안 본처는 자살을 하고, 한 평생 죄의식 속에서 살게 된 “어머니를 사랑할 수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는 아버지”는 그녀에게 “꼭 꿈속에서만 나쁜 꿈을 꾸는 건 아니란다. 평생의 삶이 나쁜 꿈인 사람도 있단다”라며 “가장 좋은 것은 다시는 생명을 받지 않는 거란다. 생명 자체가 너무나 무거운 짐이고 고통이거든”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머니는 그녀의 초조가 시작되는 날 “널 낳을 생각은 아니었다”는 고백을 하며, “누군가 나를 증거하기 위해 너를, 너를 필요로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니 옆에는 언제나 죽은 그 여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결국 어머니는 그녀를 마치 본처의 환생인 양 느끼며 평생을 산 것이다. 아버지의 죄의식은 “죽음으로써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본처와 함께 누운 무덤 속에서도 썩지 않는다.

소설은 어머니가 그녀에게 풀어내는 이야기들 속에, 무언가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가진 여성의 내밀한 욕망과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을 담고 있다. “너무 지루하고 한가로웠던” 소읍에서 “남편을 따라 몇 년째, 애도 없이 타지에 엎드려 있는 그 여자의 눈은 바로 잃지 말아야 할 것을 잃어버린 그런 텅 빈 눈”이었고, 어머니는 “무언의 공범자로서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고 말한다.

“자신이 새롭게 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그 읍을 그 여자나 나나 어떻게 견디고 살 수 있었겠니?” “권태와 단조로움에 서서히 죽어가는” 그들이었지만, 아버지는 “자기 아내의 텅 빈 눈빛을 들여다본 적도 없는 사람”, “내 메마른 눈의 의미를 욕정으로 밖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남편(그녀의 아버지)이 이해할 수 없는 내면을 지닌 본처도, 어머니도 실은 “너무 지루하고 한가로와” 생긴 “권태와 단조로움” 때문에 무슨 일인가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 과거를 배경으로 그녀의 삶이 그려진다. 결혼 후 십 년이 지난 그녀와 남편의 삶은 이미 죽었다. 습관성 유산으로 다섯 번이나 아이를 잃은 그녀는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린 마지막 아이를 끝으로 이후 “살아 있는 시체처럼” 늘 아프다. 남편은 “당신을 가슴에 품고, 당신에게로 들어가도 나는 당신을 만날 수 없어…. 당신의 몸 안으로 모든 열정을 갖고 들어가도 당신에게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어. 참, 이상하지? 우린 십 년을 살았고, 그리고 서로 좋아하는데”를 중얼거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죽은 아이의 얼굴을 본 뒤 나는 나를, 내 속에 흐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피와 살로 이루어진 나를… 죽이고 싶어요. 그게 다예요”라고 대답할 뿐이다. “서로가 서로의 생기를 이미 뺏고, 빼앗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더 이상 생기와 삶에 대한 충만감을 각자의 내면에서 끌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깐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즐거워하고 있느냐 하는 거야”
그러한 그들의 삶에 어느 날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남편의 외도 때문이다. 남편과의 일상에서 아무런 기쁨을 찾지 못하는 그녀에게 남편의 외도는 오히려 삶의 에너지를 제공한다. “그가 실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이 너무나 오랜만에 긴장된 행복을 느끼게 한다”며 “그녀는 남편이 그녀에게 가져다 주는 활기와 향긋한 냄새의 주인을 ‘봄’이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한다. 더 이상 남편과 아내라는 역할을 할 수 없는 때가 왔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내가 태어나지 않기를 바랐듯이 이렇게 조용히 살다가 죽을 거예요”를 중얼거리던 그녀는 오히려 남편의 상대인 ‘봄’을 갈망하기 시작한다. “슬픈 영혼만 남겨진 다섯 아이를 모두 합한 것 같은 ‘봄’의 생명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남편에 대한 괴로움보다 더 괴로운 것은 내가 당신을 더 갈망한다는 거. (…) 나와 그는 이제 당신이 없으면… 우리 둘의 관계는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어요”를 되뇌이는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행복을 만져보는 듯한 남편에 대한 질투”를 느끼며 “사랑하고 싶다. ‘봄’을”이라고 외친다.

