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문화로 말하다] 총론반공 이데올로기 대신 분단 극복, 평화, 화해로 무게중심 이동

'살과의 전쟁', '걸그룹 전쟁', '스마트폰 전쟁', '축구 전쟁'…. 온갖 전쟁이 남발되는 오늘날, 전쟁은 '치열한 투쟁' 정도로 순화되어 쓰이고 있다.

그것을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쟁은 '개인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험난한 과정'이거나, '이익집단 간의 첨예한 경쟁'의 동의어로 활용된다.

하지만 그 참상을 겪은 사람들에게 전쟁은 여전히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처참한 사건이다. 60년 전의 트라우마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이들에게 전쟁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할 것이다.

천안함 사태에서 시작된 전쟁 논란이 화두가 됐던 이번 선거가 그것을 방증한다. 선거 때만 되면 종종 북풍을 몰아 유리한 고지를 점했던 파란색 물결은 이번에는 붉은색 미래의 두려움 앞에 힘을 못 썼다.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이 아직까지 유효한 것은 전쟁이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동안 문화예술계가 꾸준하게 조명하고 있는 '전쟁'은 최근 그 옛날의 국가 간 전쟁에서 개인의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한국전쟁을 다룬 작품들은 민족성과 이데올로기에 무게를 둔 거대담론이 지배적이었다. 문학에서는 특히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이어지는 역사적 격변기에 높은 평가를 받은 전상국의 <아베의 가족>이나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문열의 <영웅시대> 등이 분단문학이 다루고 있는 전쟁의 폭력성과 분단의 비극 같은 주제들을 진지하게 성찰했다.

하지만 1980년대 등장한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 같은 작품에서는 전쟁과 분단으로 상처받고 손상된 삶을 보내야 했던 한 인간의 개인사적 고백을 다뤘다. 이 작품은 6.25 전쟁으로 인한 민족 분단뿐만 아니라 세대 간의 분단에도 관심을 보인다. 전쟁을 겪은 세대와 겪지 않은 세대 간의 차이를 드러내며, 작가는 개인적 비극의 출처로 전쟁을 재조명한다.

개인에게 고스란히 분담된 전쟁의 상처는 역사적 비극의 유가족들에게 가장 큰 상흔을 남겼다. 20세기의 다른 어떤 전쟁보다 민간인 사망률이 높았던 한국전쟁은 최소 200만 명 이상의 추정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얼마 전 오랜 기다림 끝에 4년 만에 개봉한 영화 <작은 연못>은 그중에서도 빙산의 일각이었던 노근리 사건을 다뤘다.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남은 사람들은 반 세기가 지난 지금도 잔혹한 행동을 목격한 트라우마와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는 그날의 진실을 묵묵히 지켜보며 살아남은 자들과 전쟁의 아픔을 공유하자고 제안한다.

전쟁과 분단의 사생아인 '이산' 문제도 사회·문화적으로 꾸준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수백만의 가족들이 전쟁으로 헤어져 아직도 만나지 못하고 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로 시작하는 패티김의 노래는 1983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현장을 눈물로 가리게 했다. 낯섦이 조금씩 익숙해질 때 즈음엔 또 다시 기약 없는 이별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에 전 국민은 울고 또 울었다.

15일부터 한국영상자료원이 '한국영화와 6.25'를 주제로 여는 시네마테크 특별전에도 이산가족의 문제를 담은 작품이 있다. 전쟁 이후 이산가족의 비극적인 운명을 멜로드라마적 감성으로 풀고 있는 김기덕 감독의 <남과 북>(1965)이 그것이다.

훗날(1984) 김기덕 감독이 KBS의 이산가족 찾기 분위기에 편승해 이 작품을 리메이크할 정도로 시대의 감성을 잘 묘사하고 있다. 2005년 개봉작인 <간 큰 가족>은 실향민의 아픔과 통일에의 염원을 웃음으로 승화시켜 예전과 달라진 이산가족에 대한 인식을 그려냈다.

1990년대 이후의 한반도는 표면적으로는 전쟁과 분단의 아픔에서 치유되어가는 듯했지만 냉전시대의 잔재는 남아 있었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부르는 미군이 여전히 한국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 이러한 냉전 논리의 무장으로 연장된 군사 체제와 독재 정권의 사회에서 남성들은 전쟁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재생산됐다. 영화 <꽃잎>이나 <박하사탕> 등은 그런 남성 정체성의 트라우마를 다루고 있다.

지난해 옛 국군기무사사령부(기무사) 터에서 열린 페스티벌 '플랫폼 인 기무사'전은 그런 냉전과 군사독재 시대의 종언을 선언하는 전복적인 이벤트로 의미가 있었다. 군사문화와 권위주의 등 전쟁에서 이어진 남성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상징하던 건물이 여성 작가들의 섬세한 손길을 거쳐 매력적인 공간으로 변모한 것은 시대와의 화해를 의미하기도 했다.

반 세기 전, 전쟁 소재 작품들은 적대와 갈등을 표상하는 것이었지만, 점차 상호화해와 공존을 향해 발전하고 있다. 이에 따라 문화와 예술에 담긴 전쟁 담론도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다. 그것은 적과 나, 반공 이데올로기 대신 분단 극복과 평화, 화해 등의 주제로 전쟁에 대한 새로운 역사를 제시하고 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