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變身)은 어딘가 미덥지 못하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이 거의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지만, 이제 그만큼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이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가수가 새 음반을 발표하거나, 배우가 새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할 때마다 우리는 그야말로 변신의 남발을 목격한다. 유행할 패션을 선보였다거나, 파격적인 섹시 컨셉에 충실했다거나, 전에 없이 몸을 던져 망가지기를 서슴지 않았다거나 하는 것. 고작 그런 것들이 변신을 미덕처럼 장려하는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변신의 전부일 때, 짐짓 씁쓸한 기분이 들고 마는 것이다.

한자의 조합이 말해주듯, 사실 변신이란 말에서 ‘새롭다’는 의미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이 또한 상투적인 비유지만 ‘변신의 귀재’라는 카멜레온 -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몸 색깔을 달리하는 그 비상한 재주는 놀라운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 변신에 ‘감탄’은 할 수 있을지언정, 역시 ‘감동’은 아니다. 변신은 ‘원래 모습을 감추고 있다’는 불안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일찍이 우리의 카프카는 <변신>을 통해 변신의 수상쩍음과 부조리를 강력히 설파한 바 있으니. 아무튼, 변신, 그저 달라진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여 우리가 꿈꾸어야 하는 것은 변신(變身)이 아니라 갱신(更新)이다. 갱신, 다시 새롭다, 그러니까 ‘업그레이드’라는 것이다.

메모리의 용량을 늘리고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를 새 버전으로 교체하여 성능과 속도를 향상시킬 것. 그런데 그러한 조건이 컴퓨터와 같은 기계장치가 아닌 인간에게 요구될 때, 그것은 단순히 압축 파일을 푸는 정도의 간단한 절차로는 실행되지 않는다.

시간을 쪼개 영어학원을 다닌다든지, 자격증을 따 투잡족이 된다든지, 재테크나 처세술에 관한 책을 부지런히 탐독한다든지 하는 것만으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면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일은 얼마나 단순명쾌할 것인가. 그러나 세상과 인간이 결코 단순명쾌하지 않다는 것은 제법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신을 갱신으로 믿는 착각이 만연되어 있는 이 안타가운 실정.

그렇다면 작가의 경우는 어떨까. 예술가가 ‘다시 새롭게’ 자신을 만들어가며, ‘다시 새로운’ 작품을 창조해낸다는 것은 도대체 어떠한 대가를 얼마만큼이나 치러야 하는 일일까.

“뛰어난 예술가란 독창적이고자 하는 격렬한 욕망에 항상 몸을 불사르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이 정체 모를 욕망에 사로잡혀, 시대와 인생에 대한 따분하고 판에 박은 상식을 돌파하려고 쉬지 않고 싸운다. 돌파에 성공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고, 대다수는 분수에 맞지 않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파멸하고 만다.”

인용한 구절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무시무시한 문장 중의 하나다. 위와 같은 말을 한 사람은 재일조선인 에세이스트 서경식이며, 그는 위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다. 위의 구절을 가끔 소리 내어 읽어보곤 하는데, ‘파멸하고 만다’라는 부분을 최대한 침착하게 발음해보려 노력하지만, 번번이 목소리가 떨리고 만다.

오랜 애독자의 자격으로 말하건대, 소설가 은희경은 등단 이래, ‘시대와 인생에 대한 따분하고 판에 박은 상식을 돌파하려고 쉬지 않고 싸운’ 작가다. 하여 그녀가 거듭한 것은 분명 변신이 아닌 갱신이다.

‘욕망’이나 ‘돌파’의 정도, ‘분수’나 ‘파멸’의 공포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기로 한다. 그것은 은희경의 표현처럼 ‘온 우주를 혼자 짊어져야 하는’ 작가의 숙명과 관련된 것임으로. 또한 그녀의 소설 제목들처럼 끊임없이 의심을 찬양하고, 거대한 고독을 발견하고, 아름다움에 멸시를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므로.

갱신이 그토록 쉽지 않은 이유는 자기 확신과 자기 부정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확고한 자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의 불완전함을 인정할 수 있는 유연함도 견지해야 한다는 것.

확고하면서도 유연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특유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자신의 개성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러나 정작 가장 많은 용기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은 우선 세상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공정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니, ‘불안’과 ‘왜곡’의 거대한 힘을 생각하자면 과연 ‘파멸하고 만다’를 중얼거릴 때 목소리가 떨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등단 12년을 맞은 소설가 은희경은 최근 자신의 9번째 책인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를 세상에 선보였다. 새 책을 펴낸 감회, 최근의 근황, 앞으로의 계획 등은 묻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는 늘 다른 게 궁금하기도 했거니와, 그녀의 소설 속 표현처럼 ‘각본대로 뛰지 않는 토끼’ 같은 인터뷰를 하겠다며 화창한 봄날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했기 때문이다.

