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향'까지 46년간 한 해도 쉰 적 없는 연극계 대모의 아름다운꿈

선입견이란 참 쓸모없는 것이다. ‘한국 연극계의 대모’, ‘카리스마의 여제’,‘팔색조의 완벽주의자’ 등 무대 위에서 그토록 관객들을 압도하던 대배우 박정자(66)씨는 맨 얼굴의 해맑은 피부와, 더 해맑은 표정으로 기자 앞에 서 있었다. 소탈하다는 표현조차 과장스러울만큼 다감한 여인. 대배우로서의 위압감은 온데간데없이 살가운 정감이 느껴졌다.

출연중인 연극 ‘침향’ 이야기로부터 운을 떼었다. 침향은 제1회 차범석 희곡상 수상작이자 한국전쟁에 얽힌 한 마을 민간인들의 상처와 화해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관객 및 비평가들로부터 ‘올해의 손꼽히는 수작’이라 극찬을 받으며 지난 29일 강한 여운 속에 막을 내렸다. 침향에서 그는 회상 장면의 노모 역할을 맡았다.

“ 죽은 어머니 역이죠. 극중 아들의 기억 속에, 그리고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새겨진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예요. 상징적으로, 극의 처음과 마지막 문을 열고 닫는 역할이예요. 훌륭한 배우들도 많고, 스태프와의 인화도 아주 좋아서 마음에 더 드는 작품이예요.”

우리가 앉은 곳은 공연 1시간 여를 앞둔 무대 위의 세트, 들마루 위에서였다.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객석이 아니라 무대에 앉아 배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어설픈 즉석 출연자처럼 머쓱해졌다.

“ 선생님 관록이면 (여기서) 연기를 하면서도 객석의 관객들이 눈에 다 보이겠지요?”

“ 아니, 대극장에서는 안 보여요. 안 보이는게 또 낫고. 나는 소극장이 나아. 소극장은 무대 자체부터가 같은 높이에서 관객과 직접적으로, 바로 앞에서 마주하고 있다는 소통의 느낌이 더 확실해서 좋아.”

그는 지난 2월, 역시 대 호평속에 막을 내렸던 뮤지컬 ‘19 그리고 80’에서도 순수한 엽기할머니 ‘모드’역을 맡으며 “내 나이 80세때까지 ‘모드’로 무대에 오르겠다”고 말한 바 있다. 혹 즉흥적인 홍보성 공약이 아닌가 했는데,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 아니, 그건 진심으로 한 얘기예요. 그 작품을 하면서 ‘정말 나도 여든살때까지 이것을 계속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를 생각했어요. 아마 2년에 한번씩 하면 별 무리 없이 거뜬히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때까지 건강해야할텐데...”

‘박정자 브랜드’의 연극은 특징이 있다.

“ 재미있는건, 이미 봤던 관객들도 다음해에 하면 다시 보러 또 온다는 거예요. 그게 재미있어요. 그만큼 작품이 워낙 좋으니까 그런거고.”

■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재간둥이 막내소녀

그는 7살때부터 유치진 선생의 작품 등 정통 연극을 보며 자랐다. 1남4녀중 막내. 그중 2년 전 작고한 그의 오빠 故 박성호 영화감독의 영향이 지대했다. 1991년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했던 어머니 역시 당신의 예술가적 기질을 막내딸에게 고스란히 물려주었다. ‘가족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내 머리와 가슴속에 연극인의 피가 잠재돼 있었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이화여대 2학년때 문리대 연극반에서 ‘페드라’를 공연한 것이 첫 작품. 1963년 동아방송국 개국때엔 경쟁률 150대1을 뚫고 합격, 전속성우가 되었다.

당시 학칙에 따라 방송생활을 위해 자퇴, 사미자, 전원주, 故 김무생 씨등과 입사 동기생이다. 성우생활 동안 체득한 발성법이나 호흡법은 그의 평생 연극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1966년부터 극단 ‘자유’ 창단멤버로 활약하면서 연극계에 본격 진입, 연극인의 삶을 걷기 시작했다. ‘피의 결혼’을 비롯해 오늘날까지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면서 연극인 박정자의 힘을 꾸준히 드러내왔다.

“ 오빠가 아주 전폭적으로 응원을 해 줬어요. 아마 11살이나 어린 막내동생(자신)이 연극을 한다는 게 오빠에겐 그저 기특하고 대견했을거야. ”

■ 한국연극 100년, 박정자 연극 46년.

올해로 한극연극 100주년. 그는 “모험가, 선구자 정신이 투철했던 좋은 선배들이 있었기에 지금 한국연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한다”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 얼마전 모 원로배우 선생님은 “한편으론, 평생 연극을 하다보니 어쩐지 남의 인생만 사는 것 같은 회의를 느낀 적도 있다”고 말씀하신 걸 들었어요.”

