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갤러리의 재발견] 수집·소장서 전시 기획·작가 지원으로 공공적 성격 강해져일주&선화갤러리 등 오픈 기업 문화예술 마케팅 가속화

지난달 15일 문을 연 태광그룹 일주&선화갤러리의 관객 수가 보름 만에 5000명을 넘었다.

하루에 300여 명이 찾은 셈이다. 개관전으로 마련한 <한국미술, 근대에서 길찾기-추사에서 박수근까지> 전 때문이다.

추사 김정희부터 흥선대원군, 김환기와 박수근까지 100여 명 작가의 작품 150여 점을 모은 전시다.

기업이 운영하는 미술 공간이 대중화되고 있다. 수가 많아진데다 그 내용도 관객의 눈에 맞추어 기획되고 있다. 전시 테마가 다양해졌고 교육, 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도 여럿이다. 수집품을 전시하는 것을 넘어, 현대 미술의 흐름에 반응하려는 모습이다.

이는 기업의 문화예술 마케팅이 일반화하고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가속화한 현상이다. 미술이 관객과 만나는 일상적 통로가 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꼭 미술 문화의 발전으로 만은 해석할 수는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양이 질을 담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주&선화갤러리
그래서 점검이 필요하다. 기업의 미술 공간이 한국 미술에 어떤 영향을 미쳐 왔고,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 짚어 봤다.

수집, 소장보다 기획과 지원으로

<한국미술, 근대에서 길찾기>전은 태광그룹이 올해 초 설립한 선화예술문화재단의 첫 프로젝트다. 일주&선화갤러리와 선화예술문화재단의 운영 방향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인 셈이다. 눈에 띄는 점은 전시품이 기업 소장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 수집가에게서 대여한 것들이다. 미술 지원 사업의 방점이 미술품 수집보다는 전시 기획에 찍힐 것임을 예고한다.

태광그룹만의 행보가 아니다. 최근 기업 미술관과 갤러리 중 상당수가 전시 기획과 작가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면 OCI그룹의 송암문화재단은 회장이 소장한 고미술품을 전시하던 서울 수송동의 미술관을 7월에 현대미술관으로 재개관한 후, 지난달 선정한 신진작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줄 예정이다.

로얄토토의 로얄갤러리, 안국약품의 갤러리AG, 금호건설의 크링, 63빌딩의 스카이아트미술관, 롯데백화점의 애비뉴엘갤러리 등 최근 2~3년 간 문을 연 기업 미술 공간 대부분이 전시를 목적으로 한다.

63스카이아트 미술관
상을 제정하거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업도 여럿이다. 2000년부터 시작한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은 서도호, 구정아, 장영혜, 김범, 박이소, 박찬경 등을 수상자로 선정하며 한국 미술의 이슈 메이커로 자리잡았다. 2006년 문을 연 에르메스 코리아의 플래그십 스토어 내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는 이 상의 후보자와 수상자의 전시가 열린다.

지난 8일 서울 서소문 대한항공 사옥에 사진 전문 갤러리 일우스페이스를 마련한 한진그룹 일우재단은 이에 앞서 작년 하반기에 일우사진상을 만들었다. '올해의 주목할 만한 작가'로 뽑힌 두 명의 수상자가 일우스페이스에서 전시를 열 예정이다.

대유문화재단의 이 2000년부터, 금호미술관이 2005년부터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애경그룹의 몽인아트센터는 2007년 창업주의 집을 창작스튜디오로 개방했다.

이런 방향 전환의 의미는 무엇일까. 최금수 미술평론가는 "기업의 미술 지원 사업의 공공적 성격이 강해졌다"고 해석했다. 수집과 소장 위주로 운영되는 미술관은 중견 이상 세대 작가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지고, 따라서 권위적인 공간이 되기 쉽다. 작가와 관객 모두에게 문턱이 높은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기업 미술 공간들은 "대안공간의 역할을 일부 하고 있을 정도로" 젊은 작가들과 동시대 흐름에 열려 있다.

이는 문화예술 마케팅 전략의 측면에서도 큰 효용이 있다. 대중성을 담보할 수 있고, 젊은 작가들의 신선한 이미지를 기업의 이미지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우(一宇)스페이스 갤러리
유행의 부작용

하지만 이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면서 부작용도 생겼다. 미술에 대한 이해, 미술 공간 운영에 필요한 인력과 프로그램 없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수집과 아카이브 기능이 없는 전시 공간에 '미술관'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많다. 정준모 미술평론가는 이에 대해 "운영하는 측이 미술관과 갤러리의 차이도 모른다는 뜻이다.

