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의 향기 백운 이규보 - 평생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사랑한 '삼혹호선생'… 벼슬보다 풍류 즐겨

▲ 백운 이규보 묘비
늙고 병든 몸
차 품질을 따질 겨를이 있으랴.
일곱 잔 마시고 또 일곱 잔
저 바위 앞 물을 말리고 싶네.
차를 보고 술을 찾음이 미치광이 같으나
스님에게 봄 술 빚기를 권함이 무슨 잘못이랴.
만취한 뒤에야 비로소 차 맛을 알기 때문일세.

이는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의 차시(茶詩) 가운데 한 편이다. 이규보는 평생토록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사랑한 풍류거사였다. 그래서 자신을 가리켜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또한 이규보는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차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차와 술 마시는 것을 자신의 풍류행이라고 읊기도 했다.

차 마시고 술 마시며 일생을 보내면서
오거니 가거니 풍류놀이를 따라가 보세.
(喫茶飮酒遺一生 來往風流從此始)

또한 귀한 차, 좋은 차에 대해서도 이렇게 읊었다.

좋은 차는 정인에게도 함부로 보여주지 않는다네.
오직 마음에 간직하여 차를 알아주는 이에게만 대접하지.
(秘之不敢示情親 寓心獨待識茶人)

불후의 걸작인 민족 대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지은 이규보는 ‘고려의 이태백’으로 불릴 만큼 시재가 빼어난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72세로 천수를 마칠 때까지 ‘동명왕편’을 비롯하여 ‘백운소설집’ ‘동국이상국집’ 등 7,000여 수의 시를 남겼는데, 이 가운데 차에 관해 읊은 시가 40여 수나 된다.

백운 이규보는 ‘인중룡(人中龍)’이라고 불릴 만큼 어려서부터 빼어난 인재였다. 또한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불릴 정도로 학문이 깊은 경지에 이른 학자였으며, 문신으로서는 몽골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노심초사한 충신이기도 했다.

이규보는 고려 의종 22년(1168) 음력 12월 16일에 당시 황려현(黃驪縣)으로 부르던 오늘의 경기도 여주에서 호부시랑을 지낸 이윤수(李允綏)와 김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주. 초명은 인저, 자는 춘경(春卿)이었으며, 아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백운산인(白雲山人), 또는 지지헌(止止軒), 삼혹호선생 등이 있다. 지지헌이란 그가 뒷날 개경 동쪽에 초당을 짓고 살면서 붙인 당호인데, ‘주역’의 ‘능히 그칠 바를 알아서 그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규보는 천부적으로 총명하여 겨우 9세 때부터 글을 익혀 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하며, 11세 때에는 이런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한다.

종이 길에 모학사(붓)가 줄지어 가고
잔속에는 늘 국선생(술)이 있네.
(紙路長行毛學士 盃心常在麴先生)

또 14세 때에는 과거 예비시험에서 시를 가장 먼저 지어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슨 글이든 한 번 들으면 잊지 않았고, 장성해서는 유·불·선 3교에 두루 통달했으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도 두루 섭렵하여 100년에 한 사람 나올까 말까 하는 기재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시와 술과 차와 거문고와 구름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기에 너무나 바빴기에 정작 과거공부는 소홀히 했던 탓인지 천하의 이규보도 16, 18, 20세에 각각 과거를 보았지만 세 차례 모두 연거푸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명종 19년(1189) 21세 때에야 비로소 국자감시에 장원급제했고, 그 이듬해에는 예부시에도 합격했다.

‘고려사’ 열전 이규보편에 따르면 그때 과거를 보기 전에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자신이 28개 별자리 가운데 문운(文運)을 맡은 규성(奎星)이라고 했다. 과연 꿈에 나타난 규성의 말대로 장원급제를 했기에 크게 기뻐하며 인저란 이름을 규보라고 고쳤다고 한다.

과거급제 불구 미관말직에 그쳐

그러나 과거에 급제는 했지만 워낙 술 마시고 풍류를 즐기기에 바빴으므로 벼슬다운 벼슬은 못 해보고 계속 미관말직으로만 떠돌았다. 당시는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철권을 휘두르던 무신정권 시대였으므로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고 장원급제를 했어도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마음대로 큰 뜻을 펼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참으로 술과 차를 사랑했다. 10대 소년시절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여 늙어 죽을 때까지 술을 끊지 못했다. 그렇다고 하여 주색으로 몸을 상하는 일도 없었다. 다음은 이규보가 젊은 시절 술을 예찬한 시이다.

