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 속에 누워도 늘 결핍이지만

[문학과 페미니즘] 이순원의 <은비령>
영원 속에 누워도 늘 결핍이지만

어디 시간이 멈춰버린 공간 하나를 가질 수 있다면? 인간이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질서인 시간을 이겨낼 수 있는 공간이 지구상 어디엔가에 한 곳이라도 있다면? 그렇게 인간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늘 무한과 영원을 열망한다.

그리고 그러한 희원과 동경은 불가능하기에 오히려 아름답다. 1997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순원의 <은비령>은 그런 열망들이 고요히 아로새겨진 작품이다. 훼손된 삶 속에서도 아름다운 무늬들을, 생명의 결들을 찾아내는 작가 이순원. 애잔하고 아련한,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 <은비령> 속으로 들어가 본다.

시간이 멈추어버린, 영원의 시간을 사는 ‘은비령’

화자인 내가 오래 전에 머물렀던 곳, ‘은비령(隱秘嶺)’. 지도에도 없는 그 이름은 당시 그곳에서 고시 공부를 하던 나와 친구가 “은자가 사는 땅”, “신비롭게 깊이 감춰진 땅”이라는 의미로 붙인 것이다. 소설에서 ‘은비령’은 시간이 멈춰버리는, 그리하여 마치 영원의 시간이 흐르는 곳 같다.

여기에 유한한 인간들, 늘 어긋나버린 인연으로 살아온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들어간다. 한때 나와 친구가 살았던 은비령의 그 방에, 이제는 저 세상 사람이 된 친구의 아내, 선혜와 내가 함께 몸을 누이는 것이다.

선혜는 바람꽃 같은 여자. 그녀는 “보기엔 연약하고 이뻐 보여도 사실은 뿌리와 줄기 안에 강한 독성이 있고” “다 시들어 꼬부라져도 독만 안 시드는” 바람꽃을 꼭 닮았다.

오래 전 군복무 중에 눈 속에 피어난 바람꽃을 보고 감격해 어쩔 줄 모르던 일병의 연인과 꼭 닮은 선혜. 그 일병이 지뢰 오발 사고로 죽은 것처럼, 고시에 합격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던 선혜의 남편(은비령에서 함께 공부했던 내 친구)도 우연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고도 몇 년이 지나 우연히 마주치게 된 선혜는, 그녀를 처음 본 인상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렇게 남편을 잃은 바람꽃이 되어 있었다. “바람꽃…. 어쩌면 비슷한 얼굴에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두 여자 다 결국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일까. 내가 아는 그 바람꽃들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마음으로 가장 가깝게 나는 그녀를 느꼈다”

아내와 별거 중이던 나는 그렇게 우연히 만난 선혜와 점점 가까워졌다. 멀리 서역 돈황에서도 “가도가도 끝없는 길 위에 몸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마음으로 가장 가깝게 나는 그녀를 느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 모른다.

나는 이미 여자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와 나 사이엔 어쩔 수 없는 과거,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친구가 늘 살아있다. 나와 그녀 사이에는 “계란 껍질 속의 엷은 막” 정도가 겨우 남았을 뿐이지만, 우리를 엮고 있는 친구라는 존재는 우리 사이에서 극복할 수 없는 이물감을 만들어내곤 한다.

나는 그녀와만 함께 여행할 “그 어딘가”, “내겐 죽은 친구이고, 그녀에겐 죽은 남편인 한 사내의 영혼이 우리에게 쳐놓은 모든 기억과 의식의 그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곳.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도 우리 마음 안에 그의 영혼에 대해 더 이상 어떤 소금 짐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곳”을 꿈꾸지만, “정말 우리는 우리 마음의 그런 곳을 찾아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언제나 그 소망을 따라다닌다.

어느 날 나는 서울에서 만나기로 한 그녀와의 약속을 내버려두고, 그가 사고를 당한 격포를 찾아간다. “왠지 그곳 바다에 가면, 아니 바다를 향해 떠나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의 소금 짐이 반은 그곳에서 녹아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는 도중 라디오에서 삼월인데도 대관령에는 눈이 한창이라는 말을 듣고는 바로 차를 돌려 은비령으로 향한다. 삼월의 눈은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었던 곳”인 격포가 아니라, “내가 처음 그를 만났던 곳”인 은비령으로 나를 이끌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은비령이라는 이름을 아는 유일한 사람인 그녀를 위해 전화 자동응답기에 은비령으로 떠난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눈을 보기 위해서 떠나온 길이라 일부러 체인도 치지 않고, 그녀가 선물해준 음악을 내내 들으며 고개를 올라온 나. “넘고 보니 체인 없이는 절대 넘을 수 없는 길을 나는 여자와 노래와 함께 넘은 것이었다.” 서역 돈황에서도 그랬듯, “몸으로 가장 멀리 있을 때 마음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느낌”으로 나는 그녀를 가슴에 담는다.

그런 와중에 은비령 고갯마루에서 차의 시계는 불현듯 0:00으로 멈춰버린다. 그 시간이 멈춰버린 공간 은비령에서 나는 비로소 “그가 죽은 다음에도 떠나지 못해 머물러 있는 곳은 격포나 은비령이 아니라 바로 여자와 내 마음 한가운데라는 것”을 깨닫는다.

