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지대] 사라지는 당구장과 볼링장


쉬운 문제 하나. ‘※’ 표시의 뜻은? 누구나 거리낌 없이 ‘당구장 표시’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10~20년 뒤에는 학생들이 왜 ‘※’ 표시가 ‘당구장 표시’인지 여부를 배워야 할지 모른다. 그만큼 한국 도심의 거리에서 당구장 간판이 지난 몇 년 동안 급격히 사라져 가고 있다. 정보통신 강국으로 거듭난 한국의 도심이 ‘※’ 간판을 ‘PC방'으로 바꿔나가는 사이 최고의 대중 오락인 당구는 몇몇 마니아들의 소유물로 변했다. 80~90년대 중반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 볼링장 역시 마찬가지다.

90년대 후반 한국 거리에 나타나기 시작한 ‘PC방’들은 ‘스타크래프트’라는 용병의 맹활약을 통해 손쉽게 한국 거리의 일원으로 자리 잡는 데 성공했다. ‘스타크래프트’를 비롯한 여러 편의 PC(퍼스널 컴퓨터) 오락이 대중적인 지지를 받기 시작하면서 PC방은 어느새 ‘주식거래’ ‘리포트 작성’ 등 일상 업무까지 가능한 ‘대표적인 놀이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온라인 게임 열풍은 PC방의 위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보드게임 카페 열풍까지 불어 당구장은 더욱 설 땅을 잃어가고 있다.

대학가는 더욱 그렇다. 한 건물 걸러 하나씩 들어섰던 당구장은 대부분 PC방으로 바뀌었고 이제는 당구장을 찾는 것마저 쉽지 않다.

이런 흐름에 최근 변화가 나타났다. 신촌의 한 당구장. 당구장이지만 살아남기 카드로 내건 것은 역시 PC다. 여섯 대의 최신 PC를 설치해 놓고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출력 서비스 역시 무료다. 물론 주력은 당구다. 다만 친구들과 함께 당구장을 찾았으나 당구를 칠 줄 몰라 구경 온 이들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PC를 설치해 놓은 것. 여기에 리포트를 비롯한 각종 수업자료의 출력을 무료로 제공해 당구장에서 당구를 즐기며 공짜로 원하는 자료를 출력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깨끗한 실내 인테리어는 기본이고 콜라환타 커피 등으로 획일화된 음료 서비스 역시 신세대의 기호에 맞춰 변화시켰다.

한양대 부근의 한 당구장은 지하 1층에 위치한 데다 입구 역시 찾기 힘드는 등 지정학적으로 매우 불리한 상황이지만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한양대 학생들이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는 상당한 미모의 알바(아르바이트)생들 때문. 미모의 알바 생들과 친해지려는, 혹은 어느 정도 친분이 생겨 단골이 된 학생들에 중점을 둔 마케팅 전략이 성공한 것이다.

중앙대 부근의 한 당구장은 어지간한 만화방에 뒤지지 않을 수준의 만화책을 구비, 손님들을 붙잡고 있다. 당구장 가는 친구를 따라가면 공짜로 만화책을 볼 수 있게 되는 셈. 이 당구장 주인은 “당구 인구가 급감하면서 요즘 대학생 가운데는 당구를 전혀 못 치는 이들도 많다”며 “이제 당구장 마케팅의 핵심은 당구를 치는 학생들보다는 같이 왔지만 당구를 못 치는 학생들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볼링장도 마찬가지다. 신촌에 위치한 S 볼링장. 이곳은 ‘자유 볼링’이라는 개념을 도입, 낮 시간 손님 잡기에 주력하고 있다. 평일에는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주말과 공휴일에는 낮 12시부터 3시까지는 한 사람당 8,000원(신발 대여비용 1,000원 포함)에 무한대로 볼링을 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는 것.

평소 한 게임 요금이 1,700원 임을 감안할 때 볼링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평일 ‘자유 볼링’은 저렴한 값에 마음껏 볼링을 칠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 그렇다고 손님이 몰리는 것은 아니다. S볼링장 관계자는 “낮 시간이 자유로운 대학생을 대상으로 했는데 요즘 대학생들 가운데 볼링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별로 없는 듯하다”며 푸념을 토해냈다.

문제는 중ㆍ고생들 역시 당구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30~40대들에게는 고교 시절 몰래 당구장을 찾았던 기억이 학창시절의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중ㆍ고생들이 떳떳이 당구장을 출입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된 지금은 오히려 당구장을 찾는 중고생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사회조사연구소는 전국 272개 초ㆍ중ㆍ고교 학생 1만6,297명을 대상으로 여가활동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당구장은 27.3%로 7위를 차지했다. 1위인 PC방(87.8%)에 크게 뒤진 가운데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술집(28.0%)보다도 낮은 순위다. 게다가 최근 한 달 간 이용횟수에서는 술집(2.57번)은 물론 나이트클럽(2.57번)에도 밀려 순위에 전혀 끼지 못했다.

당구장이 계속 밀려나는 이유는 이미지 개선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당구장은 대부분 동네 건달들의 집합소, 또는 싸움이 벌어지는 곳으로 묘사되기 일쑤다. 실제로 당구장 관련 사건도 많다. 심야에 당구장이 비밀 불법 도박장으로 이용되다 적발되는 경우가 있고, 요즘에는 불법 사행성 오락기가 당구장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기도 하다.

이런 흐름에서 당구장과 볼링장의 주요 소비 계층은 30~40대가 되어 가고 있다. 이들 사이에서도 지나친 ‘내기’가 문제다. 물론 내기가 당구와 볼링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재미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요즘 직장인들 사이에서 재미삼아 하는 내기가 불황의 탓인지 치열한 신경전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상당수다.

사무실이 밀집한 종로 부근의 한 당구장. 점심시간은 물론 퇴근 후 시간에도 이곳 당구장에는 넥타이 부대들이 자주 찾아 당구를 즐긴다. 대학가에 비해 예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이 당구장에서는 자장면을 시켜 먹으며 게임에 열중하는 30~40대 직장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게임 종목은 대부분 쿠션 볼이다. 쿠션 볼은 현금이 오가는 게임으로 한번 칠 때마다 돈이 오가기 때문에 경기 내내 일희일비가 교차한다. 물론 도박의 수준이라 부르기에는 작은 돈이 오가는 일종의 오락이지만 불황으로 주머니가 가벼워진 직장인들에게는 나름대로 부담이 되는 금액. 때문에 오락을 위해 당구를 친다고 보기에는 경기에 집중하는 모습이 너무 진지해 보인다. 심지어 말다툼이 오가는 경우도 있고 경기가 끝날 때쯤 되면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싸늘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경우도 있다는 게 당구장 주인의 설명이다.

볼링장의 경우 부서별 회식비 밀어주기 내기가 자주 열리곤 한다. 볼링은 남녀가 함께 어울릴 수 있고 승패 역시 점수 합산으로 쉽게 판가름할 수 있기 때문에 내기 종목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실제 분위기는 친선과 거리가 있다. 야유와 고성이 오가는 경우는 흔히 접할 수 있다. 그만큼 불황으로 생활이 찌든 30~40대들에게는 추억을 떠올리며 찾는 여과활동마저 경쟁의 장으로 변모해가고 있는 것이다. 하긴 요즘은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고스톱에서도 여유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각박한 세상이니까.

황영석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05-24 15:48


황영석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