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갤러리] <Unrealized Projects 미완성의 건축> 전

고기웅, 도면으로 만들어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애초에 '미완성'을 내세운 건축이란, 직무유기다. 대규모의 물적 인적 자본이 투입되어야만 하고 복합적인 제도적 단계들을 거쳐야만 하는 실현 과정의 특성상, 실용성과 합리성은 건축의 제1법칙인 것이다.

공공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도 건축가들의 책임감을 부추긴다.

건축의 존재감은 공공 장소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의미에서뿐 아니라, 적어도 수십 년 동안 불특정 다수의 시야와 동선, 생활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예견 때문에 묵직하다.

그래서 건축 아이디어와 도면에는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가장 편리한 방향은 세속적 자본주의의 논리에 호소하는 것이다.

빠르게 완성되어 인간과 사회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판국에 감히 '미완성'이라 규정하고 '미완성'을 지향하는 건축이라니!

이승진 공구리공방
이 직무유기의 건축들이 지난 5일부터 서울 이태원 공간해밀톤에 자리를 잡았다. < Unrealized Projects 미완성의 건축> 전이다. 건축가와 미술작가, 디자이너들이 효용과는 거리가 먼 건축을 선보인다.

채 형태도 갖추어지지 않은 건축물 드로잉이 있는가 하면 현실에서는 지어질 수 없는 건축물 모형, 심지어 현장에서 주워 온 폐자재까지 '설치'해 놓았다.

고기웅 건축가는 실현하지 못한 도면을 투명판에 그린 후, 빛을 쏘고 위아래로 움직이게 함으로써 환상적 공간을 만들어냈다.(<도면으로 만들어진>) 완성된 건축의 견고하고 고정된 물적 특성의 정반대의 지점에서 그의 작업은 기계화된 건축 공정에 질식되어 버린 건축의 본질을 일깨운다.

즉, 건축은 건축물 자체뿐 아니라 그것이 발생시킬 새로운 습관과 움직임, 아름다움과 상상을 짓는 것임을. 도면은 그 꿈의 모티프이자 해석이다.

건축가 김호민과 유승우가 모인 poly.m.u.r은 전시장 자체를 대지로 가정해 건축물을 구상했다.(< Space Invaders>) 여기에는 혼종적이고 1인 가구가 많은 이태원의 지역적 맥락이 불려 들어온다. 건축물은 혼자 살 수 있는 방들의 집합이고, 각각의 방은 다른 색으로 빛난다. 이 색들은 이를테면, 방 안 상황의 실시간 중계판이다.

양성구, Accidental Drawing
거주자의 부재 여부, 행동 패턴 등에 반응해 변한다. 그렇게 외따로 일어나는 일들의 하모니로서의 건축물 외관은, 이태원의 삶에 대한 상징이자 시각적 성찰이 된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외로운 삶들에 위로가 된다. 저 아름다운 빛의 유동 속에 몸을 누이고 어울릴 수 있다는 사실이 밤마다 인기척 없는 방문을 열어야 하는 개인들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지 않을까.

지어지는 것이 건축의 끝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건축들이 솟아났다가 파괴되었고 소란 속에서 변형되고, 중단되거나 지속되고 있다. 프랑스 건축가인 Simon Bodvic이 철거된 건축물에서 나온 먼지를 채집해 만든 도형()들은 그 흐름, 시작과 끝을 환기시키는 잔상이다.

네덜란드 작가 Sandro Setola의 드로잉 애니메이션 < Form follows Life>에서 건축물은 아예 생명체처럼 표현된다. 그것은 알을 깨고 나와 여러 번의 변태를 거쳐 다시 알로 돌아간다. 그 와중에 끊임없이 구부러지고 휘둘리고 약동하며 춤추는 건축물의 테두리는 건축과 환경 간 유기적 관계를 인식하게 한다.

편리한 논리를 거부함으로써 건축에 대한 새로운, 질문으로서의 설득력을 표현하는 이 전시, 혹은 풍경은 28일까지 펼쳐진다. 031-420-1863.


poly.m.ur, Space Invaders
정규연, Tripoli
장유정, Untitled
Sandro Setola, Form follows Life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