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윈터바텀 감독 '비이성적 인간세상을 고발한다'9·11테러 용의자로 몰려 관타나모 미군기지에 갇힌 아랍계 영국인의 실화 다뤄

‘21세기 광명천지에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라는 놀라운 사건들은 현실에서 버젓이 벌어진다.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재벌 총수의 조폭 동원 폭력 사건이 그러하고, 얼마 전 미국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었던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참사도 그런 사건 중 하나다.

시간은 좀 됐지만 6년 전 벌어진 9·11 테러 역시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하기 힘든 대사건이었다. <관타나모로 가는 길>은 비이성적이고 어이없는 사건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세상의 한 풍경을 다룬다.

테러용의자로 몰려 관타나모 미군기지에 2년을 갇혀 있었던 아랍계 영국인의 실화를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점점 더 불안해지고 있다는 증언처럼 보인다.

"21세기에도 관타나모 수용소 사건처럼 비이성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이 영화를 찍었다"고 말한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란 등지를 도는 로케이션을 통해 영화를 완성했다.

인간의 존엄이 유린되고 인격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현장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영상으로 잡아낸 이 영화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암울한 세상에 대한 단호한 경고다.

호기심이 불러온 비극

<관타나모로 가는 길>은 분쟁지역을 가로지르는 '로드무비'다. 유고 내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비인간적 전쟁의 상황들을 보여 준 <웰컴 투 사라예보>, 아프가니스탄 난민 소년의 행복을 찾은 지난한 여정을 다룬 <인 디스 월드> 등, 전작들을 통해 불우한 세계를 냉정한 시선으로 응시했던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은 다시 한번 폭력적인 세계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무고한 파키스탄계 영국인 청년들이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감옥으로 불리는 관타나모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는가를 좇아간다.

영화는 3인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9·11 테러가 발발한 지 보름 남짓 지난 2001년 9월 28일, 친구의 결혼식 참석차 파키스탄으로 여행을 떠나는 영국인 무슬림 루헬 일행의 여정은 평범해 보였다.

그들이 '무슬림들은 곤경에 처한 아프가니스탄 형제들을 도와야 한다'는 무슬림 지도자의 말을 듣고 아프가니스탄 국경선을 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그저 TV에서나 보았던 전쟁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철없는 생각의 발로에서 시작된 세 청년의 여정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굴절된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체험하겠다는 기특한 의도도 없었지만 호기심을 실천에 옮기는 순간부터 그들의 상상은 악몽으로 변한다. 모스크와 칸다하르, 카불, 관타나모로 이어지는 이들의 여정은 파괴된 건물과 집들을 관통한 탄흔, 피폐한 거리의 풍경들로 넘쳐난다. 얼떨결에 탈레반 기지까지 흘러든 그들을 기다리는 건 미군의 무차별 폭격이다.

친구 모니르는 실종되고 나머지 셋은 테러리스트라는 의심을 받고 쿠바의 관타나모 기지에 억류된다. 죽음의 수용소로 알려진 관타나모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건 이유를 묻지않는 무차별적인 고문과 폭력이다.

<관타나모로 가는 길>은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오가는 마이클 윈터바텀의 고유한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관타나모 수용소에 2년여 수용됐다가 풀려난 세 청년들의 증언이 영화의 절반을 채우고 나머지 반은 그들의 증언에 기초한 수용소 상황을 재연한다. 영화 속에서 재연되는 고문 방법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문명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원시적이다.

개처럼 철창 안에 갇힌 사람들은 수족이 묶인 채로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 커다란 음악을 듣는 잠 안 재우기 고문에 시달린다. 다짜고짜 빈 라덴의 은거지를 캐내려 하고 무고한 사람을 알카에다로 몰아가는 조사관들은 마음에 드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마구잡이로 폭력을 행사한다.

구타가 일상처럼 벌어지고, 발가벗겨진 채로 컹컹 거리는 개에게 쫓기고 강제로 머리카락이 잘린다. 인간성을 저당 잡힌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되는 와중에 '우리는 제네바 협정에 어긋남 없이 포로들을 대우한다'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연설이 교차로 보여진다.

야만 세계에 대한 증언

<관타나모로 가는 길>는 불합리한 세상에 외치는 일종의 양심선언이다.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은 실제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인터뷰와 뉴스 화면 등을 이용 세미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영화를 촬영해 극도의 리얼리티를 전달한다. 야만적인 전쟁을 시각화하는 영화의 스타일은 극단적 사실주의를 따른다.

미군의 폭격 장면에서 흐려지는 초점과 흔들리는 카메라, 뭉개진 영상은 실제 전장의 한복판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바로 옆에서 포탄이 터지는 듯한 생생한 화면은 인물들이 겪고 있는 악몽을 최대한 가깝게 체험하도록 만든다.

56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는 감독상을 수상했지만 영화제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주연배우 넷은 테러리스트라는 의심을 받고 공항 경찰에 또다시 억류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테러리즘과 전쟁의 공포는 존재하지 않는 걸 존재하는 것으로 믿게 만들고 없는 걸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며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든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선 이처럼 비상식적인 일들이 일상처럼 자행된다.

그곳은 포로 처리에 관한 국제 법률을 전혀 따르지 않는 무법천지의 지옥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여전히 변한 건 없다. 영화는 2005년 제작됐지만 여전히 영화가 제기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관타나모에는 아직도 500여 명의 무슬림들이 테러리스트라는 의심 속에 수용돼 있다. 500명 중 혐의가 인정된 사람은 10명, 그중 유죄가 선고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관타나모로 가는 길>은 이 같은 몰상식한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가 기대할 것은 없다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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