다음 날 선혜는 “그냥 왔어요. 저도 왠지 와봐야 할 것 같아서요”라고 말하며 은비령을 찾아 온다. 정비까지 받은 그의 자동차 안 시계는 은비령 꼭대기에서 또다시 0:00의 시각으로 멈추고. 자신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 것을 확인한 선혜는 “그럼 선생님한테만 시간이 멈추는 모양이네요.

여기 은비령이. 저한테는 가고요.” “시간이 멈추면 좋죠. 그러면 그 시간만큼 다른 세계에 있는 거니까. 선생님한텐 여기 은비령이 그런 덴가 봐요”라고 말한다.

“제가 찾을 수 있는 별에만 가 있으면 돼요. 우리가 이곳에 머물고 있는 건 아주 짧은 시간이니까”

그리고 우리는 시간이 멈춰버린 은비령에서 별을 보러 왔다는 한 남자를 만난다. 남자는 별과 우주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모든 행성은 한 번 지나간 궤도로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공전을 하고 있다고. 높이와 너비가 100마일인 바위. 천 년에 한 번씩 날아와 부리를 다듬고 가는 작은 새.

그 새 때문에 바위가 닳아 없어지게 되는 시간인 ‘영원의 하루’. 그 영원의 하루가 지나면 행성은 지나쳤던 궤도를 다시 밟게 된다고. 그런데도 그런 영원의 시간이 영원만큼 흘러도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 별이 있다고. 별에서 ‘영원’을 보고, 때문에 사랑했지만 잃어버린 연인을 본다는 남자.

그는 “몇 억 광년 떨어진 곳에 가 있다 하더라도 제가 찾을 수 있는 별에만 가 있으면 돼요. 우리가 이곳에 머물고 있는 건 아주 짧은 시간이니까”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들려주는 인간의 시간.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데 걸린다는 2,500만 년. 세상의 일이란 2,500만 년을 주기로 되풀이해서 일어나니, 그때마다 모든 오늘을, 지금의 모든 순간을 반복해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남자의 이야기와 은비령의 별들을 가슴에 담고, 예전 친구와 누웠던 방에 지금은 사랑하게 된, 그 친구의 아내와 눕게 된 나. 나는 “정말이지 내 손으로 여자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2,500만 년 후에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다른 사람보다 먼저 만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다 해도 그 생애에도 저는 바람꽃으로 태어날 거예요. 다 시들어도 그건 시들지 않을 테니까…”라며 “그 사람이 한번 스쳐간 다음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별에만 가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는 선혜.

그녀는 그렇게 은비령에서도 멈추지 않는 그녀의 시간을 되새기지만, 옷을 벗고 이불 속에 누워서는 “이제 제 손을 잡아주세요. 그리고 2천5백만 년 후 다시 절 처음 봤을 때 그것을 기억해 주시고요. 바람꽃 같다고 말할 때…”라고 말을 건넨다. “그날 밤, 은비령엔 아직 녹다 남은 눈이 날리고 나는! 2천5백만 년 전의 생애에도 그랬고 이 생애에도 다시 비껴 지나가는 별을 내 가슴에 묻었다.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어 묻고 묻히는 동안 은비령의 칼바람처럼 거친 숨결 속에서도 우리는 이 생애가 길지 않듯 이제 우리가 앞으로 기다려야 할 다음 생애까지의 시간도 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별은 그렇게 어느 봄날 바람꽃처럼 내 곁으로 왔다가 이 세상에 없는 또 한 축을 따라 우주 속으로 고요히 흘러갔다.”

결코 어쩔 수 없는 많은 일들. 늘 안타깝게도 어긋나는 수많은 일들을 견딜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영원한 무엇을 희구하기 때문일까. 모든 상처받은 것들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멈춰진 시간이 있는 곳, 은비령. 그곳에서 기약할 수도 없는 사랑을 나누는 그들.

하지만 다시 또 어느 먼 훗날이 온다 해도 그들은 그렇게 또 만나서 어긋나게 되리라. 아무리 반복한다 해도 생은 결핍을 채우지 못한 채 새로운 결핍들을 만들어낼 뿐이니. 무한해서 영원한 시간이라고 한들 유한하고 결핍된 인간의 숙명을 바꾸지는 못할 테니.

그러나 오늘이, 이 순간이 다시 한 번 주어질 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면 삶에 대해 조금쯤 너그러워질 수 있을까. 아니라면 영원히 반복될 그것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될까. 그러면서 2,500만 년 동안이나 은비령을 맴돌며 헤매다 소설의 시작으로 돌아와 본다. “별! 처럼 여자는 2천5백만 년 후 다시 내게로 오겠다고 했다.

나도 같은 약속을 여자에게 했다. 벗어나면 아득해도 은비령에서 그것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 은비령 너머의 세상은 깜깜하게 멈추어 서고, 나는 2천5백만 년보다 더 긴 시간을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p> 세상에 눈물겹도록 안타깝고 쓸쓸한 일들. 가끔은 그런 것들을 되새기려 멈춰진 영원의 시간으로 잠시 들어가 몸을 누이고 싶다. 흘러 흘러 영원히 흐르면 설혹 만날 지도 모를 그 어떤 별을 보기 위해 말이다.

그 멈춰진 영원 속에서 2,500만 년과 또 2,500만 년과 또 다른 2,500만 년과… 그렇게 안타까운 시간들을 다시 살아낼 수 있다면. 하지만 은비령이 아니더라도,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그 모이고 모여 영원을 만드는 하루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2,500만 년 전에도 살아내었고 2,500만 년 후에도 살아낼 오늘을.


권민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8-30 15:05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