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접근성이 제한된 남미의 탈(脫)달러화?

비트코인 법정통화 채택과 관련한 세부계획 발표하는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 사진=대통령실/로이터,연합뉴스 )
[주간한국 박병우 기자] 현재 암호화폐 비트코인의 가장 두드러진 사용처는 투자 수단이다.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한쪽에서는 채굴 하고, 헤지펀드는 매매 시점을 탐색한다.

범죄집단은 비트코인으로 자금을 은닉한다. 조세회피를 원하는 고액자산가가 암호화폐 뒤에 숨었다가 검거 됐다는 뉴스는 이제 일상화되고 있다.

최근 세계 암호화폐 시장에서는 굵직한 호·악재가 일시에 쏟아졌다.

국내서 '돈나무 언니'로 불리는 투자자 캐시 우드의 아크인베스트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비트코인 상장지수펀드(ETF)를 신청했다. 암호화폐 시장에 기대감을 불어넣어 주는 소식 중 하나이다. 그러나 SEC가 이 상품을 쉽게 승인할지는 불분명하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디지털 통화를 가르친 게리 겐슬러 SEC 위원장은 암호화폐 거래소에 대한 규제와 투자자 보호 강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앞서 멕시코 재벌 리카르도 살리나스 플리에고가 자신이 보유한 은행이 멕시코 금융기관 가운데 최초로 비트코인을 수용하기 위해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이처럼 비트코인은 점차 자산시장의 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을 밟고 있다. 비트코인을 둘러싼 또 다른 굵직한 게임은 법정화폐(Fiat Money) 도전기다. 법정화폐는 국가의 공식통화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자국 통화를 달러로 대체한 달러라이제이션(달러화)과 달러 영향권에서 벗어나겠다는 탈(脫)달러화 사이의 화폐전쟁도 혼재되어 있다. 또한 좁게 보면 기존의 은행결제 시스템에 접근이 힘들고, 높은 송금수수료를 피하고 싶은 국가나 이용자 계층에서는 비트코인을 대안으로 선택하고 있다.

중앙은행은 비트코인의 법정화폐 도전에 반대한다. 중앙은행의 대표기구인 국제결제은행(BIS)은 대형 기술기업이 통화의 지배권을 보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중앙은행이 주도하는 디지털화폐(CBDC)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그에 따라 다소 보수적이었던 미국의 연방준비은행(Fed,연준)도 CBDC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은행도 CBDC의 기술적 모의실험에 들어간다.

이처럼 미묘한 시기에 세계 최초로 남미의 엘살바도르가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지정했다. 지난 6월 9일 엘살바도르 의회는 비트코인을 제2 법정통화로 지정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관보 게재 90일 이후 법안의 효력이 발효된다. 2001년 엘살바도르는 이미 달러를 제1 법정통화로 채택한 바 있다.

엘살바도르에 앞서 베네수엘라가 먼저 비슷한 실험에 도전했다. 지난 2018년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석유와 연동된 ‘페트로’라는 가상화폐 도입을 추진했다. 블록체인을 적용한 것은 아니고, 금(金)본위제를 모방한 석유본위제 화폐이다.

반미 성향의 마두로 대통령은 통화주권을 지키고 미국의 금융봉쇄를 극복하겠다고 선언하면서 탈달러화 정책을 선택한 것이다. 지금도 베네수엘라의 일부 상점에서는 비트코인과 석유 연동의 페트로코인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엘살바도르의 법안 통과는 암호화폐 시가총액의 절대비중을 차지하는 비트코인이 암호화폐 시장에서 결정되는 달러 가격으로 상품·서비스 구매시 결제 수단이 되도록 한 것이다. 비트코인으로 세금 납부와 은행 대출 상환도 가능하다.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은 국민의 약 70%가 은행계좌 개설 등 금융서비스 접근이 배제된 상황에서 비트코인의 법정화폐 지정이 금융 포용성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해외 이주민의 본국 송금 시 편의성 향상과 수수료 절감 효과도 기대하고 있다.

국가 간 평균 송금수수료 6.5%로 높은 수준

베네수엘라의 2019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해외 거주민의 본국 송금액 비중은 21% 수준이다. 지난해 엘살바도르 해외 국민의 본국 송금액은 56억달러(약 6조 3300억원)로 외국인 직접투자액 7억2400만달러는 물론 상품 수출액 48억 달러를 웃돌고 있다.

이와 관련해 파올라 수악치 런던 퀸 메리대학교 국제경제학 교수는 “현재 은행시스템에서 국가 간 평균 송금수수료는 6.5%로 너무 높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남미 등 해외 이주민이 많은 저소득 국가의 본국 송금 총액은 5400억달러에 달한다. 송금수수료를 2%만 낮춰도 160억 달러를 아낄 수 있다.

또한 이민자들이 일하러 나간 나라에 은행이 없는 경우가 많다. 송금을 받는 가족들도 은행 접근이 제한적이다. 남미에서 은행 접근이 제한된 인구는 17억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수악치 교수는 “높은 국가 간 송금 수수료와 제한된 은행 접근이 비트코인을 통한 송금을 유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비트코인의 높은 변동성이다. 자칫 교환 수단에 그쳐야 할 자산이 위험한 가치 저장소로 전락할 수 있다. 비트코인의 가격이 급락할 경우 송금 과정에서 그동안의 노동 보상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수악치 교수는 “비트코인의 법화 채택을 단순한 열풍이나 비난의 대상으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국제 금융시스템상 약점인 ‘포용성’을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비교적 성공리에 도입된 아프리카 케냐의 모바일뱅킹 엠파사(M-pesa) 같은 대안을 국경 간 거래까지 지원할 수 있는 공동 협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한편 전문가들은 비트코인 가격이 급락하면 엘살바도르의 은행시스템이나 실물경제가 한꺼번에 좌초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부켈레 대통령은 이를 대비해 비트코인의 미국 달러화 태환 및 가치 안정성 확보를 목적으로 국영은행인 엘살바도르개발은행이 1억5000만 달러의(약 1696억원) 신탁기금을 운용하도록 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국제 금융계에서는 엘살바도르의 실험이 성공할 경우 멕시코 등 다른 중남미 국가들에서도 탈달러화 전환 움직임이 시도될 수 있다고 관측했다.



박병우 기자 pbw@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