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웰빙시대의 리더 ⑤한광호 한빛문화재단 명예이사장티베트 불화 '탕카' 40년 미술품 수집 인생 결정체로 세계적 컬렉션 자랑

한광호 한빛문화재단 명예이사장의 40년 문화 사랑을 이어가고 있는 한혜주 화정박물관 관장


세계 최고 수준의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찾는 한국인들은 관람을 마칠 때면 왠지 개운치 않은, 때론 화까지 나는 경험을 하곤 한다. 2층 중국관과 인도관 사이에 있는 158㎡ 규모의 초라한 한국실 때문이다. 워싱턴 스미소니언 박물관, LA카운티 박물관, 캐나다 온타리오 왕립박물관 등 세계 유수 박물관의 한국실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 대다수 국가가 문화를 통한 국가 경쟁, 특히 대형 박물관(미술관) 내의 '문화의 창'을 매개로 자국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과정에 한국은 한참이나 뒤쳐져 있다.

그나마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대영박물관의 한국실은 다소 위안을 준다. 물론 중국관이나 일본관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규모(약 396㎡)나 소장품에서 다른 박물관의 한국실과 차이를 보인다. 이렇게 유럽의 세계적 박물관에서 '한국 문화'가 나름의 자리를 차지하기까지는 평생 우리 문화유산뿐 아니라 동아시아 문물을 소중하게 간직해 온 '문화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광호(86) 한빛문화재단 명예이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1965년에 대영박물관을 처음 방문했는데 일본과 중국에 비해 너무나 빈약한 한국의 문화재 상황을 보고 한국실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결국 40년쯤 걸려 2001년에 한국실을 열었죠."

26일 서울 평창동 자신의 아호를 딴 화정(和庭)박물관에서 만난 한광호 명예이사장은 당시의 감회를 되새기며 지난 추억에 잠겼다.

40여 년간 미술품을 수집해 온 한 명예이사장은 1999년 화정박물관, 2001년 대영박물관 한국실 개관, 그리고 2003년 대영박물관에서 자신의 소장품을 전시한 것이 가장 보람있던 일이라고 말했다.

"평생의 꿈이 박물관 세우는 일이었는데 생전에 이뤘어요. 문화유산은 인류 정신의 보고입니다. 이것만큼 소중한 게 없어요."

이태원에 있던 화정박물관은 2006년 한 명예이사장이 처음 설립(1960년)한 회사인 백수의약㈜ 터로 이전, 자리를 잡았다. 특히 티베트의 불화 '탕카'는 세계 최고의 컬렉션을 자랑한다. 그는 대영박물관과 인연이 각별하다. 40년 가까이 꿈꿔 온 한국실을 개관한데다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티베트의 유산-한광호 소장 탕카'전이 열린 것이다.

한 명예이사장은 1997년과 1998년 대영박물관에 100만 파운드(약 16억원)를 기부했고, 그 자금을 바탕으로 2001년 가을 대영박물관에 한국실이 생겼다. 개관 250주년 기념 도록에는 그가 기부한 돈으로 구입한 조선 백자 달항아리가 실렸다.

"백자만큼 한국의 미를 대표하는 것이 없지요. 자연스럽고, 검박하고…. 유럽 사람들이 특히 좋아했어요."

대영박물관 한국실 큐레이터를 지낸 제인 포터(54)는 "내 최고 업적은 대영박물관에 달항아리를 전시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관람객들이'원더풀'하며 달항아리에 감탄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보람과 우리 문화재에 대한 자긍심을 새삼 느꼈어요. 그래서 아직 컬렉션의 끈을 못 놓나 봅니다. 허허. "

2003년 대영박물관에서 탕카를 전시한 '티베트의 유산'전은 개인에게 영광이기도 했지만 국제적으로 한광호 소장품이 탕카 최고의 컬렉션임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 전 세계에서 탕카를 연구하거나 관심있는 사람들은 화정박물관을 찾았다.

그에게 탕카는 40년 미술품 수집 인생의 결정체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탕카를 수집한 것은 아니다. 출발은 우리 문화 유산에 대한 작은 관심에서 비롯됐다.

"1953년인가 54년 무렵인데 일 때문에 알게 된 독일인이 겸재 정선의 그림을 사서 자기 나라로 가져가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외국인이 우리 문화재에 이토록 관심을 갖는가 하고. 그때부터 전통 미술품에 관심을 갖고 수집을 하기 시작했어요."

1960년대 초 화폐개혁 직후 5000원을 주고 도자기 한 점을 산 것이 컬렉션의 시작이었다.

한 명예이사장은 본래 미술품 수집과는 무관한 기업인 출신이다. 1923년 중국 하얼빈에서 태어나 1945년 광복과 함께 혈혈단신 귀국한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서울 종로의 화공약품 원료가게 점원으로 시작해 1958년 백수의약을 인수하고, 1972년에는 독일 제약회사 베링거잉겔하임의 한국지사를 설립하는 등 오늘의 기업을 일궜다. 대학(한양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그는 현재 한국삼공 회장, 서한화학 회장, 한국베링거잉겔하임 명예회장 등의 직함을 갖고 있다.

