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영범 디자이너]'통영 12공방' 프로젝트, 전 등 전통공예와 디자인 모범사례

베테랑 디자이너에게도 공예 장인들과의 협업은 난공불락이었다. 오랫동안 자기 스타일을 고집해온 장인들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마영범 디자이너의 디자인은 번번이 퇴짜 맞았다. 찾아가고 또 찾아가야 했다. 서너 달이 지나서야 장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자신의 물건이 좀더 세련되어질 수 있다는 설득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틀을 깬 공예품들은 새로운 쓰임과 많은 팬을 얻었다. '통영12공방' 프로젝트와 <수작> 전은 전통공예와 현대 디자인이 만난 모범 사례로 거론됐다. 그리고 마영범 디자이너는 작년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서 '올해의 디자이너'가 됐다.

"아무리 무형문화재라도 공예인의 본분은 기능공입니다. 변화한 시대에 맞는 기능을 가져야죠. 그 기능을 깊이 생각하고 부여해주는 게 디자이너의 일 중 하나인 것 같아요."

팔리지 않는 물건은 의미가 없다. 일상 속에서 숨 쉬지 못하는 전통공예는 유물일 뿐이다. "전통문화가 생활 속에 남아 있는가, 가 선진국의 척도"다.

"일본의 아파트에는 다다미나 미닫이문 등이 많이 적용되어 있어요. 그만큼 현대인들이 전통 문화에 익숙하다는 것이죠. 일상 속에서 쓰고 즐길 수 없는 디자인은 문화가 아닙니다."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어떻게 살 것인가, 와 통하는 이유다. 지난 3월 10일 마영범 디자이너를 만나 전통공예와 현대 디자인이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전통공예에 관심을 가진 특별한 계기가 있나.

이 시대의 디자인에 대해 불만이 있다 보니, 다른 시대를 살피게 됐다. 디자인이 화두이면서도 빠른 소비 주기 때문에 디자인된 물건들의 수명은 짧아졌다. 이런 소비생활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시간이 축적되고 사람의 손맛이 남아 있는 물건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전통공예에 닿았다.

공예 장인들과 협업할 때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물건을 만들면 팔아야 한다. 그런데 장인 자신도, 지자체도 파는 시스템에 대해서는 고민이 없더라. 애프터서비스나 포장 등의 마케팅 개념은 물론이고 유통구조 자체가 없어서 안타까웠다.

젊은 디자이너에게도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나.

예전에는 그랬지만 최근엔 생각이 바뀌었다. 나야 어릴 때 한옥에서 생활하는 등 전통문화의 잔재 속에서 살아온 세대지만 젊은 세대는 아예 경험이 없다. 모르는 사람에게 전통문화가 좋다고 강요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40~50대가 일상적으로 전통적 물건들을 쓰고 즐김으로써 한국문화의 흔적을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또 전통문화라고 해서 무조건 찬사를 보내는 분위기는 없어졌으면 좋겠다. 사실 한국의 목조기술이나 옻칠은 일본의 것에 비해 정교하지 않다. 자연스럽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관용의 범위가 너무 넓은 것 같다.

그런 말을 듣다니 뜻밖이다.

그런데 우리 것이 못났다,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다, 는 것을 인정했을 때 더 갈고 닦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요즘 한국의 투박한 옻칠을 살려낼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매끈한 표면이 아닌 거친 표면에 옻칠을 하니 더 근사해 보이더라.

공예 장인들 중 영감을 준 인물이 있나.

무형문화재 나전장 송방웅 선생이다. 선생의 삶이 담긴 동영상을 보곤 찾아가 절을 올렸다. 나전칠기에 대한 일념으로 춥고 배고픈 시간을 지나오신 것을 보니 예전에 내가 그림 그리던 때가 떠올랐다. 아무런 기약도 없이 그야말로 '고도를 기다리는' 시기였다. 선생의 우직함이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내가 지금 디자이너로 불릴 수 있을 만큼 디자이너로서의 일을 하고 있는가, 하고 묻게 된다. 송방웅 선생이 장인인 것은 언제 찾아가도 그 자리에서 나전칠기를 만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