문화예술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없는 상태에서 문화예술 마케팅이 가능할까"라고 되물었다. 그러다 보니 자체적으로 안정된 큐레이팅을 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일관성과 깊이를 갖춘 전시를 기획하기 어렵다. 기업 미술 공간이 그 양에 비해 질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하지만 기업의 이름을 내건 만큼 그 존재 자체가 미술계에 영향을 미친다. 젊은 작가에게 이런 공간에서의 전시는 이력이 되고, 일반인에게는 미술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정준모 평론가는 "제대로 운영되지 않아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박영택 경기대 예술대학 미술경영전공 교수는 "기업 미술 공간을 통해 작가들의 기회와 미술 관련 프로그램이 많아지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그 의의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가진 곳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각각의 차별성이 없다. 예를 들어 최근 부쩍 늘어난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경우, 국공립미술관이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것과 기업 재단이 운영하는 것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샘표스페이스
그 결과 다양한 작가들에게 고루 기회가 돌아가기보다 몇몇 작가들이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전전하며 "경력을 쌓는" 현상이 나타난다. 미술 공간마다 자신만의 지원 대상 선정 기준이 없다 보니, 다른 곳에서 지원을 받은 경력이 크게 고려된다. 즉 어떤 작가가 한 기업에서 지원을 받으면, 그것이 다른 기업의 지원을 받는 데도 유리하게 작용한다.

사업 혜택이 특정 작가들에게 몰리게 되는 것이다. 홍경한 미술평론가는 "현대미술은 다양성이 생명인데 지원 작가가 편향되는 것은 문제다. 지원 사업의 성격 자체가 다양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의 선정 결과를 참조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차별화되지 않는 지원 사업은 마케팅에도 도움이 안 된다. 박영택 교수는 "이들 공간은 프로그램을 왜 운영해야 하는지, 그것이 미술 공간의 성격이나 기업의 이미지에 맞는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홍경한 평론가도 "유행하는 지원 사업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다른 더 실질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국공립미술관과 영리갤러리 사이의 역동성

자체적인 기획 역량이 없는 경우, 기존 미술계와 협업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1997년부터 운영된 신한은행의 신한갤러리의 경우 매년 미술평론가들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해 전시를 공모하고 있다. 2007년까지는 최금수, 강성원 미술평론가가, 그 이후에는 박영택 교수와 하계훈 단국대 대중문화예술대학원 교수가 심사를 맡고 있다.

영은미술관
김남은 큐레이터는 "선정 기준은 상업적인 작가보다는 앞으로 꾸준히 활동할 잠재력을 지닌 신진작가의 전시"라고 말했다. 미술평론가들의 안목을 통한 결과, 신한갤러리의 전시 내용은 역동적이다. 예를 들어 지난 5일부터 진행되고 있는 <당신의 가치를 생각하는 고품격 프리미엄> 전은 더 많은 이윤을 향한 도시 재개발이 정말 삶과 행복을 보장해주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내용이다.

언뜻 기업 미술 공간과 어울리지 않지만, 역으로 신한갤러리는 이런 전시까지 열 수 있는 곳이라는 주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2008년에 문을 연 안국약품의 갤러리AG는 작년 한 해 동안 한국큐레이터협회와 공동으로 신진작가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현주 큐레이터는 "공정성과 공공성을 갖추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몇몇 기업 미술 공간은 문화예술 인프라가 없는 지역에 위치함으로써 사회 공헌 사업으로서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이 대표적인 예다. 2000년 개관한 이곳은 서울과 달리 미술을 접하기가 쉽지 않은 지역 미술관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주로 현대미술 기획전을 열며 광주 미술협회와도 교류를 유지하고 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 입주 작가들은 지역 주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관객과 직접 만난다. 최안나 큐레이터는 "미술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지역 주민들에게 문화예술을 인식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샘표식품의 경기도 이천 공장 내 역시 지역 문화에 기여하고 있다. 특히 개관 초기인 2006년 이곳에서 진행된 '공장 여인들의 명함 만들기'는 공공적 성격이 강한 미술 프로젝트로 평가 받았다. 공장의 여성 직원들의 살아온 내력을 정리하고 명함을 제작한 이 프로젝트는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의 여성 노동자의 역할을 재조명한 것이었다.

