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애 종손 최채량(崔採亮)忠과 義의 가풍 잇는 21세기 선비… 儒筆의 품격으로 보종에 지혜 쏟아

종손 최채량 씨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무과에 급제한 장군이다.

그렇지만 경주 최씨 가운데 경주 최부잣집이 워낙 유명해, 장군이 이룬 업적이나 유업이 파묻힌 감이 적지 않으니 14대를 이어온 종가의 가성(家聲)을 아는 이들로서는 아쉬움이 있다.

필자 역시 피상적으로만 이 집을 아는 처지였다. 이를테면 사랑방에서 들은 이야기와 이 집을 취재한 약간의 자료를 통해서였다.

그렇지만 이번 기회에 종가를 직접 가서 보고 듣고 관련 자료를 읽으면서 새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안다고 하는 게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볼 만한 집이었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포석정, 삼릉을 지나 경애왕릉 입구 표지판을 보면서 경주시 내남면 소재지 입구에 도착했다. 우선 최진립 장군을 향사한 용산서원(龍山書院)을 둘러본 뒤 ‘이조교’라는 다리를 건너 이조리(伊助里)에 있는 종가로 들어갔다.

초입에는 격조 있게 가꾸어진 소나무들이 마치 문무백관이 조회를 하는 형상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나무들마다 작은 돌 표지석이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최진립 장군의 14대 종손은 최채량(崔埰亮, 1933년생) 씨다. 종손의 이름자 가운데 채자는 독특한 글자라 기억에 또렷하다. 이 글자의 의미는 영지(領地)다. 영지란 봉건사회에서 제후들이 넓게 점유한 땅을 말한다.

일전에 퇴계 종가 당내 한 교수의 독일 유학 시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유럽의 명문가 학생이 백작(伯爵)집 출신이라고 뻐기길래 심기가 뒤틀려 단번에 자신은 대한민국의 공작보다 더 높은 집안 출신이라고 되받아쳤다고 한다.

유럽 학생이 믿지 않자 직계 조상인 퇴계 선생의 업적과 후대를 상세히 설명했고 한국대사관에까지 문의해 확인시켜줌으로써 굴복시켰다는 이야기였다.

우리의 명문 종가 종손이 유럽의 공작, 후작, 백작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는 그 교수의 말에 공감이 간다. 그런 이야기를 떠올리며 종손의 중간 이름자를 생각했다. 종택의 모습과 종손의 이름자가 썩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나무며 기념비, 비각, 잔디, 고색창연한 사당과 사랑채, 그리고 안채, 집 앞의 넓은 텃밭까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가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작더라도 단독주택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집 한 채를 간수하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종손은 나무를 손질하는 품값만 300만원을 지출했다고 말문을 연다.

“제가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했고 또 평생 교육계에 종사했습니다. 그래서 이 분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집 입구의 나무들은 일가 후손들이나 친구들, 사회에서 사귄 사람 중에 기념식수를 하겠다는 이가 있으면 모두 참여시켰어요. 사당 옆에 있는 매실나무는 200여 년이나 된 고목인데 저 나무에서만 딴 매실이 저의 1년 양식입니다. 참 많이 달려요"

종손의 양식이 매실이라는 게 흥미롭다. 매화나무는 선비의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사군자 중에서도 으뜸이며 시인들은 다투어 매화를 노래했다. 옛 선비들은 매화가 지닌 고결한 정신을 따라 배우려 했다.

그것이 절의(節義)의 정신이며 상징적인 열매가 바로 매실이다. 술로 담거나 염장을 통해 반찬으로, 그리고 약재로까지 요긴하게 쓰인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완전한 선비의 나무’인 셈이다. 그러고보니 종손의 품성이 매화를 닮았다.

종손은 평생 글씨도 읽혔다. 필자가 종손이 쓴 글씨를 처음 본 것은 (사)박약회가 2003년 7월 일본 후쿠오카 춘일시(春日市) 정행사(正行寺) 아악어당(雅樂御堂) 앞에 건립한 퇴계선생현창비(退溪先生顯彰碑)의 앞면 대자 글씨를 통해서다. 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기라성 같은 서예가들을 두고 최진립 장군 종가 종손의 글씨를 택한 것이다.

이는 퇴계 선생의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 ‘유필(儒筆)의 품격(品格)’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종손은 서울에서 교편을 잡던 시절 원로 서예가인 김재운 선생에게도 오랫동안 사사했다. 그렇다면 유필을 바탕으로 법필(法筆)을 터득한 우리 시대의 서법가(書法家)다.

종손의 가계를 족보를 통해 읽었다. 최진립 장군은 병조참판에 증직된 최신보(崔臣輔)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맏아들이 동윤(東尹, 龍巖)이며 셋째집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경주 교동의 최부잣집이다. 2006년 용암고택(龍庵古宅) 현판도 종손이 썼다. 수운 최제우 선생 역시 장군의 아랫대 6형제에서 갈려 나갔다.