술은 시가 되어 하늘을 뛰어다니고
이곳에는 미인의 영혼인 꽃도 있구나.
오늘 밤 술과 꽃이 있으니
참으로 귀인과 더불어 하늘로 오르는 듯하네.

이규보는 24세에 부친을 여의자 개성 천마산에 은거하며 백운거사라고 자호했다. 그가 불멸의 민족서사시 ‘동명왕편’을 지은 것이 바로 천마산에 은거하던 26세 때였다. 그렇게 지내던 이규보가 비로소 벼슬다운 벼슬길에 오른 것은 당시로선 늙은이 축에 들어가던 48세 때였다.

그가 태어난 다음 해인 의종 23년은 정중부(鄭仲夫)가 이른바 무신의 난을 일으킨 해였다. 세상이 하루아침에 무신들의 천하가 되었으므로 이후 오랫동안 문신들은 기를 펴지 못하고 죽어지내야만 했다. 이규보 또한 비상한 재주를 타고났으나 당대의 집권자 최충헌(崔忠獻)에게 벼슬을 구하는 시를 지어 바쳤다고 하여 어용문인 소리를 듣기도 했다.

청년장군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 부자를 죽이고 정치개혁에 나섰다가 갑자기 죽자 그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하여 철권을 휘두른 자가 이의민(李義旼). 최충헌이 이의민 일파를 몰살시키고 새로운 군사독재자가 된 것이 이규보가 28세 되던 해인 명종 26년(1196)이었다.

▲ 백운 이규보의 사당 백운재. 백운 묘역 초입에 있다.

최충헌과 최이(崔怡) 부자는 집권하자 정중부나 이의민 같은 선배 독재자들과는 달리 정권안보를 위해 문신들의 협력을 얻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선비들을 많이 발탁했고, 이규보도 이에 따라 그들 부자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규보는 고종 6년(1219) 51세 되던 해에 별것도 아닌 일로 좌천당해 지방으로 쫓겨 내려갔다. 그해는 최충헌이 죽은 해였다. 최충헌의 뒤를 이어 집권자가 된 그의 아들 최이는 좌천당했던 이규보를 다시 중앙으로 불러올려 태복소경이란 벼슬을 주었다. 그 뒤 이규보는 지제고를 거쳐 고종 17년(1230)에 마침내 장관급인 호부상서에 올랐으니 그때 이미 나이 62세였다.

그 뒤 정당문학감수국사와 태자태보 같은 벼슬을 거쳐 당시 고려의 임시수도 강화에서 팔만대장경 판각이 시작되던 고종 23년 겨울에 노환을 사유로 은퇴를 요청했다가, 69세가 된 그 이듬해에야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원나라 황제도 반한 외교문서

하지만 벼슬을 내놓고도 빈번한 몽골군의 침범으로 강토를 유린당하는 나라를 위해 외교문서를 작성하기도 했고, 팔만대장경 판각의 성공을 기원하고 기고문(祈告文)을 짓기도 했다. 한번은 이규보가 지은 외교문서의 문장이 얼마나 탁월했던지 원나라 황제가 보고 탄복하여 몽골군을 스스로 철수시킨 적도 있었다.

백운 이규보는 그러면서도 노년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아호 삼혹호선생에 걸맞게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사랑하고 차를 마시며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고종 28년(1241) 9월 2일에 72세를 일기로 한 점 백운 같았던 풍류거사의 일생을 마쳤다.

백운 이규모의 묘소는 숱한 전란의 참화 속에서 잊혀졌다가 1900년대 초에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목비고개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간 백운곡에서 비석이 발견되고 후손에게 알려져 1967년에 묘역이 정화되고, 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인 백운재가 복원되었으며, 1983년에는 후학들에 의해 그의 위대한 문학적 업적과 풍류정신을 기리는 백운 이규보 선생 문학비가 그의 묘소 앞쪽에 세워졌다.


황원갑 소설가·한국풍류사연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