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부르주아, 트레이시 에민 두 여성 작가 작품으로 표현

루이스 부르주아의 '무제'
"내가 왜 패션 디자인을 전공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를 입버릇처럼 되뇌던 가 초등학교 시절 수예부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건 최근의 일이었다.

남학생은 한 명도 없는 수예부 교실을 빼곡하게 채운 여자 아이들에게 최고 인기는 단연 스킬 자수였다. 모든 수예 중 가장 단순한 형태의 스킬 자수는 그야말로 별다른 스킬이 필요 없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털실을 전용 바늘에 끼워 모티프가 그려진 그물 망 위에 대고 한두 번 위 아래로 움직이기만 하면 한 땀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간단한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둘리도 완성되고 버섯도 나오고 집도 그려졌다.

아무 의미 없는 행위의 반복은 초등학생 50명을 외부의 힘 없이 집단 정적에 빠뜨릴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 중독성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때만큼은 의식이 문을 닫고 팔, 다리가 몸의 주인이었다.

어린 아이들은 난생 처음 경험하는 노동의 쾌감에 빠져 속절없이 허우적댔다. 수업 종이 울리고 비로소 마법에서 깨어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그것은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애들이 만들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적요였다. 그때 우리를 사로 잡았던 것이 단순노동이며 사회적으로 그다지 높은 값을 쳐주지 않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훨씬 후였다.

트레이시 에민의 'Contamination of the Soul'
"고단한 마음을 쉬어가는 쉼표 한 땀"

단순노동은 단순할수록 제 맛이다. 그 마력은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강력하게 발휘된다. 자수나 뜨개질은 일정 수준의 재주와 기획력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단순성이 떨어지고, 스킬은 비실용적인 결과물을 낸다는 점에서(기껏해야 전화기 깔개로 쓰이는) 현실과 동떨어진다.

이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 바느질이다. 상념에서 멀어지게 할 만큼 손의 움직임을 필요로 하며, 그렇게 손을 놀려 만들어진 결과물은 입고 걸치고 덮을 수 있어 여전히 우리가 땅에 발을 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리움 미술관 앞마당에 설치된 거대한 청동 거미 조각 '마망'으로 유명한 루이스 부르주아는 어린 시절 친언니처럼 지냈던 가정교사가 아버지와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가 그걸 알면서도 침묵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폭력적이고 난봉꾼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은 남자라는 종족 전반으로 확대돼 강렬하고 끔찍한 작품들로 표현된다. 고환을 양쪽으로 쪼갠 듯한 모양의 조각, 토막 난 남자 성기, 임산부의 몸에 돋아나 있는 페니스 등은 "남자 따윈 필요 없어", "남자들은 다 죽어버려"라고 외친다. 이 같은 공격성은 루이스 부르주아의 젊은 시절을 대표하는 시그니처다.

트레이시 에민의 '나와 함께 잤던 사람들'
지난해 99세의 나이로 작고한 그녀의 작품은, 그러나 말년으로 갈수록 확실히 분노가 가라앉았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치밀어 오르는 증오와 공포를 어쩌지 못해 페니스를 토막치고 떼어내 여자의 몸에 갖다 붙이며 청춘을 보냈던 작가가 노년에 접어들며 선택한 것은 바느질이었다.

"내가 어렸을 적 우리 가족 중 여자들은 모두 바느질을 했다. 나는 파괴된 것을 이어주고 손상된 것을 치유하는 바늘의 관용을 매우 좋아한다."

그가 바늘을 잡은 것은 아흔 살이 다 돼서였다. 죽기 5년 전 발표한 '무제'는 직육면체의 작은 쿠션 같은 모형을 손바느질해 아래에서 위로 기둥처럼 쌓아 올린 작품이다.

이 밖에도 수건, 커튼 등 집에 굴러 다니는 천 조각들을 모아 만든 헝겊 작품들은, 작가 스스로 부수고 뽑아버렸던 것들을 다시 모아 깁고 이어 붙이는 데 골몰하기 시작했음을 알려준다.

프랑켄슈타인의 얼굴처럼 듬성듬성 흉하게 꿰매진 바느질 자국은 '상처의 완전한 치유는 없다'라고 말하는 듯하지만, 아프게 찌른 구멍을 통과하며 화합을 이루는 바늘을 통해 작가는 비로소 세상을 향해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했다.

온 카와라의 'June 24, 1992'
102명과 잔 여자

사실 모든 여자들이 루이스 부르주아처럼 되는대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눈 앞의 상대 하나 무력으로 굴복시킬 수 없는 연약한 개체로서, 여성적인 표현법이라 하면 독백이나 끄적거림이 좀 더 전형적이다.