충렬사우 어필

장군의 집은 최고운(崔孤雲) 선생의 후예로 사성공파(司成公派)에서 다시 마을 이름을 따서 이조 종파(伊助宗派)에 속한다. 장군의 손자 대에 이르러 맏집이 무후가 되었고 그래서 종통은 둘째집인 국형(國衡, 1616-1657) 공으로 내려왔다. 6, 9, 10대에 이르러서 각각 양자가 있었다.

종손의 부친인 죽남(竹南) 최병문(崔炳文) 씨는 전형적인 조선의 선비였다. 평생을 학문과 문중 일에 헌신했다. 글씨도 잘 썼고 시도 뛰어나 문집을 남겼다. 종손은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 건(鍵, 1954년생) 씨는 현대 서예계에서는 ‘인산(仁山) 선생’으로 통하는 중견 서예가다. 손자는 영하(英河, 1986년생)다.

종손은 경주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6·25전쟁 당시 고려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1953년)했다. 57년 대학을 졸업한 뒤 경주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서울로 전근해 성일중, 잠실중, 영동고등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무렵 선친이 우환 중이었다. 종손은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고 해서 변통으로 택한 것이 부산으로 전근이었다. 얼마 뒤 경주 삼성고등학교로 옮겼고 그곳에서 정년을 맞았다. 교장을 지낸 이력은 끝내 앞세우지 않았다. 흠흠당(欽欽堂, 충의당의 본래 이름) 주인다운 모습이었다.

배움에 대한 종손의 애착과 부지런함이 남달랐다. 39년간 교직에 있으면서 생물교사가 국어과와 한문과의 자격시험에도 합격했고, 틈틈이 붓글씨도 익혔다.

맏아들 이야기를 하면서 종손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맏아들은 냉동회사에 다니다 근자에 퇴직했다. 일반적으로 외인에게 자식의 퇴직과 환향을 소개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종손은 이를 그대로 이야기를 하면서, 경주 시내에서 서실과 국선도 도장을 연 근황까지 소개했다. 종손으로서 맏자제가 고향으로 돌아와 있다는 것과,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아울러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로 인해 이 충의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지는 사당과 아름다운 종가 터전이 함께 길이 보존될 것이기 때문이다.

종택은 마치 청와대 녹지원처럼 금잔디가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다. 사랑채 앞에는 장군의 6대조인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사당 표지석으로 보이는 대형 석물 한 점이 출토되어 놓여 있다.

이곳이 사당이 있었다는 사실과 아들 3형제의 이름자가 적혀 있다. 그는 경주 고을에서 문과에 처음으로 급제한 경주 최씨의 현조(顯祖)다.

종가 사랑 대청에 올랐을 때 충의당(忠義堂)이라는 대형 현판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이 집에 합당한 당당한 현판이다. 그 옆을 보니 충의당 기문이 걸려 있었는데, 놀랍게도 면암 최익현이 이곳에 직접 와 써준 것이었다.

그 당시 종가는 현 종손의 증조부인 최해일(崔海日) 공이 계셨다. 일가이기도 한 면암은, 나라를 빼앗긴 현실을 뼈에 사무치게 슬퍼하며 최진립 장군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보여주었던 충의의 정신을 계승할 것을 글을 통해 역설했다.

종가에는 유물과 유품 다수가 전래되어 있었다. 근자에 이들을 얼마간 남아 있던 고문서류, 목판류와 함께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모두 옮겨 보관하고 있다.

사진으로 볼 때 인상적인 유품은, 장군이 직접 사용했던 지휘도(칼 길이 85cm, 자루 길이 15cm)다. 임란 때 장군들이 직접 사용했던 칼 중 현존하는 것은 흔치 않다. 임란 당시의 것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칼, 최경회 장군의 칼, 그리고 학봉 김성일 선생의 칼 등이 손꼽힐 정도다.

종손이 주로 거처하는 안채의 거실에는 서실이 꾸며져 있다. 직접 쓴 가암서실(佳巖書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근자에 써서 괴목에 새긴 작품인 일소옹(一笑翁)도 보인다. 가암은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종손의 아호는 이와 별도로 우산(愚山)이라고도 쓴다.

● 병자호란때 장렬한 최후… 사후 청백리에 녹선
최진립 1568년(선조1)-1636년(인조14)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 시호는 정무(貞武)

종가에서 귀중한 한 장의 사진을 보았다. 장군의 유묵(遺墨) 가운데 국한문을 혼용한 편지 사진이었다. 한글이 세종 때 창제되었지만 한동안 국가 공문서나 선비 사회에서는 널리 쓰이지 못했다.

대신 한글은 부인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래서 부인과 의사소통을 할 때 종종 한글이 쓰였다. 이는 그러한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다.

학봉 김성일 선생이 임진왜란 당시에 진주성 대첩을 거둔 뒤 진주성에서 순국하기 전 부인에게 보낸 편지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장모 모시고 설을 잘 쉬라는 당부와 ‘너무 그리워 말고 편히 계시오’라는 마지막 구절이 기억에 남아 있다.

최진립 장군이 남긴 기량서(寄亮書)라는 편지는, 자신의 둘째아들에게 보낸 것이다. 당시 맏아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 편지는 병자년(1636) 2월 초3일에 쓰여졌다. 당시 장군은 69세의 노구였다.