마침내 그녀는 밝고 발랄한 ‘봄’을 만난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유혹해서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남자친구가 없을 때가 없었다”는 ‘봄’. 마치 순간으로만 존재하는 듯한 그녀는 “나에겐 그 순간에 내 앞에 있는 상대 외에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사랑, 글쎄. 난 누구도 사랑한다고 해서 사귀어본 적이 없어. 그냥 만나서 즐거우면 돼. 그러니깐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즐거워하고 있느냐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처음 ‘봄’을 보았을 때 그녀는 남자들에게는 느낄 수 없는 미묘한 열정과 정열이 솟구치고”, ‘봄’을 사랑하기에 이른다. 실은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절대 버리지 않겠다고 하면서 떠나버린 아버지와 어머니. 각자 결혼을 하여 타인으로 살아가는 그들을 ‘봄’은 “인생은 별 거 아니다”라며 받아들인다. 다만 “가족을 만들지 않겠다. 가정을 갖지 않겠다” “가족이란 식어버린 커피 같은 거였다”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결국 가정을 버리지 않는다는 게 좋아서” 유부남을 사귄다는 ‘봄’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남편은 “오직 그녀(‘봄’)만을 사랑해”라며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남편과 헤어진 ‘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남편의 아내였던 그녀의 동거인이 된다. “남자들은 진지한 대화”를 모르고, “나를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봄’은 그녀를 언니로 따르며 “내가 외로울 땐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사랑한다. 어느 날 ‘봄’은 임신을 하고, 그녀는 태어날 아기를 위한 준비를 하면서 ‘봄’을 돌본다.

아기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아기는 그녀와 ‘봄’의 아기이니까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필요가 없다.” 어쩌면 자신의 어머니의 삶을 되풀이하고 있는 ‘봄’을 그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게 한다. 제도로서의 결혼과 이데올로기로서의 성에서 자유로운 하나의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남성들의 질서와 사회를 벗어나 그들은 여성들만의 새로운 가정을 꾸려간다. 그 속에는 성적 제도와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자유로운 그녀들만의 영혼이 있다.

그리하여 그녀는 무덤 속에서도 썩지 않는다는 아버지에게 “썩지 않다니, 왜! 왜, 안 썩어! 썩어야지. 썩고, 또 썩어야지 아버지, 이제는 썩어서 흙이 되고 물이 되어 편안해지세요. 그리고 여자, 당신도 아버지와 함께 흙과 물이 되어 서로를 휘감고 새로운 생명을 받아야지요. 그래서 내 아이가 힘껏 뛰노는 땅이 되고 하늘이 되어야지요”를 외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차현숙은 한 여성이 지닌 운명의 굴레를 매우 환상적이자 낭만적으로 뛰어넘어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의 실현 가능성보다는 성의 구도가 어떻게, 또 얼마나 새로울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떠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동성애까지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같은 여성으로서 느낄 수 있는 교감과 위안으로 ‘나비’는 ‘봄’을 만나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고, 그들의 새로운 꿈인 그들만의 아이를 낳아 키울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살게 만든 것인가. 뿌리깊은 가부장제의 사회구조 때문인가. 그러나 더 눈 여겨 볼 것은 순간순간의 삶을 긍정하며 또 다른 방법을 찾아나가는 여성의 능동성과 진정성이다. ‘나비’가 ‘봄’을 만나다니, 이 아니 기쁜 일인가. 그리고 그것은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차현숙 소설에서 '나비'는 진부하고 권태로운 일상과 과거의 상처들을 뛰어넘는 자유로운 존재의 이미지를 지닌다. 갇힌 존재의 틀을 깨고 훨훨 자유로이 공기 속을 유영하는 나비는 차현숙 소설의 여성들이 지닌 하나의 꿈이다. 그 꿈이 현실이 되기까지, 그리고 그것이 낭만의 차원이 아니라 진정한 실체로 그 존재의 본질이 되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들이 필요할 것인가.


권민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6-07 17:56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