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곤 감독 '달콤, 살벌한 연인' - 소심남, 미스터리 여인과 도발적 사랑에 빠지다

영화나 소설을 향수하는 독자는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누구나 알고 공감하는 동서고금의 익숙한 이야기를 즐기는 순응형 관객과 그 익숙함에 딴지를 걸고 변형을 가하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대항형 관객.

<달콤, 살벌한 연인>은 후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다. 이 영화가 요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한국 영화 관객들이 가장 널리 즐기는 영화 장르 중 하나인 '로맨틱 코미디'다.

<달콤, 살벌한 연인>은 사랑하는 남녀가 티격태격 사랑의 줄다리기를 하다 결국 로맨스의 결승점에 도달한다는, 닳디 닳은 로맨틱 코미디의 이야기 관습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

불쾌하지 않을 만큼 가볍고 의미심장한 이 영화의 삐딱한 시선은 오랜만에 한국영화계에 등장한 신선한 장르 파괴로 기록될 만하다. 누구나 알고 있고 누구나 보고 싶어하는 장르의 규칙에 파열구를 내는 이 영화의 도발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달콤하고도 살벌한 연애

달콤하다는 걸까, 살벌하다는 걸까? <달콤, 살벌한 연인>이라는 제목에서 자동 연상되는 질문이 있다면 이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달콤함'과 살벌함'이라는 상반된 느낌을 품은 연애의 과정을 따라가려는 것일까?

그러나 통상적인 연애담에 어울리는 예상은 이 영화에 통하지 않는다. 연애란 그렇고 그런 것이라는 관념을 가진 대학 강사 황대우(박용우) 앞에 한 여자가 나타난다. 유학을 준비 중인 유망한 디자이너 지망생 미나(최강희)가 아래층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자연스러운 관심과 가벼운 흥분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연애'의 감정까지 발전하지만 그 순간부터 뜻밖의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디자인을 전공한 여자가 몬드리안이 금시초문이라고 하지 않나, 독서광을 자처하더니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모르지 않나,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 수상한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머리만 연애 박사 황대우, 불안한 마음을 가눌 길 없는 그 앞에 드러난 미나의 실체는 상상 이상이다.

<달콤, 살벌한 연인>은 관객을 현혹시키고 속이는 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영화다. 영화 속 대우가 미나의 철저한 '연기'에 속는 것처럼 관객들 역시 감독이 쳐 놓은 몇 가지 그럴듯한 설정에 속아 넘어가고 만다. 영화는 달콤한 연애의 상상을 부추기는 듯 시작해서 갑자기 심각한 미스터리 스릴러로 넘어가고 종국에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코미디로 대미를 장식한다.

하여 달콤한 로맨스 영화로 데이트를 즐기려는 연인들에게 또는 심심풀이용 코미디영화를 바랬던 관객들에게,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영화인 셈이다. 한마디로 이건 사랑하는 연인들을 위한 스릴러이고 미스터리한 살인게임의 와중에 맛보는 허무 개그와 같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다음이 궁금해지지만 하나씩 비밀이 밝혀지면서 종횡무진하는 인물들의 행동과 사건 앞에서 안절부절하게 된다. 새롭고 독창적인 장르 패러디와 변칙적인 설정들, 끝을 가늠할 수 없이 탈주를 거듭하는 이야기, 전형성을 유린하는 캐릭터가 파격의 앙상블을 이룬다.

영화광 감독의 예측불허 상상력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데뷔전을 치른 손재곤 감독은 이미 영화계에 알려진 예비스타였다. 5년 전 4회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단돈 35만원으로 완성한 저예산 장편 디지털 영화 <너무 많이 본 사나이>로 그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의 패러디와 예측불허의 상상력으로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돌연변이 영화’라는 평가를 받은 <너무 많이 본 사나이> 이후 손재곤은 한국 최초의 본격 패러디영화 <재밌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너무 많이 본 사나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엄청난 영화 폭식증을 주체할 수 없었던 영화광 세대다. 패러디와 허를 찌르는 상상력을 무기로 삼은 자신의 영화에 대해서는 "늘 다음을 예상하는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는 순간, 쾌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손재곤의 전매 특허는 이 영화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너무 많이 본 사나이>가 영화 장면에 대한 노골적인 패러디로 일관했다면 <달콤, 살벌한 연인>은 장르 관습에 대한 패러디라는 점이 다르다.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의 관습을 취하는 듯하다가 일순간 그것을 배반한다.

감독의 말대로라면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에 주인공을 나올 법한 남성 캐릭터와 미스터리 추리소설에 등장할 법한 여성 캐릭터를 만나게 한 로맨틱 서스펜스 일탈 코미디"다. 장르 규칙으로부터의 일탈과 다양한 장르의 혼용을 통해 '새로운 드라마의 모델'을 만들려는 야심이 읽히는 대목이다.

<달콤, 살벌한 연인>의 장르 파괴 전략은 성공적으로 보인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이야기와 지루해질 만하면 주의를 환기하는 기상천외한 유머, 개성이 뚜렷한 배우들의 절묘한 하모니는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이 영화광 감독의 상상력을 매끄럽게 만들어주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건 주인공 황대우를 연기한 박용우의 호연이다. 늘상 신사적이고 진중한 캐릭터를 무난하게 연기해 온 박용우는 이 영화에서 완전히 표변한다. 이야기의 비밀을 쥐고 있는 미나 역의 최강희를 압도하는 박용우의 코믹 연기는 영화가 요구하는 엇박자 개그의 뉘앙스를 풍부하게 살려내고 있다.

<달콤, 살벌한 연인>은 익숙히 즐겨왔던 장르 영화가 아니라 예측불허의 상상력으로 장르의 그물을 빠져나가는 영화다. 연애영화가 독창적이면 얼마나 독창적일까 라는 속단은 금물이다.

돌연한 서스펜스와 극적 트릭, 의외성 깜짝쇼가 물결치는 이 영화는 오로지 당신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매 순간 골몰한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