그리고 같은 해 용인 험천에서 적들과 싸우다 전사했다. 사후에 판중추부사 김시양은 “최진립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려는 뜻은 속으로 본래 정해서 창졸간에 전사한 유와는 다르니 그 문에 정려를 내리소서”라고 했고 지금 소위 신라의 고총인 ‘개무덤’ 앞에 정려되어 비와 비각이 함께 남아 있다.

이 편지는 아들에게 보내면서 그 말미에 며느리에게 한글로 적은 특징이 있다.

장군은 경주 현곡면 구미동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부친을 여의었고 25세 때 임란을 당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찔렀다. 27세 때 무과에 급제한 뒤 정유재란 때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왜적을 토벌했다.

이러한 공적으로 난이 끝난 뒤 선무공신에 녹선되었다. 그 뒤 오위도총부 도사, 마량진 첨절제사, 경원도호부사, 가덕진 수군첨절제사, 경흥도호부사, 경기 충청 황해 삼도수군통제사(인조11년) 직 등을 역임했다.

장군은 63세 때 공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임명되었다. 공조참판 직은 종3품의 고위직. 문치주의를 채택했던 조선시대에는 문과 출신의 문신이 이러한 직을 맡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이 직이 무과 출신의 장군에게 내려진 것은 능력과 국왕의 신임이 그만큼 두터웠음을 의미한다.

장군은 평생을 근신한 태도로 살았다. 종가의 사랑채는 ‘충의당’이지만 본래는 ‘흠흠당(欽欽堂)’이었다. 지금도 현판이 남아 있는데 이는 공경하고 공경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종택당호 충효당

장군은 즉시 상소를 통해 사직했으나 윤허되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당시의 자료를 보면, ‘최진립은 무인으로서 몸가짐이 청근(淸勤)했기 때문에 이 직을 제수한 것이다’라 적고 있다. 무인이면서 무인답지 않고 선비의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장군이 남긴 한 장의 편지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문신에 못지않은 달필이다.

장군은 돌아가시던 해인 병자년에 공주의 영장이 되었다. 그 뒤 두 달 만에 남한산성이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위당했다.

경기감사 정세규가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勤王)하면서 장군이 나이가 많은 것을 배려해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자 강개하게 말하기를, “내가 늙어서 장수의 일을 감당할 수는 없지만 함께 따라 갈 수는 있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동참했다.

용인 험천 지역에서 중과부적으로 몰리자 사람들을 둘러보고 “너희들은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 없다. 나는 여기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죽을 것이다”라 하며 활을 쏘며 분전했다.

난이 끝난 뒤 시신을 수습할 때 바로 그곳에서 온몸이 화살로 맞은 채 발견되었다. 당시 또 다른 감동적인 일화가 전해온다. 전황이 불리하자 자신을 평생 따르던 두 종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했다.

이때 환갑을 넘긴 종들은, “주인이 목숨을 버려 충신이 되는데 어찌 우리 종들이 충노(忠奴)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변하며 함께 목숨을 바쳤다.

종가에서는 이들의 영령을 기려 장군의! 불천위 제사 뒤 상을 물려 제사를 지내고 있다. 반상(班常)의 구분이 엄격했던 조선 시대에 양반들이 상민도 아닌 종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한 것이다. 지금도 이 제사의 전통은 이어오고 있다. 지금 종가에는 종노비와 비각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잠곡 김육이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글을 지은 바 있다. 제목은 ‘최진립청백사절포증의(崔震立淸白死節褒贈議)’. 청백의 최진립 장군이 난을 만나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킨 사실을 기려 증직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논한 글이다.

그는 장군의 청풍대절(淸風大節)을 기린 뒤, ‘저 먼 시골의 무인 가운데 이러한 절행(節行)이 있는 이가 있었는가?’라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그는 논의의 말미에 청백리(淸白吏)로 녹해야 함을 역설했고, 공감을 얻어 모두 시행되었다.

장군은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정무공(貞武公)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청백리에 녹선 됨과 아울러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과 아울러 ‘충렬사우(忠烈祠宇)’라는 사액까지 내려지는 최고의 기림을 받았다.

현재 용산서원은 지방문화재로, 충의당은 지방민속자료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종가에는 장군이 심은 노거수 한 그루가 있다. 이 나무는 1905년에 갑작스럽게 고사했다가 1945년 경에 소생했다. 이는 일제에 의한 국권 상실과 이후 광복과 연관되어 널리 회자됐다.

노거수 앞에 장군의 얼을 길이 기리는 차원에서 기마 동상 건립을 추진 중이다.

‘잠와선생실기’가 목판으로 간행되었고 1975년에 국역되었다. 실기 서문은 청대 권상일과 해좌 정범조가 썼고 행장은 학사 김응조가, 묘갈명은 약산 오광운이, 묘지명은 홍문관 부제학 권해가, 신도비명은 용재 조경이 각각 지었다.

다음 호에는 전주 이씨(全州 李氏)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종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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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서원 현판
장군이 심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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