여기 지독하게 여성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바느질한 여자가 있다. YBA (Young British Artist: 데미안 허스트가 속한 젊은 영국 작가들의 모임) 소속 작가이자 현재 영국에서 가장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트레이시 에민의 삶은 그가 받고 있는 평가만큼 드라마틱하다.

어린 시절 호텔을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공주처럼 자라던 에민은 7살이 되던 해 집안이 몰락하면서 급반전된 인생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13살 때 성폭행을 당한 후 거리의 여자로 전락한 그녀는 아예 스스로의 삶을 놓아버린다.

주변인들의 도움으로 예술대학에 진학하며 어찌어찌 재활의 길을 걷는 듯 보였지만 대학원 시절 두 번의 낙태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모두 파기하고 자살을 시도하며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녀가 자기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라 생각하고 연 '나의 회고전'은 200개가 넘는 지극히 개인적인 물품들 - 침대, 얼룩진 시트, 속옷, 낙서, 일기, 사진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브루스 나우만의 'Waxing hot'
그녀의 작품 중 가장 주목을 받은 '나와 함께 잤던 사람들'은 텐트 내부에 이제까지 자신과 함께 잤던 102명의 이름을 천 위에 수 놓아 붙인 작품이다. '헤픈 년'이라며 치를 떨던 관객들은 그 이름들이 애인이나 하룻밤 상대뿐 아니라 성폭행범, 낙태된 아이, 할머니 등 그녀와 함께 잔(sleep) 사람들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입을 다문다.

트레이시 에민이 패브릭 작품에 주로 사용하는 방식은 아플리케로, 가로, 세로 약 2m의 거대한 바탕 천 위에 글자 모양으로 헝겊을 잘라 가장자리를 실로 꿰매 붙이는 방식이다.

그 내용은 '타락한 영혼(contamination of the soul)'이나 '내 뇌는 지긋지긋한 똥으로 꽉 차 있어(My brain is full of festering shit)' 같은 자학적인 내용이나 '사랑해(I love you)', '내가 어떻게 널 떠나(How could I ever leave you)' 등의 간질간질한 말들이다. 누가 묻지도 않은 자기 고백, 대부분 잊고 싶어 몸부림치는 기억과 고뇌들을 그녀는 화려한 색깔의 천 조각으로 꿰매 붙임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문지르고 문지르면 닳는 바위처럼 거대한 천 위에 한 없이 바느질을 하다 보면 영혼의 상흔도 조금이나마 희미해지지 않을까? 흡연과 음주, 자살 시도로 수없이 삶에서 도망치려 했던 작가는 비로소 현실에 붙어 있기를 작정하고 바늘을 집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60년대, 개념 미술의 태동 - Art after 60's

PKM 트리니티 갤러리가 2011년 첫 전시로 기획한 'Text/Video/Female: Art after 60's'에서는 루이스 부르주아와 트레이시 에민을 비롯해 총 11명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60년대 미술을 특징 짓는 두 가지 사조가 팝 아트와 미니멀 아트라면 이 둘을 관통하는 기저에는 '개념 미술'이 흐른다. 양쪽 모두 기존의 예술이 가지고 있던 의미를 전복하는 것으로, 미술의 개념성 즉 작가의 의도나 그것을 받아 들이는 관객의 상상력이 예술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그 동안 미술 영역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새로운 표현 매체의 유입을 불러 왔는데, 그 중에는 신문, 잡지 등의 기성품, 언어와 텍스트의 차용, 그리고 기술 발전의 결과물인 비디오 등이 있었다. 더불어 60년대를 기점으로 여성 작가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데, 이에 PKM 트리니티 갤러리에서는 60년대 이후의 동시대 미술을 텍스트와 비디오, 여성의 3가지 키워드로 조명했다.

참여 작가는 에드 루샤, 리처드 프린스, 루이스 부르주아, 브루스 나우만, 온 카와라, 트레이시 에민, 폴 매카시, 댄 그래햄, 로렌스 와이너, 마틴 크리드, 그리고 비디오 아트에서 빠질 수 없는 백남준 작가 등이다. 'Waxing hot(점점 뜨거워지다)'이라는 문장을 'HOT' 모형을 왁스로 닦는 사진으로 표현한 브루스 나우만의 장난끼, 1966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 없이 매일의 날짜를 아크릴 물감으로 그리는 온 카와라의 부지런한 집착을 확인할 수 있다.
2월 24일부터 3월23일까지.

사진 제공: PKM 트리니티 갤러리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