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E, 위스너-행크스 지음 / 노영순 옮김 / 역사비평사 발행 / 1만5,000원

제목을 <젠더의 역사(Gender in history)>에서 <여성 수난사>로 바꾸면 저자는 언짢아할까. 하지만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후자 쪽 제목이 이해하기 쉽고 내용에도 부합한다고 느낄 것이다. 이런 오해(?)를 젠더학 혹은 여성학 문외한이 맞닥뜨리는 무지의 소치로 여기기엔 찜찜한 구석이 있다.

사실 필자 또한 곳곳에서 논의의 모호함을 시사하는 문장을 써놓았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여성과 젠더는 그 경계가 덜 뚜렷해진 듯이 보인다” “학자들이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구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등등. 필자가 자인하듯 ‘사회적 성’ 젠더와 ‘생물학적 성’ 섹슈얼리티(sexuality) 간 경계의 흐릿함이 독자가 겪는 혼란의 근원이다.

1980년대 이후 페미니즘의 총애를 받으며 지명도 있는 학술 개념으로 부상한 젠더. 이 학술어가 성에 관한 담론의 새 지평을 열기엔 미흡하다는 식의 주제넘은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한국 사회만 봐도 젠더는 공론의 장에서까지 설득력 있는 주장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일례로 몇 해 전 한 유력 여성 정치인을 지지하는 페미니즘 진영에 “그 여성 정치인은 사실상 젠더 남성이다”라고 맞선 유명 논객의 주장이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다분히 선정적이지만 (생물학적) 여성이 꼭 (사회적) 여성일 거란 보장이 없다는 논리엔 전복적인 힘이 느껴진다.

아쉬운 건 젠더에 내포된 신선하고 도발적인 관점이 이 책에선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필자는 서문에서 가부장제 기원을 따지는 여러 이론을 소개하면서 인류사가 남성 지배의 역사라는 것이 논의의 전제임을 분명히 한다. 반론의 여지가 없는 지적이다. 하지만 필자가 서술하는 남성 지배 내지 여성 종속의 역사에선 이런 불평등을 야기한 주체가 젠더 남성인지 특정 생식기를 지닌 섹슈얼리티 남성인지 불명확하다.

물론 후자라고 해도 역사적 현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닐 테지만, 개개인의 의지를 뛰어넘는 사회적 맥락에서 성차별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싶었던 독자에겐 저자의 설명이 다소 평면적으로 여겨지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역사학자로서 저자가 보여준 미덕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세계사를 표방하는 저작답게 이 책은 공간적으로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를 아우르고, 시간적으로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유구한 흐름을 포괄한다. 카시족, 무수오족, 투아레그족 등 다양한 원시부족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정보까지 충실히 인용해 역사 연구자로서 저자가 지닌 진지함과 성실함을 방증한다.

저자는 “젠더가… (인간이 만든) 다른 유형의 구조와 제도들과 상호 작용하는 방식을 살펴보려는” 것이 집필 목적임을 밝힌다. 이를 위해 가족, 경제, 사상 법률, 종교, 정치, 교육, 섹슈얼리티 일곱 가지 주제를 내세워 각 구조·제도들이 젠더와 교직해 역사의 피륙을 짜는 양상을 기술한다. 젠더와 함께 계급·인종을 고려해 차별이 역사 속에서 중층적 형태로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몇몇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의 사례다. 이들 집단 내에는 외모뿐 아니라 성생활에 있어서도 여성 노릇을 하는 남성이 있었다.(소수지만 지금도 발견된다) 신대륙에 당도한 유럽인들은 이들을 동성애자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에게 섹슈얼리티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 남성=여성들은 부족 내에서 사회적·종교적 역할로 인정받았고 ‘제3의 젠더’로서 정체성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다른 문화권의 사례를 곁들이며 이분법적 젠더 분류가 역사 속에서 불변의 원칙이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근대 이후 유럽의 경우엔 기독교와 자본주의가 여성의 성역할을 주부로 고착하는 역할을 했다. 기독교는 이혼, 처첩, 혼전성관계를 금기시하면서 일부일처제를 강화했고, 자본주의는 가족을 노동력 재상산의 기지로 삼으면서 여성이 남편과 자녀에게 헌신할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이런 전통적 젠더 역할 구분은 탈근대사회를 맞으면서 급속히 흔들리고 있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동성애, 트랜스젠더 등 양자택일적 젠더를 거부하는 소수자의 입지가 넓어지면서 성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젠더가 더욱 유효한 개념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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