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노리치 지음·남경태 옮김 / 바다출판사 발행·1,2권 28,000원 3권 30,000원

‘로마인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는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로마의 끝이라 보았지만 저자에겐 아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긴 330년부터 무려 1123년 동안 번영했던 제국, 동로마를 어떻게 모른 척 할 수 있단 말인가.

저자는 오히려 잊혀지고 왜곡된 동로마제국(비잔티움이란 지칭은 18세기 서구학자들이 서로마와의 구별을 위해 붙인 이름)이야말로 서구문명을 가능케 한 거대한 자산이었다고 주장한다.

만약 동로마가 페르시아와 이슬람세력으로부터 서유럽을 지키지 않았다면, 고대 그리스의 학문적 유산을 전해주지 않았다면, 세계사는 오늘날과는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왜 서구문명은 그들을 무시하고 폄하했을까. 저자는 서구인들이 동방적 색채가 강한 이 문화를 로마의 적자로 인정할 수 없었던 탓이라고 설명한다. <로마제국 흥망사>의 저자 에드워드 기번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간직했던 모든 미덕에 대한 배신"이라고 폄하한 부분은 그런 인식의 기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1,000년이 넘는 문명을 극단적으로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균형잡힌 시각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책은 황제열전이란 부제를 달 수 있다. 매우 다양한 혈통으로 이루어진 88명의 황제 교체가 연대기의 축이기 때문이다. 법전을 편찬하여 제국의 기초를 닦은 유스티니아누스, 제국의 번영을 이룬 문맹의 황제 바실리우스 1세, 현군 레오 6세 등 제왕의 역사는 흥미진진하다.

그 안엔 가계도에 이름만 걸치고 사라진 시시한 제왕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책장을 대충 넘길 일은 아니다. 영웅이 꼭 황제란 법도 없지 않은가. 훈족의 왕 아틸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군 벨리사우르스 등 악당과 영웅들의 이야기는 궁정사의 지루함을 걷어내고도 남는다.

그리고 매춘부에서 일약 황후의 자리에 오른 테오도라나 아틸라에게 청혼한 공주 호노리아, 남편이 죽은 후 직접 제위에 오른 레오 4세의 아내 이레네 등 쟁쟁한 여걸들의 이야기에서도 역동적인 문명을 들여다볼 수 있다. 다만 저자가 상상력의 빈곤이라 꼬집는 이름의 유전(流轉)은 각오해야 할 듯하다. 동명이인들의 출몰 속에서 헤매는 건 다반사.

1권의 3분의 1 가량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후반부와 그 시기를 같이한다. 때문에 스틸리코 등 동일한 인물에 대한 미묘하고도 확연한 시각차를 느끼는 재미가 쏠쏠하다.

성상 파괴론으로 서방 교회와의 분열이 시작되고 800년 무주공산이던 서방에 샤를마뉴 대제가 등장하면서 1권은 끝을 맺는다. 2권엔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이 지중해의 보석으로 자리잡으면서 제국의 전성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그 찬란하고 독특한 문화와 외교적 역할이 뚜렷하게 드러난 시기. 3권은 동로마의 오랜 보호막 속에 힘을 기른 서방이 십자군원정을 일으키며 제국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성지와 성묘를 탈환한다는 명분마저 저버리고 야만적인 폭도의 무리로 변해 또 하나의 그리스도교 제국을 약탈한 십자군. 결국 이들의 수탈에 만신창이가 된 동로마는 오스만투르크의 침공 앞에 힘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수년 전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직접 내용을 3분의 1로 줄인 요약본(종횡무진 동로마사, 그린비 발행, 2000년)을 내놓은 적이 있다. ‘손가락을 잘라내는 심정으로 편집했던 글들’이었기에 작품의 전모를 선보이게 된 저자의 기쁨은 크다. 초역에서 완역까지 해낸 남경태 씨의 뿌듯함도 다르지 않다.

<개념어 사전> 등 쉽고 명쾌한 인문학서 저자로 알려진 역자의 내공에 힘입어 글읽기는 한층 매끄럽다. 풍부한 주석 또한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3권을 합해 2,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나 1,000년에 걸친 시간여행이라 생각하면 <로마인 이야기> 15권에 비해서 오히려 짧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다. 동서양이 만나는 옛이야기에 목말랐던 이들에게는 새로운 독서체험이 될 것도 같다.


박선영 기자 philo94@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