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 먼로의 유혹] 미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앤디 워홀의 주요 테마로 모티프 제공김동유 '이중 그림', 이태랑 개인전, <마릴린 먼로>전 통해 다양한 변주
전자에 방점을 찍는 작가들이 마릴린 먼로를 다루는 방식에는 미국의 영향 하에 형성된 한국사회의 문화적 풍토에 대한 인식이 녹아 있고, 후자에 방점을 찍는 작가들은 앤디 워홀 식의 마릴린 먼로 재현 방식을 통해 시장과 미술의 관계를 드러낸다.
이 둘은 종종 경계 없이 섞이며, 그 와중에 마릴린 먼로라는 클리셰(cliché, 상투적 표현)는 모든 것을 말하려고 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미국산 소비대중문화로서의 마릴린 먼로
한국의 미술가들이 마릴린 먼로를 모티프로 삼는 의미는 예를 들면, 미국 미술가들이 마릴린 먼로를 다루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마릴린 먼로를 수용한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릴린 먼로가 스타로 떠오른 1950년대는 미국의 소비 대중문화가 폭발적으로 확산된 시기였지만, 한국은 전쟁 상황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냉전 체제 하에서 한국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의 전 영역에 미국식 제도와 가치관을 받아들였지만 이는 빠른 근대화의 바탕인 동시에,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보가 일으킨 분쟁과 갈등에 한국사회가 휩쓸리게 만들었다. 나아가 한국사회의 정체성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식민지 경험이 있는 사회에서처럼, 한국 문화 속 미국은 매혹의 대상이면서도 긴장 관계에 있는 아이러니한 대상이다. 이런 애증관계가 한국 미술 속 마릴린 먼로들에게 전이되어 있는 것 같다.
김동유 작가의 작업을 예로 들 수 있다. 한 인물의 초상화를 빽빽하게 모아 다른 인물의 초상화를 만드는 이른바 '이중그림' 연작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 마릴린 먼로다. 먼로의 얼굴이 모여 마오쩌둥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얼굴을 구성하기도 하고, 먼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아인슈타인과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얼굴이 읽히는 경우도 있다.
냉전 체제를 이끈 세계의 정치적 지도자들과 마릴린 먼로의 중첩은 무엇을 의미할까. 지난 세대 거대한 이데올로기 싸움과 제국주의적으로 침투한 미국 대중문화가 한국사회의 정신적, 미적 바탕이라는 작가의 성찰이 아닐까.
마릴린 먼로, 혹은 한국미술의 아이러니
몇몇 작가들이 마릴린 먼로라는 대상을 대단히 '수공적'으로 작업하는 것은 마릴린 먼로의 아이러니에 대한 정면돌파처럼 보인다. 김동유 작가는 100호에서 150호에 달하는 대형 작품을 일일이 손으로 그린다.
대형 알루미늄판에 미세한 선을 긁어 작업하는 강형구 작가 역시 종종 마릴린 먼로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이 작품들은 작가의 노동력이 마릴린 먼로 모티프의 정형화된 이미지와 겨룬다는 인상이 강하다.
젊은 작가들의 경우, 마릴린 먼로와의 '싸움'은 곧 앤디 워홀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알려져 있다시피 앤디 워홀이 마릴린 먼로를 뮤즈 삼아 제작한 일련의 작품들은 팝아트의 대표작이다. 자기 복제를 기본으로 하는 대중문화 콘텐츠이자 아이콘인 마릴린 먼로를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반복 재현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 아래 문화의 생산-재생산-소비 메커니즘을 작업에 녹여냈다. 이를테면 미술시장, 혹은 시장미술의 자기 패러디인 셈이다.
작년 갤러리고도에서 열린 <마릴린 먼로> 전에는 앤디 워홀처럼 마릴린 먼로를 다양하게 변주한 젊은 작가들의 작업이 전시되었다. 김상우 작가는 먼로의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양 옆으로 늘렸고 김진경, 곽대철 작가는 나름의 방식으로 먼로를 '망가뜨림'으로써 사회의 미적 기준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김인철, 장영진 작가는 먼로의 도식화를 새로운 매체와 재료로 재구성했다.
박성철 작가와 이영진 작가는 먼로가 죽어서도 영원히 남긴 스타일인 금발 머리와 지하철 환풍구 바람에 뒤집어진 치마에 주목했고, 정영한 작가는 먼로와 향수 '샤넬 넘버 5'의 도상에 <우리 시대 신>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작품들에는 팝아트의 주연 배우인 마릴린 먼로에 대한 욕망과 갈등이 팽팽하다.
클리셰의 문화적 가치
지난 23일부터 갤러리고도에서 개인전
앤디 워홀을 이태량 작가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때, 이는 작가가 처한 어떤 상황에 대한 인식처럼 보인다. 욕망하는 작가와 욕망의 대상 간 반전된 관계는 혹시 미술과 시장 간 관계를 은유하는 것이 아닐까. 몇몇 작품의 배경에는 작가가 벌거벗은 채 폐허에 누워 있는 흑백 사진이 프린트되어 있다.
이번 전시의 의미는 이태량 작가가 1995년 이후 화두로 삼고 있는 '존재와 사고'라는 테마의 맥락에 놓았을 때 더 뚜렷해진다. 주로 추상적 모티프로 개념적 작업을 해왔던 작가가 앤디 워홀과 마릴린 먼로를 캐스팅한 주된 이유는 "관객에게 친절하기 위해서"다.
작업이 관객과 멀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던 터라, 접근도를 높이기 위해 선택한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클리셰에 문화적 가치가 있다면, 누구라도 자신을 쉽게 비추어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정작 그 자체는 너무 많이 복제되고 헤프게 떠돌아다닌 바람에 텅빈 껍데기 기호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많은 젊은 한국 작가들이 앤디 워홀과 마릴린 먼로를 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태량 작가가 대답했다. "현대의 현실을 살고 있는 작가들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