1년여 전부터 그녀와 나는 같은 남자를 좋아하고 있다. 소설 속 설정처럼 특별히 공교로운 일은 아니다. 이미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여자들이 그 남자를 좋아하고 있으므로. 아무튼 하루의 한 번쯤 그녀와 나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 남자를 떠올린다. 우리는 바로 그 남자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엉켜 있는 노란 머리칼과 소매 없는 초록색 셔츠, 검은 스타킹. 눈빛은 언제나처럼 도발적이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울기 직전 같기도 했다. 사나우면서도 겁에 질려 있었으며, 내게 적의를 품고 있는 것도 같았고 나를 간절히 원하는 것도 같았다. 둘 다일지도 모른다. 적의가 없는 갈망이란 건 없을 것이다.” (장편 <그것은 꿈이었을까> 중)

그 남자의 사진 옆에 그녀를 세워두고 사진을 찍었다. 그 남자의 사진 옆에서 사진을 찍는 그녀의 사진. 나 역시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진을 찍었는데, 그녀와 나의 사진은 과연 같은 사진이자 물론 다른 사진이다. (이러한 뉘앙스가 그녀의 최근 소설에 자주 등장한다) ‘짐작과는 다른 일들’이 우리의 약속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그녀와 나는 저녁이 되어서야 나란히 앉아 스크린 속의 남자를 함께 바라볼 수 있었는데, 그 남자는 오락실에서 장난감 총을 쏘아대며 내레이션으로 자신이 꾸는 꿈에 대해 들려주기 시작했다.

“정작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은 이유 없이 생겨나는 일들 아닌가요? 모두가 예측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생기는 일들은 인생이라고 할 수도 없죠. 우리가 계획을 세우는 동안 발생하는 우연이 바로 그 사람의 인생이라는 존 레논의 말을 당신은 들어보았는지 모르겠군요.” (단편 <의심을 찬양함> 중)

영화 속에 해파리가 나왔다. 맹독을 가진 아름다운 해파리였다. 바다에 살던 해파리는 작은 수조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다 결국 민물에 적응한다. 그리고 수조 밖으로 나와 강물을 헤엄쳐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그 사이 꿈처럼 환하게 빛나며 여러 죽음에 관여한다.

“B는 여전히 평범하게 살고 있다. 그리고 인생이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그렇다고 해서 상상까지 하지 말란 법이 있는가. 체념한 듯 조용히 헤엄치던 수족관의 물고기에게도 아주 가끔 온몸을 비틀어 파닥거리며 위로 뛰어오르는 짧은 순간이 있다.” (단편 <날씨와 생활> 중)

은희경의 이번 소설집에는 연애소설이 한 편도 실려 있지 않다. 스크린 속 부랑아나 행려자처럼 옷을 입어도 아방가르드하게만 보이는 예의 남자는 극중에서 로맨스를 찾지 않는다. 그는 여자 대신 연신 해파리만 쫓아다닌다. 출중한 미모의 상대 여배우가 나오지 않아 질투를 할 수 없게 된 그녀와 나는 안도와 실망을 동시에 느꼈다.

“너를 사랑해. 어둠 속에서 그가 속삭였다. 그녀 또한 그에게 수없이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자신이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에는 어느 한순간 ‘너를 다른 인생으로 데려가줄게’라거나 ‘너는 네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다른 사람이야’라는 뜻이 들어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중편 <내가 살았던 집> 중)

그러한 마지막 장면은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충격적인 반전’이라는 말이 가소롭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제서야 영화의 타이틀이 화면에 떴다. 그녀와 나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형. 공항에서 J는 참으로 오랜만에 나를 대학시절의 호칭으로 불렀다. 다른 건 아무것도 아닌데, 그게 힘들더라. 뭐 말이야? 내 시선이 무심히 그의 얼굴에 가서 멈췄다. J의 눈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근데도 하고 싶지가 않더라는 거지. 문만 열면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걸 아는데도 몸을 일으킬 마음이 안 생겨. 사람이 그래서 그대로 앉아 당하고 마는 거야.” (단편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 중)

그렇게 늦지 않은 밤이었다. 택시 뒷자리, 은희경은 어느 거리를 지나쳐가며 이십 몇 년 전 그 거리에서 순간적으로 느꼈던 지독한 공포에 대해 말해주었다. ‘곰은 없겠죠?’, ‘나는 남이 안 가본 길을 가는 재미로 살아.’, ‘타인으로 대하는 게 서로 살아남는 길이야.’, ‘모두들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진화야.’, ‘올바른 길이란 건 없어.

인간은 그저 찾아다녀야 할 뿐이야.’, ‘나는 전율을 느꼈다. 자연 상태로의 존재, 그 아름다움과 천연함, 그리고 위엄에 압도되었다.’ 이 구절들의 출처를 알려주지 않는 것으로 각본대로 뛰지 않는 토끼의 임무를 마치려 한다. ‘변해서 새롭다’ 보다 갱신, ‘다시 새롭다’가 역시 좋다.

덧붙여 그녀와 함께 본 영화의 제목은 <밝은 미래>였고 그것은 예상대로 너무나 역설적인 의미였지만, 이 글의 제목인 밝은 미래만은 결코 역설이 아님을 밝혀 둔다.

소설가 은희경

1959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숙명여대 국문과와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이중주'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상속>,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그것은 꿈이었을까>, <마이너리그>, <비밀과 거짓말>을 출간했으며, '문학동네소설상', '동서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이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글·사진= 이신조 소설가 zovenban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