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애도의 문화] 예술서 애도의 의의와 방법을 찾다

지난 2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을 때 명동성당 앞을 메웠던 인파의 기억도 채 가시지 않았다. 유난히 애도할 일이 잇따르는 해다. 노무현 전 대통령뿐 아니라 장영희 교수, 배우 여운계, 영화인 정승혜도 이달 유명을 달리했다.

서울 덕수궁과 봉화마을 분향소 앞 촛불과 꽃을 모아 쥔 행렬을 보고,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노 전 대통령의 이미지를 클릭하고 정치적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서점가의 베스트셀러가 된 장영희 교수의 마지막 수필집을 산다. 이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애도하고 있는 것일까. 왜,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 것일까.


‘악!’

저 비명소리가 들린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여자는 다만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저 비명의 모습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얼굴은 힘껏 일그러졌고, 가슴은 터질 듯 내밀었다. 사지를 꼼짝 못한다. 긴 침묵 속에서 여자의 삼베옷만 조명을 받아 희다. '삼일장'을 모티프 삼은 무용 공연 '삼일 밤 삼일 낮'의 시작이다.

무대 위의 '조문객'들이 춤을 춘다. 덩어리져 휘몰아치고, 때로는 각자 바닥을 뒹굴거나 몸통을 떨며 운다. 주체를 못하는 듯 움직임이 덜걱거린다. 그러면서도 기이하게 사뿐하다. 그래, 마음이 너무 크고 먹먹해 조심스럽게 감당해야 할 때가 있다. 사납게 움직이면 깨질까 싶어서다. 애통이란 감정에 형상이 있다면 바로 저 모습일 것이다.

그들 틈으로 몇 번 붉은 상여 꽃이 지나갔다.

“예기치 않게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의 일환이 되었네요.” 공연을 만든 NOW무용단의 손인영 감독이 말했다. '삼일 밤 삼일 낮'은 지난 25일부터 27일까지 무대에 올랐다. 한국의 전통 문화를 꾸준히 안무해온 손인영 감독이 "이렇게 급박한 문화와 척박한 삶 속에서는 느리고 깊게 파고드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기획한 공연이다.

“누구든 울어야 할 때는 좀 울어야죠. 예술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꼭 ‘재미’만 주어야 하는 건가. 웃게만 만들어야 하는 건가. 그것만이 즐거움은 아니잖아요. 울음도 감각에 즐거움을 줄 수 있어요.”

그 ‘즐거움’이 다시 삶의 동력이 된다. 슬픈 만큼 슬퍼한 인물들에게 감독은 ‘재기’의 계기를 준다. 머릿수건을 두르고 허리가 구부정한 할매가 나타나 슬그머니 술잔을 쥐어준다. 지쳤던 그들은 이내 취해 우는지 웃는지 구분도 안 가게 흥청거리다 화투를 치고 논다. “술 한 잔 들고(중략) 호박 같은 이 세상 웃으며 둥글둥글 삽시다”라는 가사의 신민요가 흘러나온다.

'삼일 밤 삼일 낮'은 애도가 왜 필요한가, 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애도는 죽은 자를 기리는 동시에 산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죽음을 겪은 고통을 삶 안으로 소화하는 일, 죽음과 삶을 잇고 그 ‘자연스러운’ 이음 속에서 다시 삶을 북돋는 일이다.

자신의 소설 ‘꽃 피는 고래’를 '애도의 소설'이라고 칭한 소설가 김형경은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애도는 대상을 잘 떠나보내고,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 말 그대로 슬퍼하기의 과정이예요. 애도의 과정이 사회적으로 보편화되어 있지 않아요. 애도의 대상이 환경이나 부모일 수도 있고 이데올로기나 지위, 권위일 수 있어요. 이런 것들을 잃으면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되죠.”