그는 수입의 대부분을 컬렉션에 쏟았다. 아시아의 고미술품이 주대상이었다. 그러다 일본의 고고학자인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1906~2002)의 조언을 듣고 1980년대부터 탕카 수집에 전력했다. 에가미 나미오는 기마민족이 일본 황실의 기원이라는 '기마민족정복왕조설'로 유명한 학자이자 탕카의 권위자이다.

"에가미 나미오 선생은 나에게 스승이기도 한데 내가 고미술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는 탕카를 권유했어요. 한국 고미술은 이미 많은 재력가들이 수집해놓은 상태이니 아직 아무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탕카를 주목하라는 거였죠. 탕카의 예술성도 말해주고요."

그 후 그는 탕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거금을 주고라도 작품을 모았다. 중국과 일본은 기본이고 주로 독일과 영국에서 수집을 많이 했다. 소더비나 크리스티 같은 유명 옥션을 통해 구매하기도 했다. 탕카를 구하려고 한 해에 세계를 여섯 바퀴나 돈 적도 있다. 그러는 과정에 에피소드도 적지 않다. 독일의 한 골동품 가게는 한 명예이사장이 '싹쓸이'하다시피 해 업종을 바꿨는가 하면, 밀수꾼으로 의심을 받아 수색이나 압류를 당한 일도 있다. 그렇게 해서 수집한 탕카는 현재 2500여 점에 이른다.

그밖의 소장품도 화려하다. 14세기부터 제작된 탕카,불상,불구,경전 등 티베트불교 예술품 2500여 점, 회화,서예,복식,도자,금속,칠기 등 중국 고미술품 4000여 점, 그리고 이정,강세황,허백련 등 한국 근현대 미술품 3000여 점 등 총 1만여 점에 달한다. '약항아리 전', '부채 전'을 열 만큼 아시아, 유럽의 이색 소장품도 다수 보유 중이다. 그는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탕카나 불교예술은 종교의 문제를 떠나 뛰어난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명예이사장은 1992년 한빛문화재단을 설립해 1만여 점이 넘는 수집품을 기증하고 영구보존토록 했다. "내가 소장한 미술품들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인류의 문화 유산을 향유하고 접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의 뜻은 1999년 화정박물관 개관으로 이어졌다. 한빛문화재단, 화정박물관이 소장한 고려범종, 이정의 '묵죽도', 청화백자접시 등 뛰어난 문화재는 대영박물관에 대여, 전시됐는가 하면 일본 등 외국 전시를 통해 한국의 우수한 문화유산을 해외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40여 년 동안 각종 문화사업을 후원하고, 학술활동을 지원한 공로로, 1999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명예시민훈장을 받았고, 2004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소)으로부터 명예문학작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메세나협의회는 2006년 그가 한국문화의 세계화에 기여하고 한국이 문화강국으로 성장하는 데 주춧돌이 된 것을 평가해 올해의 '메세나인상'을 수여했다.

팔순을 넘긴 한광호 명예이사장은 남은 열정을 박물관에 쏟겠다고 한다. "화정박물관이 좋은 전시와 기획행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보고 느끼고 나눌 수 있는 곳이 됐으면 합니다. 박물관을 더욱 발전시켜서 아시아 미술 전문 박물관으로 만들고 싶은 바람도 있고요."

그는 40여 년 전 평창동 일대에 박물관 부지로 8000여 평을 마련해두었는데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박물관을 신축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넉넉한 공간에서 더 많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을 텐데 관계기관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합니다."

현재 한빛문화재단을 대표하는 화정박물관은 한광호 명예이사장의 막내 딸인 한혜주(31) 관장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아버지는 박물관은 개인의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보는 것이니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좋은 전시와 기획행사에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한 관장은 좋은 작품을 수집하기 위해 아버지 한 명예이사장과 함께 해외에도 자주 나간다. 지난해 12월에는 홍콩에 갔지만 맘에 드는 작품을 구하진 못했다. 9월에는 일본에서 전시를 기획하고 있는 '춘화(春畵)' 전에 걸맞은 작품 몇 점을 구했다고 한다.

한 관장은 서울대 음대, 독일 뮌헨 국립음대 최고위 과정을 나와 현재 상명대, 평택대 등에 출강하는 하피스트이다. 전공은 박물관 업무와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오랫동안 아버지를 곁에서 보아온 경험과 일에 대한 열정으로 박물관을 이끌고 있다. 입구에서부터 3층까지 전시작을 하나하나 열심히 소개하는 한 관장의 모습에 아버지 한광호 명예이사장의 40년 문화 사랑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듯했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