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 살았던 '모던 걸'… 양반댁 규수로 자란 '인간' 황진이의 드라마틱한 삶 조명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적 인물에 대한 재조명은 최근 대중문화계 전반에 퍼진 트렌드 중 하나다.

20세기 신문물에 매혹된 모던 보이, 모던 걸들의 열정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나 조선 시대 기녀들의 삶을 조명하는 책들에서 이런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장윤현 감독의 <황진이> 역시 '16세기를 살았던 21세기 여인'이라는 홍보 문구가 말해주듯, 당대의 윤리나 가치체계를 뛰어넘으려 했던 여걸 황진이의 생을 통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전하려 한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인물을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모험이다. 공식, 비공식적으로 너무 잘 알려진 황진이의 익숙한 삶을 어떻게 포장할 것인가는 <황진이>의 고민이자 포인트였다. 더군다나 TV 드라마로 먼저 선수를 친 <황진이>의 여운이 아직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다른 황진이를 보여줄 것인가'에 골몰할 수 밖에 없었다.

16세기를 산 21세기 여인 황진사댁 여식 진이(송혜교)와 노비 놈이(유지태)는 신분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유년기부터 절친하게 지낸다. 진이가 천출 노비와 어울린다는 것을 안 황진사는 뭇매를 안겨 놈이를 내쫓는다.

시간이 흘러 혼인을 앞둔 규수가 돼 있는 진이 앞에 놈이가 나타난다. 황진사댁 가산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던 놈이는 흠모하는 여인 진이가 한양 명문 가문과 정략결혼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질투심을 느껴 진이의 출생의 비밀을 폭로해 혼담을 수포로 돌린다.

이를 계기로 자신을 끔찍히 아끼던 어머니가 실은 허울좋은 사대부의 명예를 위해 자식도 버릴 수 있는 냉혈한이라는 걸 알게 된 진이는 양반으로서 삶을 작파하고 송도 색주가인 청교방의 기생으로 들어간다.

사랑하는 여인을 화류계에 끌어들였다는 죄책에 놈이는 화적떼 두목이 되고 진이는 절세미색과 양반들의 가식을 희롱한다.

한편 진이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신관 사또 희열(류승룡)은 놈이가 이끄는 화적들에 의해 곤경에 처하자 놈이를 잡아들이기 위해 혈안이 된다. <황진이>의 영화화 작업은 역사가 길다.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의 손자로 알려진 북한 작가 홍석중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작가로부터 영화화 허락을 받고 일부 장면을 북한에서 촬영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등 영화 외적으로 들어간 노력이 만만치 않았다.

촬영 단계부터 개성 박연폭포를 카메라에 담기 위한 로케이션에 남다른 공을 들였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남북관계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다 결국 금강산 촬영으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대신하게 됐다.

'황진이'라는 인물에 신선도를 부여한 것은 홍석중 원작의 색깔이었다. 북한 작가의 소설답게 계급과 성차(性差)에 의해 인간의 위계가 나눠졌던 조선 시대 억압적 사회기제들에 저항했던 인물들로 황진이와 놈이의 생을 다룬다.

자연히 우리가 알고 있는 서경덕과의 로맨스는 상징적으로 처리되고, 양반댁 규수로 자란 황진이가 출생의 비밀을 알고 화류계 기녀로 거듭나 남정네들을 희롱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한편 <황진이>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혈의 누>, <왕의 남자>에서 비롯된 모던 사극의 명맥을 잇는다. <스캔들>에서 단아함과 정갈함 속에서 꿈틀대는 욕망을 형상화했던 정구호 미술감독은 과장된 화려함을 거둬낸 무채색 비주얼로 다시 한번 영화의 품격을 높였다.

다채로운 색의 사용, 공간 속의 인물이 도드라져 보이게 만드는 세심한 미술은 이야기와 따로 놀지 않는다. 물경 100억원에 육박하는 제작비의 상당 부분이 미술과 세트에 투여됐을 정도로 보기 좋은 그림을 만들어내기 위한 투자에는 아낌이 없었다.

중심이 흔들리는 이야기 하지만 모던한 미술과 정제된 연출에도 불구하고 <황진이>는 '왜 다시 황진이인가?'에 대한 수긍할 만한 대답을 주지는 않는다.

영화의 전반부는 황진이, 후반부는 놈이의 드라마가 끌고 가는데, 시대와 반목했던 두 사람의 투쟁을 좇다보니 정작 영화가 어디에 중심을 두고 있는지가 불분명해졌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담긴 사대부의식의 가식에 치를 떨던 황진이가 천출 어미의 무덤 앞에서 "세상을 발 아래 두겠다"고 선언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후 그녀의 행실은 별 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못한다.

기껏해야 겉 희고 속 검은 선비들의 작태를 희롱하거나 속물적인 세상을 향해 독설을 내뱉을 뿐이다. 여기에 원작이 중시했던, 놈이를 통한 계급갈등이 끼어들면서 주제의식이 흐려지고 말았다.

소설에 담긴 계급적 갈등 양상이 영화화의 직접적 동기가 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조선 시대 신여성 황진이를 다루고자 했다면 하나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쪽이 좋았을 것이다.

배우 인생을 건 전환점으로 이 영화를 생각했다는 황진이 역의 송혜교는 귀여운 소녀적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쓴다. 물론 송혜교는 충분히 예쁘고 카메라는 그의 성숙한 매력을 담아내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하지만 애당초 기대했던 황진이의 풍채가 그에게서 풍겨나오지는 않는다.

이는 일개 연기자의 자질 문제라기보다 이야기가 충분히 캐릭터를 살려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연모하는 사내 놈이를 위해 간악한 사또의 수청을 드는 장면은 도도하게 자존을 지켜온 여인의 의지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는 듯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황진이의 삶 속에 담긴 21세기적 삶의 태도나 급진성은 그리 설득력이 없다. 21세기 관객의 눈으로 보기에 그는 당위론적인 이상주의자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한국아이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