올해에는 공장 직원은 물론, 이천 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전시를 열 예정이다. KT&G 상상마당 내 상상갤러리의 경우, 서울 홍대 앞의 자생적 미술계와의 네트워킹을 통해 미술 문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금 열리고 있는 '서교육십2010:상상의 아카이브'는 미술 기획자와 평론가 60명이 추천한 작가 60명의 작품을 전시하는 지원 프로그램. 올해 3회째다. 연말에는 매년 주변 미술 공간들과 함께 젊은 작가의 작품을 위주로 한 아트페어인 '서교난장'을 연다. 미술 관련 강연회와 세미나도 활발하게 진행한다.

문화예술에 대한 장기적 안목 필요

일부 기업 미술관들은 세금 포탈이나 비자금 은닉, 불법적 상속 수단으로 유용되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지만 또 많은 기업 미술 공간들은 국공립미술관과 영리 목적 갤러리 사이에서 긴장과 역동성을 만들어 왔다. 지적할 부분은 지적하고 독려할 부분은 독려해야 할 것이다.

특히 최근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기업 미술 공간들에 대해서는 마케팅의 목적이 문화예술의 발전 방향과 적절히 만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정준모 평론가는 "문화예술의 본령은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라며 떠들썩한 미술 지원 사업을 경계했다.

최병식 교수
그는 성보문화재단의 고미술 전문 미술관인 호림박물관과 한빛문화재단의 동양미술 전문 미술관인 화정박물관 등 내실 있는 곳들을 예로 들며 기업들이 "미술사를 함께 만들어 나간다"는 사명감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홍경한 평론가도 "아무리 좋은 지원 방안도 지속되지 않으면 미술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멀리 보고 함께 가자는 뜻이다.

흥국생명 홍보실 김철균 차장 인터뷰
"대중의 문화예술 향유 기회를 확대할 것"

성황리에 개관전을 열고 있는 일주&선화갤러리와 선화예술문화재단의 취지에 대해 흥국생명 홍보실에서 답변을 보내 왔다.

선화예술문화재단의 운영 방향은.
-대중의 문화예술 향유 및 참여를 확대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일주&선화갤러리를 연 것도 그런 맥락이다. 또 작가들의 창작 활동을 지원해 저변 확대에 기여할 것이다.

첫 전시로 <한국미술, 근대에서 길찾기>를 연 이유는.
-대부분이 마네, 모네, 고갱, 고흐는 알아도 정학교, 양기훈, 지운영은 모른다. 이들은 한국 현대 미술의 토대가 된 작가들이다. 한국 미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취지로 이 주제를 선정했다.

작가 지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별도의 프로그램은 없으며 열정과 실력을 갖춘 작가들이 재단에 연락하면 협의를 통해 지원할 수 있다. 신진작가 위주로 지원할 계획이다.

일주&선화갤러리는 누구를 위한 공간인가.
-대중을 위한 공간이다. 그것이 미술 문화 저변을 넓히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경희대학교 미술대학 인터뷰
"기업의 미술 기증, 기부 문화 활성화되어야"

미술의 안과 밖, 미술의 철학과 제도를 넘나들며 연구해 온 미술평론가 에게 기업 미술 공간의 영향과 나아갈 길을 물었다.

국내 기업 미술 공간의 현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런 공간들은 자본이 뒷받침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기도 하고 우려할 점도 있다. 체계 잡힌 갤러리 운영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기대할 만하지만, 미술계에 자본의 영향력이 커지기 때문에 신중하게 봐야 할 현상이다. 국내 미술계는 역사가 깊지 않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어떻게 운영되어야 할까.
-미술 공간이 건강하게 운영되려면 문화재단 설립을 통해 소유권과 운영권이 분리되어야 한다. 그리고 전시만을 목적으로 하는 갤러리에 만족하기보다는 장기적으로는 자체 소장품을 갖춘 미술관을 지향했으면 한다. 그리고 국공립미술관 등 미술계에 기부, 기증하는 문화가 활성화된다면 더욱 좋을 것 같다.

높게 평가하는 국내 사례가 있나.
-과 코리아나미술관이다. 둘 모두 좋은 전시를 활발하게 하고 있다. 의지가 없으면 못하는 일이다.

참고할 만한 해외 사례를 들어준다면.
-서구의 기부, 기증 문화를 참고했으면 좋겠다. 록펠러 가문이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기부한 사례,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 회장이 1000여 점의 컬렉션을 갖춘 사례 등을 보면 부럽다. 기업가 헨리 프릭과 솔로몬 구겐하임이 만든 미술관인 프릭컬렉션과 구겐하임 미술관도 모범적인 사례다.



박우진 기자 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