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함의 재정의] '착한' 강요하는 현대사회 본 뜻 굴절, 다양한 변주로 시대 반영

30명의 싱글 여성이 한 명의 남성을 두고 선택과 동시에 선택을 당하는, 케이블 방송의 인기 소개팅 프로그램이 있다.

어느 날인가, 가죽 재킷을 입고 냉소적인 미소를 날리는 '나쁜 남자' 컨셉의 소개팅 남이 등장했다. 스튜디오는 그의 등장을 환호했다.

많은 싱글녀들이 나쁜 남자라 불리던 그의 선택을 받기 위해 마지막까지 애썼지만 그 남자는 이상형이 없다며 그녀들을 외면했다. 인기 있는 여성 아이돌 그룹의 한 멤버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대놓고 자신을 '나쁜 여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드라마, 가요, 예능 프로그램 할 것 없이 나쁜 남자 혹은 나쁜 여자의 등장이 익숙한 요즘이다. 딱히 그들이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들은 자칭 혹은 타칭 나쁜 남자, 나쁜 여자를 흡족해하며 받아들이고 있다.

요즘의 대중매체가 말하는 '나쁜'이 많은 이들에겐 '매력적인',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의 또 다른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극단 여행자의 '서울의 착한 여자'
그렇다면 '착한' 남자 혹은 여자는 어떨까. 지금 누군가에게 '착하다'라는 말을 해보면, 요즘 '착하다'라는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금세 알 수 있다. 상대방이 당장 불쾌하다는 표현을 할 수도 있고,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한참 그 말을 곱씹어 볼 수도 있다. 썩 좋은 반응은 아니라는 말이다.

'착하다'의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면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라고 나온다. 사람의 내적 성품과 외적인 태도를 표현하는 단어다. 사전적으로 좋은 뜻이지만 내면보다는 태도에 초점이 맞추어진 현실의 쓰임에선 그렇지 않다.

언제부터인가, '착한 사람'이란 표현에는 '존재감 없는 사람', '어수룩한 사람', '딱히 특징이 없는 사람', '손해 보며 사는 사람', '순종적인 사람', '의존적인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이란 멍에마저 덧씌워졌다. '착한 사람' 대접이 불쾌하고 고민스러울 법도 하다. 하지만 이런 고민이 비단 소수만의 것은 아니다.

일본 사람을 표현하는 단어로,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가 있다. '혼네'는 본심, 내면의 생각과 감정을 말하고, '다테마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 표정을 말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일본 사람과 친해지기 어렵다고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무한경쟁 시대에서 자신의 본 마음을 숨기고 친절하고 착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은 더 이상 그들만의 문화가 아니다.

가정과 학교, 직장에서 '말 잘 듣는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을 들으며 자신의 태도를 둥글게 만들어온 이들은 착한 태도를 끊임없이 내면화하거나 마치 이것을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세상을 살아가면서 분명 어느 정도의 매너는 필요하지만 자신의 욕망과 달리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지어낸' 태도로 시종일관 살아간다는 건 일종의 '연기'이자,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모하는 '감정 노동'이다.

양의 탈을 쓴 어린아이의 입은 활짝 웃고 있지만 눈은 웃지 않는다. 눈망울엔 그렁그렁한 눈물마저 맺혀 있다. 억지 웃음은 어쩐지 표정을 더 과장되게 만든다. 김지희 작가가 바라본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생존을 위해 '착한 태도'를 선택한 사람들은 온순하고 착한 이미지를 대변하는 양이나 토끼의 탈을 쓰고 있다.

자신의 욕망과 외부에 내보이는 착한 태도 간의 벌어진 균열은 메마른 눈망울에 맺힌 눈물로 짐작해볼 뿐이다.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내가 웃어도 웃는 게 아닌' 현실이다.

착한 태도를 요구하는 사회, 하지만 착한 태도가 그다지 매력적으로 비치지 않는 사회. 그래서 많은 이들이 '착하다'라는 평가에서 멀어지려고 하는 요즘, 아이러니하게도 '착한'이란 단어는 사람이 아닌 대상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착한 몸매, 착한 소비, 착한 가격, 착한 여행, 착한 자본주의 심지어 착한 자동차, 착한 밥상, 착한 요리까지. 여자의 몸매에 대한 평가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착한 00'은 이제 사람에게만 한정되던 것에서 벗어나 어디에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수많은 말과 글에서 사용되며 다양한 의미로 파생되고 있다.

이전과는 다른 '착하다'에 대한 정의와 쓰임새,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재정의되고 있는가.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