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의 '무희'비참한 삶 살다간 비운의 작가… 갈색의 중후한 색채로 서구적 인체 묘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6)은 그의 생애에 대한 조명에 비해 작품자체는 그리 많이 남아있거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작품 <무희>는 그가 남긴 몇 안되는 작품 중 하나로, 그의 선구적인 신여성관을 보여주는 대표적 유작이다. 1927년부터 2년간 프랑스와 스페인 등지를 여행하면서 직접 접한 서구의 다양한 화풍을 자신의 것으로 녹여내고 있다.

이 작품은 갈색의 중후한 색채를 바탕으로 서구적인 인체를 단순화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모피코트의 화려함을 시선 한가운데로 유도하고 있다.

순종적이며 조신한 요조숙녀 또는 주부상을 이상시했던 과거의 전통적 여성상에 대한 이견이 드러난다. 활동적인 신여성, 자신의 인간적 자유를 갈구하는 여성의 내면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작품속의 모델, 그림 속의 무희가 실제로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소재 대상 자체만으로도 나혜석의 개성을 드러낸다. 그림 속 무희의 모습은 작가가 당시 우리 사회를 향해 외친 ‘여자도 사람이외다’라는 목소리를 그대로 대변하는 듯 하다.

표현기법 상으로도 그의 이전 작품들, 특히 풍경화 등에 많이 채택된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표현주의적인 기법을 사용해 독특한 필치를 선보이고 있다. 대담하고도 단순한 표현은 당시 화풍에 있어 새롭고 혁신적인 것이었다.

나혜석은 국내 미술계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선구자이자 진보적인 여성해방론자, 문학가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리 순탄치 못한 삶을 살다간 천재화가다. 부유한 관료의 딸로 태어나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 그림뿐 아니라 필력도 뛰어나 문단에서도 폭넓게 활동했다.

외교관인 남편에게 결혼 당시 혼인 각서를 쓰게 하고 신혼여행길에 죽은 애인의 묘소를 찾는 등 전통 유교사회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여성적 행보를 보였다. 한편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르는가 하면 무정부주의 단체인 의혈단의 후견인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7년을 전후하여 나혜석의 생애는 급격한 내리막을 맞는다.

남편과 잠시 떨어져 파리에 체류하던 중 또다른 로맨스에 빠진 일이 화근이 되어 결국 남편으로부터 이혼 당한다. 동시에, 자신을 천재화가로 떠받들던 한국 사회와 미술계도, 팬들도 철저히 등을 돌린다. 나혜석은 자신을 유린한 문제의 남성에게 보상금을 요구하는 제소장을 내기에 이르지만, 오히려 그녀의 삶은 더욱 비참해진다.

그의 피나는 재기 노력은 끝내 물거품이 되고, 경제적 곤란과 우울증으로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1948년, 마침내 행려병자로 쓸쓸히 세상을 떠난다. 예술가로서 다시 일어서려던 나혜석에게 세상은 두 번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혜석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다. 재능있는 여성의 불운한 말로를 뜻하는 용어다. 그러나 남녀 차별이 그토록 엄격했던 시대에 "사람이면 다 존귀하다"며 여성주의의 메시지를 그림으로 남긴 선구자적 작가로서 그의 작품과 정신세계는 여전히 건재하다. 1940년작. 캔버스에 유채. 41x3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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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