“아, 그 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저는 좀 달라요. 얼마전 내가 내 연보를 정리해 볼 일이 있었는데, 62년 대학극에서부터 세어보니 단 한 해도 쉰 때가 없더라고. 너무나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간 꾀 부리지 않고 열심히 해 온 내 자신에게도 감사했고. 배우란 참 축복받은 인생이예요. ”

“ 한국연극 100년사 중 선생님도 그 역사의 절반을 함께 해오셨는데, 선생님 자신의 역사는 어떠셨나요? 탄탄대로였나요?”

“ 아니, 전혀 아니야. 나 역시 상처도 많았고, 힘든 적도 아주 많았지. (어떤 상처요?) 대인관계 등 여러 가지지. 어떨 땐 내가 나 스스로 정한 기대치가 있는데 거기에 못 미첬을 때 스스로 실망하고 상처입고, ‘내가 고작 이 정도 밖에 안 되나’ 좌절감을 느낄 때도 많았어. 그리고 아무리 몸이 아파도 일단 시작하면 무조건 밀고 나가야 되는게 연극이쟎아요. 배우는 몸이 악기, 게다가 항상 라이브야. 영화처럼 스케줄을 미루거나 당길 수도 없고, 어려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야.”

지난해만 해도 그는 한겨울 심한 부상을 당한 채 ‘신의 아그네스’에 출연,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와 찬탄을 받은 바 있다. 빙판길에 넘어져 응급실에 실려간 뒤 입 안까지 몇바늘을 꿰맺다. 얼굴에도 심한 찰과상이 생겨 여기저기 반창고를 붙였다. 다친 다리에도 깁스.

그 상태로 진통제를 맞아가며 분장으로 상처를 감춘 뒤 악착같이 무대에 올라 자신의 몫을 해 냈다. 진통제 효과 때문에 대사를 까먹는 등 어쩔 수 없는 해프닝이 벌어졌지만, 끝까지 그는 포기하지 않은 채 공연을 마쳤고, 공연후 인사에서 사정을 밝혀 오히려 관객들의 더욱 열렬한 감동을 자아냈다.

■ 아름다운 프로젝트 80

“ 희한한 건, 작품마다 거기에 몰입할 때면 실제로 자신이 극중 인물에 전이되는 것 같아. 예를들어 아픈 사람 역할을 맡으면 내가 진짜 아파져, 진짜로. 반대로, 사랑하는 역할을 맡으면 정말 얼굴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니까. 그럴땐 보는 사람들마다 “너, 요즘 왜 이렇게 갑자기 얼굴이 좋아졌어?”물어볼 정도야. 그러니깐 누구든 항상 밝고 좋은 생각만 해야된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는 연극인복지재단 활동 등 사회 주변의 이웃들을 돕는 ‘소리없는 후원천사’로도 조용히 알려져 있다. ‘침향’이 끝나면 가을쯤 한번 더 무대에 설 예정. 그리고 ‘우리끼리만 말인데...’라 말하듯 그가 다정스레 속닥였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19and80’이라는 홈페이지가 있어요. 내 홈페이지인데도 나는 한번도 못 들어가봤어. 인터넷을 몰라서(웃음). 진짜 내 나이 여든살때까지 무대에 오르는 것, 이른바 ‘박정자의 아름다운 프로젝트’야(웃음).”

잠시 시계를 내려다본 그는 “아쉽지만, 공연준비할 때가 됐다”며 예의 따사로운 웃음을 남기고 분장실로 사라졌다. 기자는 객석으로 내려왔다. 얼마 뒤 ‘침향’이 시작됐다. 무대 세트만 보아도 제작팀의 옹골찬 꿈과 의지가 엿보이는 역작이었다. 말한대로, 막이 오르자마자 맨 먼저 그가 나왔다. 무대 위의 그는, 그러나 조금전 기자의 왼쪽에 나란히 앉아 자상한 외숙모처럼 자분자분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던 그 가녀린 여인네가 아니었다. 수십년간 관객들이 사랑해 온 대배우 박정자, 틀림없는 그였다.

■ 박정자는

1963년 동아방송 성우1기. 이화여대 신문학과 중퇴. 연극 ‘피의 결혼’,‘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신의 아그네스’,‘넌센스’ 등 약 150편 출연. 영화 ‘이어도’,‘말미잘’,‘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 14편 출연. 1970년 백상예술대상, 1985년 대종상 여우조연상, 2001년 MBC 명예의 전당, 2007년 보관문화훈장. 현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 한국영상자료원 이사, 서울국제공연예술제 홍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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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