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바다와 양산'

“(물집을) 안 터뜨려요? ” “이 정도는 괜찮아.” “안 터뜨리면 안 나아요.”

집으로 돌아온 남편이 발에 생긴 물집을 들여다보자 옆에 있던 아내가 걱정스레 말한다. 이미 남편의 외도 행각과 그 상대까지 알고 있는 아내.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색하지 않은 채 덤덤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극중에 나온 이 대사는 어쩐지 의미심장하다. 아내는 정작 자신의 생애에 생긴 물집을 단 한 군데도 터뜨리지 않고 조용히 사랑하는 이들 곁을 떠난다.

연극 <바다와 양산>은 여러모로 호감을 주는 공연이다. 서양의 원작 번안물들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연극계에서, 보기 드물게 아시아계의 원작을 만난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작품은 일본 작가 마쓰다 마사타카의 원작을 송선호 번역, 연출로 선보이고 있다. 배우 예수정, 남명렬, 박지일, 이정미 등이 출연하는 이 공연은 서울 대학로의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꾸준히 관객을 끌고 있다.

부산의 어느 한적한 마을. 준모와 정숙 부부가 한 집에 세들어 살고 있다. 준모는 소설가이자 교사이고, 정숙은 전업 주부다. 어느 날 공원에 두고 온 양산을 찾으러 남편을 보낸 사이, 정숙이 쓰러진다.

의사는 그에게 생명이 3개월밖에 남지 않았음을 선고한다. 이들의 집 주인은 낙천적인 성격의 순배, 화자 부부다. 조용하고 엄숙한 준모 부부와는 달리 이들은 아웅다웅 살아간다.

준모는 과거 자신에게서 원고를 받아가던 출판사 여직원 영신과 부적절한 관계에 있다. 어렵게 의사의 허락을 받고 오랜만에 부부가 막 외출하려는 순간, 곧 서울로 직장을 옮기게 된 영신이 마지막 인사차 이들을 방문한다.

내내 친절함을 잃지 않던 영신은 결국 찻잔을 엎지르는 실수로 자신의 마음을 소리없이 노출시키고 만다.

그러나 끝내 한 마디도 표시하지 않는다. 정숙은 세상을 떠나고, 마당에 흰 눈이 내린다. 준모는 홀로 꺽꺽대며 말없이 밥을 먹는다.

일본 원작이라는 점에서 이미 기대했듯이, 극 전반의 분위기와 대사, 무대 장치 곳곳에서 동양적인 정서가 흠씬 배어난다. 시종 차분하면서도 쌉싸름한 맛이 난다.

시한부 인생을 보내는 정숙 부부의 무거운 현실 속에서도 집주인 순배 부부의 유쾌한 일상이 극의 균형을 잡아준다. 사실상 극의 공동 주연인 두 쌍의 부부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면서 상호보완적이다.

서로의 색깔 대비를 통해서 작품은 현실과 비현실, 추상과 구상,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는 건널목을 넘나든다.

정숙 부부의 연기에서 느끼는 중후함과 부담감, 순배 부부의 발랄하고 사실적인 연기가 어울려 공연의 재미를 더한다. 특히 순배 역을 맡은 박지일은 자신의 역할에 대한 디테일까지 거의 완벽에 가깝도록 소화해내 감탄을 자아낸다.

자칫 호들갑스럽거나 어설프기 쉬운 사투리 연기도 자연스레 구사하고 있다.

무대 세트와 배우들의 동선 구성도 주목할 만하다. 세트로는 준모 부부네 집 마루를 객석쪽의 중앙 무대로 삼고, 그 너머로 일정 공간을 띄워 마당이 가진 공간감을 살렸다.

가끔씩 관객들에게 등을 보인 채 대화를 나눠가는 설정도 흔치 않은 선택이다. 마치 삼각대에 카메라를 고정해놓고 매일 일정한 시간에 누군가의 집을 엿보며 다큐멘터리를 찍듯 시각적으로도 색다른 여운을 안겨준다.

극이 끝난 뒤에도 묘하게 싸아한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일본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자주 발견하는 공통점이기도 하다.

공연의 마지막 장면. 아내가 세상을 뜬 뒤, 남편 준모는 생전의 아내가 권했듯이 물에 밥을 말아먹다 말고 흐느낀다.

그러다 다시 아무 일 없는 듯이 수저를 놀린다. 쉬 넘어가지 않을 밥알을 한사코 입에 넣어 씹고 삼키게 하는 그 힘은 과연 인간의 가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24일까지 공연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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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