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통문화 전령사 안영환 락고재(樂古齋) 대표캘리포니아 공대서 컴퓨터 공학 전공한 시스템 디자이너외국인에 풍류를 전달하는 느낌과 질이 다른 행사 마련

제헌절인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계동 북촌 한옥마을에 있는 ‘락고재’(樂古齋)’는 한국 전통문화를 만끽한 외국인들의 흥(興)이 넘실댔다.

한복을 입고 서툰 절을 하거나 락고재 구석구석을 돌며 사진을 찍는가 하면 차(茶)문화와 한글(붓글씨) 등 한국 문화에 대한 진지한 대화도 이어졌다.

한국전자거래진흥원 초청으로 방한한 16개국의 ‘e-learning(전자학습)’과정 대상자 18명은 처음 접해 본 전통문화 체험을 통해 “새롭게 한국(New Korea)을 인식하게 됐다”고 했다.

인도네시아 정부기관에서 일한다는 밀라(여) 씨는 “ ‘대장금’을 통해 한복을 알게 됐는데 직접 보니 문양과 색깔이 너무 아름답고 신분에 따라 옷이 그렇게 다양하다는데 놀랐다”면서 “한복을 입으니 대장금이 된 것 같아 기쁘다”고 했다.

문관 의복을 입은 페루의 저널리스트는 훙배의 학 문양을 가리키며 “한복처럼 깊은 철학이 담긴 의상은 보지 못했다”며 “한국이 예법을 중시하는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에는 한국개발전략연구소가 초청한 아프리카 중앙공무원 경제개발전략과정의 13개국 14명이 락고제를 찾았다. 붓글씨를 잘 써서 기념품을 받은 짐바브에 기획정책국의 무타사 경제과장은 “한글의 자음과 모음이 과학적이고 글자에 하늘(天)ㆍ땅(地)ㆍ인간(人) 사상이 있다는 것에 감명 받았다”면서 “한국인들이 총명(smart)하다는 인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한바탕 퍼포먼스를 방불케 하는 한국전통문화체험 행사가 끝난 뒤 락고제 안영환(48) 대표는 대청마루에서 다소 여유를 찾았다. 여느 전통문화체험과의 차이를 묻자 안 대표는 “느낌(feeling)과 질(quality)”이라고 간략하게 답했다.

10년 가까운 경험과 노하우에 비춰볼 때 외국인이 한국문화에 감동하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닌 ‘느끼는 것’이어야 하며 동시에 수준 높은 문화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전통문화에 관한 한 “백번 보는 것이 한번 경험한 것보다 못하다(百見不與一驗)는 게 그의 지론이다. 예컨대 사물놀이 공연을 단순히 관람하는 것과 장구라도 한 번 쳐보고 감상하는 것 사이에는 외국인들이 한국을 바라보는데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옛 것을 즐기는 집’이란 뜻의 락고재는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조선시대 선비들이 느꼈던 풍류와 멋을 제대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안 대표는 고급 양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락고재와 같은 공간을 전국에 세우려 한다. “문화는 개인은 물론 국가의 얼굴입니다. 우리의 전통한옥과 고급 양반 문화는 명품 브랜드 문화로 외국과 비교해 손색이 없습니다.”

안 대표는 본래 엔지니어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1982년 이후 10여년 간 미국에서 시스템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런 그가 고급 한옥문화체험 공간을 생각한 것은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대 초 한국에 돌아와 사업을 하는 친구들을 도우면서 외국인들로부터 한국 문화의 고유함이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들은 게 계기가 됐다.

“외국인들이 중국은 웅장하고 일본은 세밀한데 한국은 이도저도 아니지 않느냐고 말할 때마다 무척 자존심이 상했죠. 그래서 한국 문화의 진수와 정체성을 알려주는 체험 프로그램을 찾았고 우리의 선비문화, 그 속에 담긴 ‘풍류’가 해답이라고 봤습니다.”

그는 1994년부터 엘리자베스 여왕이 생일상을 받은 하회마을 담연재를 비롯해 지례예술촌, 안동 종가집, 경주 독락당 등에서 직접 양반 생활을 해보는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외국인들의 반응은 예상 이상이었다. 한결같이 “비로서 한국 문화를 알게 됐다”며 감동한 것.

“달 뜨는 밤에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에 소반 술상을 마련하고 대금 연주를 듣게 한 적이 있는데, 은은한 달빛을 타고 흐르는 대금소리에 눈물을 흘리는 외국인도 있었죠. 한 비즈니스맨은 20년 넘게 한국을 드나들었는데 오늘 하루만큼 한국을 느끼기는 처음이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락고재에서 열린 외국인 대상 한글과 붓글씨 교육. 김지곤 기자.

그러나 외국인의 일정에 맞춰 종가집을 구하기가 쉽지 않고 행사가 진행되더라도 지방에서 하다 보니 경제적 손실이 적지 않았다.

그는 서울에서 전통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찾던 중 2001년 가을 일제시대 국학 연구기관이던 진단학회 건물이 헐린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사들였다. 그리고 인간문화재 대목장 정영진옹에 의뢰, 한옥의 원형을 살리면서 호텔의 편리함을 갖춘 오늘의 락고재를 완성하였다.

락고재는 대지 130평에 건평 45평, 방은 6개 정도이고 마당 옆에는 자그마한 정자가 붙어 있다. 주로 외국인들에게 개방되지만 한국인들도 공연, 세미나 등에 이용할 수 있다.

락고재는 이미 한국의 유명 문화상품으로 해외에서 각광 받고 있다. 요즘 같은 성수기엔 매달 400여 명의 외국인이 다녀간다. 대게 일본인이 60~70%를 차지하고 유럽인은 20~30%, 나머지 10~20%는 미국, 동남아인들이라고 한다.

지난해 12월에는 세계적 흥행을 기록한 영화 ‘007 카지노 로얄’의 한국 개봉을 앞두고 홍보차 내한한 주인공과 감독, 스태프들이 출국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락고재를 방문, 차를 마시고 간 일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본을 비롯해 외국인들은 한옥의 편안한 구조와 자연스러움, 특히 온돌방을 좋아하는데, 웰빙 식단과 더불어 한국 문화수준을 알릴 수 있는 경쟁력 있는 문화상품이라고 봅니다.”

안 대표는 “저가의 한옥 민박이 한국의 문화, 나아가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실추시킬 수 있다”면서 “고급 한옥문화체험 공간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러한 방안으로 북촌 한옥마을 중 일부 한옥을 외국인을 위한 게스트하우스(guest house)로 개조, 국제감각을 갖추고 외국어가 가능한 퇴직자들을 거주케 하는 방식을 제시하기도 했다.

안 대표는 “한옥에서의 문화생활과 풍류는 세계 어디 내놓아도 훌륭한 우리의 자산”이라며 “feeling Korea의 첨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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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