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환상을 쿨~하게 건너며 타인에게 말걸기

[문학과 페미니즘] 은희경 <그녀의 세번째 남자>
사랑이라는 환상을 쿨~하게 건너며 타인에게 말걸기

1995년 등단 이후, 수많은 여성 혹은 남성 독자들을 확보해 온 은희경은 대부분의 소설에서 사랑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그러나 그는 ‘순수한 사랑’ 같은 진부한 단어, 고통을 넘나들면서 무조건 정직하고 진정으로 말하기, 같은 것들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작가 자신이 “함부로 화살을 쏘기도 하면서” 소설을 쓰고 싶다고 밝힌 것처럼, 그는 비틀어 보고 비틀어 말하기를 오히려 즐긴다.

그러나 그 삐딱하게 바라보는(어쩌면 정면에서 응시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실체와 바로 마주 쳐다보는 것일 수도 있는) 시선 속에서, 남녀 간 사랑에 얽힌 모든 구체적 세목들은 오히려 실체를 드러낸다. 사랑이라는 낭만적 환상의 이면에 얽혀있는 질시, 갈등, 오해, 무지, 이기심 들을 그녀는 삐딱하지만 뚫어지게 응시하여, 적나라하게 표현해 낸다.

은희경은 인간관계란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전제로 소설을 펼친다. 그 (특히 여성) 주인공들은 고통의 강을 건너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려는 구도자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무엇인가를 다 알아버렸다는 냉소에 거만함과 권태를 고루 지니고 있다. ‘깨달았다’ ‘깨닫게 되었다’를 말하기보다는, 이미 과거에 ‘깨달았음’을 기억하고 되새길 뿐이다. 소설이라는 과정, 시간과 공간을 거쳐가는 삶의 이야기를 지나와도 그들은 그저 알고 있었던 사실들을 확인하고, 그 지점들을 조금 넓혀가거나 비켜갈 뿐인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비켜 서서 삐딱하게 바라보면, 냉소와 권태 무수한 농담들로 얽어 놓은 그 삶들의 실상과 진실이 보일 듯도 하다. 물론 그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일 것이다.

(다시 그들에게 돌아오면) 그들은 늘 ‘다른’ 삶을 꿈꾸고, 비록 완전하게 다르지는 못해도, 그곳으로 경쾌하게 건너간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쩌면 오랜 시간 동안 여성들이 짊어져 온 ‘여성’이라는 굴레를 가볍게 툭툭 털어 버린다. 그들은 소설과 함께 “함부로 쏜 화살처럼” 뛰노는 것이다. 인물들의 그런 기본 태도에 은희경 특유의 발랄하고 경쾌한 사고와 언어, 꼼꼼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짜여진 구성, 주제와 부합되면서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구체적 상징물들의 세밀한 배열 등도 은희경 소설을 ‘재미있게’ 만들어 주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말아야 해”

<그녀의 세 번째 남자>는 사랑의 실체나 본질을 탐구하는 은희경의 소설 중 특히 세심하고 꼼꼼하게 쓰여진 중편 소설이다.

갸름한 얼굴에 날렵한 수입 뿔테 안경을 쓰고, 시폰 블라우스와 랩스커트를 입고 있는 그녀. 기업의 홍보실에서 사보를 만드는, 이지적이고 세련된 전형적 도시 여성이 이 소설의 시선을 장악하고 있다. 여느 날과 다를 것이 없이 권태롭던 어느 날, 그녀가 청첩장을 주는 친구를 만나는 장면, 역시 대수로울 것 없는 그 만남에서 소설이 시작된다. 2년이나 동거를 한 남자가 아닌, “막연히 몇 시간쯤 차를 달리다가 국도변의 주유소에 딸린 한적한 식당에서 옆 테이블에 앉아 우거지탕을 먹던 남자쯤”되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친구. 친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불행은 절대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며, “낯선 세계”에서 “낯선 사람”으로 살기를 선택했다고 한다. “지금보다 훨씬 나쁘더라도 지금보다는 나은 거야”라는, 늘 하던 말을 던진 친구와 헤어져, “낯선 것은 불편하지만 매혹적이다”라고 중얼거리던 그녀도 문득 ‘낯선 여행’을 떠난다.

낯선 세계에서 낯선 사람으로 살기

“삶을 받아들이는 편”으로, “무엇이든 깊이 생각하지 않았으며 특히 가지지 못할 것에 대한 무모한 열정 따위는 일찍 폐기시키는 법”에 익숙한 그녀였지만, 그녀도 역시 “낯선 세계”에서 “낯선 사람”으로 살기를 시도한다.

그녀는 현재까지 8년 간 사귀어 온 그가 오래 전 반지를 끼워주며 사랑을 맹세했던 곳, 영추사를 찾는다. 그러나 일주문 앞에서 “반지는 잃어버릴 수 있지만 장소는 사라지지 않으니까”라고 말했던 그의 사랑 약속이 깨어져버린 것처럼(아홉 달 후에 그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그 장소 역시 사라지고(수몰지구가 되어 물에 잠기고) 없다.