예술은 애도의 통로로 기능해 왔다. 영문학자 임철규는 ‘그리스 비극’의 머리말에서 “위대한 문학은 ‘애도’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애도는 “전쟁, 폭력, 억압으로 인해 삶이 산산이 부서진 채 죽어간 수많은 시대의 희생자, 삶이라는 허무의 바다에서 허망한 몸부림을 치다 한갓 포말처럼 사라져간 숱한 존재를 망각의 바다에서 끌어올려 그들이 남긴 ‘상처’를 어루만져주고,(중략) 그들의 고통과 죽음을 슬퍼하며 ‘장례’를 지내주는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애도 문학의 ‘전범’이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장길산’, ‘태백산맥’ 같은 문학 작품도 “애도의 노래”다.

조선 사대부들은 ‘죽은 자를 위한 산 자의 애가’인 만시(挽詩)를 썼다. 만시를 모은 책 ‘옛 사람들의 눈물’을 낸 한학자 전송열은 이 시들이 “자신의 슬픔을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깊이 농축된 한없는 슬픔을 느껴보라고 한다”고 말했다. 만시를 정리하면서 전송열 교수는 스스로도 “죽음에 초연해졌다”고 말했다. “시의 저자들은 죽음에 강하게 집착하지 않더군요. 자연과 하나가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보배를 다른 곳에 맡겨놓으면/ 하룻밤도 지체 않고 되찾는데/ 다행히 주인이 잊어버리는 바람에/ 오십삼 년 동안을 빌려 썼구려/ 자네는 일찍이 날 위해 말했었지/ "처세는 길 가는 나그네처럼 하다가/ 일 끝나면 곧바로 돌아가야 하오”(이용휴가 유서오의 죽음을 애도하며 적은 시) 같은 시가 대표적인 예다.

소설가 한창훈은 이문구의 ‘유자소전’을 애도 소설의 한 모범으로 일러주었다. 친구인 유재필의 죽음을 기려 쓴 소설이다. 착한 심성과 뚜렷한 소신으로 현대사를 살아낸 보통 사람의 인생을 “절절하면서도 건강하게 읽어내는 태도가 인상적”이다. 그렇게 “사회적으로 중요한 인물은 아니지만, 사실 이런 인물들이야말로 사회를 지탱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런 애도의 의미는 개개인의 슬픔을 삭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임철규의 애도관은 “혁명의식이 이상이 아닌 선조에 대한 기억에 의해 자라나는 것”이라고 생각한 벤야민의 역사관에 기초한 것이다. 한창훈은 말했다. “어떤 삶이든 미완성입니다. 죽음을 기림으로써 그 미완성의 상태를 이어 진화시켜 나갈 수 있겠죠. 노무현 전 대통령도 기존 정치권의 ‘권위’를 깨뜨리는 시도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사라진 자리에 진화된, 강하고 큰 희망이 솟아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질문자가 내게 빼놓지 않고 하는 질문이 있다. 신체장애, 암 투병 등이 극복하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이다. 그럴 때마다 난 참으로 난감하다. 그래서 그냥 본능의 힘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의지와 노력으로 가질 수 있는 힘이 아니라 내 안에서 절로 생기는 내공의 힘, 세상에서 제일 멋진 축복이라고, 난 그렇게 희망을 아주 크게 떠들었다. 여러분이여 희망을 가져라,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장영희 교수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의 에필로그 ‘희망을 너무 크게 말했나’의 일부다. 지금 이 책이 수두룩하게 읽히는 것은 다만 고인에 대한 추억과 미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의 편집자인 ‘샘터’의 이미현 과장의 말처럼 “그 긍정적인 삶의 태도와 솔직함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스러워 함으로써 원기를 회복하는 일, 죽음을 기림으로써 죽음에 대한 집착에서 놓여 나는 일, 삶의 귀중함을 깨치는 일, 나아가 개별적 삶을 역사적 맥락에서 성찰하는 일, 그리하여 종내 슬픔을 딛고 희망을 찾는 일이 애도다. 애도의 예술은 덕수궁과 봉화마을을 찾은 저 많은 사람들의 묵묵하고 정성스러운 발걸음의 뜻이 하나로만 해석될 수는 없다는 것, 스스로들 그 풍부한 뜻을 헤아릴 만큼 헤아릴 때까지 충분히, 열심히 애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