그녀는 시골장에서 촌스러운 바지와 티셔츠, 운동화를 사서 입고, 조악한 가짜 진주반지를 끼고, 도회적인 자신의 모든 이미지를 벗어버린 후 산 위로 자리를 옮긴 영추사를 향한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완전히 달라진 (과거의) ‘사랑의 장소’로 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전하지는 못했다. 우연치 않게 (지금은 물에 잠겨 버린) 영추사에서 사랑을 맹세했던 연인이 죽어버린 ‘사연 있는’ 시골 여자가 되어 버린 그녀였지만, 값비싼 브랜드의 안경은 절을 찾은 한 안경점 주인에 의해 우연히 지적된다. “껍데기를 다 바꾸었는데도 안경이라는 껍데기가 최후까지 남아 그녀의 불필요한 신분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외롭지 않았다. 확신할 수 있었다. 외로움에 이따금 속아넘어갈 만큼 마음속이 메마르고 비어 있을 뿐이었다”라고 매일 중얼거리며 모든 것을 망각하고 살아간다고 믿었지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음”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음”도 실은 번뇌를 구성하는 한 요소였다.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했었지, 그것이 사랑의 본색일 뿐인데”

결국, 그녀는 “그들이 사랑했던 지루한 시간들”, “한 남자의 애인으로 지내기에는 확실히 긴 시간”인 8년을 더듬어본다. 결혼 후에도 “여전히 그녀를 찾아와서 연애감정과 섹스를 인출해갔”던 그. “사랑한다는 말의 뜻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지 오래 되었”지만, “널 사랑해 알지? 나한테는 너 뿐이야”, “제발 내 곁에 있어 줘. 알잖아. 네가 없다면 난 사는 것도 아냐” 라고 습관처럼 말하던 그. “더 이상 서로에 대해서 알 것도, 알고 싶은 것도 없이 사랑하는 관계란 지긋지긋했”지만, 서로가 “익숙해서 지긋지긋하고 편한 나머지 넌더리나고” 했지만, “그 습관과 필요에 번번이 그냥 주저앉고” 말았던 순간들.

“어느 날 그녀는 깨달았었다. 그와 그녀. 그들처럼 사랑하면서 더 이상 서로에 대해 알 것이 없는 사람들은 누구나 결혼해 있다는 것을. 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 그 말이 (…)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인 사랑의 종말로 향해 가는 가장 바람직한 수순이라는 뜻인 줄은 몰랐었다.”

이미 “가장 바람직한 수순” 따위를 따를 수 없게 되어 버린 그녀는 “그래, 결국은 다 지루한 일이겠지만”이라며 냉소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중얼거린다.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했었지” “그것이 사랑의 본색일 뿐인데.”

“안다는 것은 어차피 잘못 안다는 뜻이다. 분별은 모두 소용없다”

영추사에서 틈만 나면 그녀에게 수작을 걸던 목수일을 하는 남자는 그녀에게 손수 조각한 목각인형을 선물한다. 남자의 방에서 자신을 조각한 알몸 목각인형들을 바라보던 그녀는 “아랫도리가 아니라 자의식이라는 안경”을 꾹꾹 짓이겨 버린다. 그녀가 버리고 싶었던 것은 성이기보다는 분별이며 자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읍내에서 혼자 술에 취한 그녀는 반 강제로 덤벼든 남자의 몸을 받아들인다. 마지막까지 벗지 못했던 그녀의 자의식(안경)이 “풀밭 위로 툭, 하고 기운 없이 떨어지”고, 그녀는 두 번째 남자인 그를 경험한다. 그 순간 그녀는 남자를 “세 번째를 향해 놓인 사다리”라고 생각하며, “세 번째 남자라는 지붕에 오르면 사랑하고 안 하고의 분별 없이 사랑을 하게 되는 걸까”라고 되뇐다.

하나, 둘 다음에는 무조건 ‘많다’라고 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숫자 세는 방식처럼, 그녀는 “셋부터는 다 똑같다. 그(첫 번째 남자인 그)도 세 번째 남자 중의 하나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다”라는 결론에 이른다.

고독하지만 ‘다르게’ 사랑하기, 자유를 향유하기

영추사를 떠나 서울로 들어서는 그녀. 소설은 다음의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거기에서 그녀는 세 번째 남자들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첫 번째로 만나는 ‘세 번째 남자는 아마 지금 손목시계를 힐끗 쳐다본 다음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넘기고 나서 다시 책상 위의 펜을 집어들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라는 타인에 대해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를 ‘타인’으로 명명한 그녀. 이제 그는 그녀의 첫 번째 남자, 첫 번째 사랑이 아니라, 세 번째 남자들 중 하나, 세 번째 사랑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미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온 그녀는 사다리를 잊었기에, “사랑하고 안 하고의 분별”을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타인의 허상’을 받아들일 것이기에, ‘식는 게 아니라 달라지는’ 사랑의 속성을 인정하고 있기에, 그녀는 이제 ‘다르게’ 사랑하는 법을 만들어 갈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 사랑은 첫 번째, 두 번째와는 다른 여러 세 번째들 중 하나일 뿐이므로, 그녀는 오히려 사랑을 향유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를 ‘타인’으로 명명했기에 그와 완전히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은 더 이상 갖지 않을 것이지만, “그라는 타인에 대해 그 정도는 알고 있기에 또 ‘다른’ 사랑을 꿈꾸기도 할 것이다.

그와 합치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그를 ‘타인’으로 명명하는 순간, 그녀 속에는 고독이 이미 커다란 공간을 차지해 버리겠지만, 그녀는 고독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유롭고 경쾌하기를 선택한다. 그것은 어쩌면 처음으로 ‘타인에게 말을 거는 일’이자, ‘또 다른 사랑’, ‘세 번째의 사랑’을 하는 일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를 거치고도 여전히 사랑을 갈구하는 당신이라면, 늘 속수무책인 그 사랑이라는 녀석에 대해 조금쯤 거리를 두어보는 것은 어떨까? 타인에게 말을 걸 듯, 조금은 자유롭고 여유 있게 사랑을 건너가 보는 것은? 그러다 어쩌면, 비스듬히 혹은 삐딱하게, ‘다르지만 즐거운’ 사랑을, 어느 틈새에서 우연히 만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권민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1-04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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