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돌며 ‘순대’ 연구… ‘순대실록’ 책 내고, 최고의 순대 전문점 열어

‘순대’ 알기 위해 3년 6개월 동안 지구 여섯 바퀴 돌고, 1000명 넘는 사람 만나

순대에 관한 기록 <순대실록> 펴내… ‘순대다운 순대’ 로 순대 전문점 시작

순대 공부 계속할 예정…전통 순대 재현 비롯해 새로운 순대 메뉴 개발 열정

대략 1천년의 역사다. 아무도 깊게 보지 않았다. 그저, 그런 음식이 있었겠지, 뭐, 대단한 음식이랴, 라고 지나쳤다. 순대 이야기다. 왜 이름이 순대인지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렇게 흘러 지나온 순대 이야기. 순대를 찾아 우리나라 군데군데부터 유럽까지 뒤졌다. 그리고 책으로 묶었다. <순대실록>. 순대실록의 저자이자 서울 대학로에서 순대전문점, ‘순대실록’을 운영하고 있는 육경희 씨를 만났다.

순대? 길거리의 싸구려 음식?

이제 시작이다. 책으로 묶었지만 이 책 한권으로 그 많은 순대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얼마쯤 공부하면 순대를 파악할 수 있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

누구나 순대는 싸구려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길거리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순대국밥 집이다. 가격도 싸다. 어느 곳이나 비슷한 순대국밥을 내놓고 순대를 내놓는다. 모양과 맛이 모두 비슷하고 또 같다. 같은 공장에서 순대를 가져오니 맛, 모양새가 같은 것이 당연하다. 누구나 획일화된 음식을 내놓는다.

순대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언제 시작되었을까? 외국에서도 순대를 먹을까? 우리나라에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순대가 있을까? 우리나라의 지방별 순대는 어떤 부분이 비슷하고 한편 다를까? 아무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질문을 하지 않으니 의문에 대한 대답이 있을 수 없다. 아무도 묻지 않으니 어느 순간, 가장 가까이 있는 음식에 대해서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순대는 이제 의미 없는, 싸구려 음식이 되었다.

대학로 ‘순대실록’의 육경희 대표는 순대에 대한 이런저런 궁금증을 참 많이도 가졌다. 그 궁금증은 순대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시작은 엉뚱했다. 대학로의 가게를 인수했다. 오랫동안 눈도장을 찍고 있던 곳이었다. 마침 전 주인이 순댓집을 운영했다. 2011 년경의 일이다. 원래는 가게를 인수, 펍 식의 고기 집을 운영하려고 마음먹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당장 인테리어부터 각종 기자재까지 해낼 자금이 빠듯했다. 가게는 인수하는 순간 월세 부담이 생긴다.

“새로 인테리어를 할 때까지 기존의 순댓집을 운영해 볼까?”

이 생각이 순대에 발목이 잡히는 계기가 되었다. 막상 순댓집을 하려고 결심했지만 바로 순대를 만들 수는 없었다. 순대는 생소한 분야였다. 어쩔 수 없었다. 여타 순댓집처럼 외부에서 순대를 사들였다. 사들인 순대를 적당히 조리하여 내놓았다. 어느 가게나 하는 방식이다. 직접 순대를 만드는 곳은 열에 하나가 되질 않았다. 가게는 그럭저럭 운영되었다.

문제는 외부에서 사들이는 순대의 질이었다. 가끔 순대의 질이 들쭉날쭉했다. “순대가 왜 이렇지?” 결국 순대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순대 공부가 외국까지 가고, 국내의 유명 순댓집을 샅샅이 훑어내는 작업의 시작일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불행히도 순대에 관한 자료는 거의 없었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고 인터넷에서 뒤져도 별다른 자료는 없었다. 직접 현장을 보고, 순대를 맛볼 수밖에 없었다. 지방으로, 급기야는 유럽까지 순대공부를 떠나야 했다. 뒤돌아보면 참 황당한 경로였다. 하지만 간단한 이치였다. 순대에 대해서 얼마쯤이라도 알아야 순댓집을 운영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어린 시절 고향 전주에서 만난 순대

육 대표의 고향은 전북 전주다. 지금은 전주 시내이지만 당시는 전주의 외진 변두리. 1960∼70년대 무렵 집안에 농사를 짓는 머슴이 있었다. 제법 재산이 넉넉한 종갓집이었다. 잔치가 있으면 당연히 돼지를 잡았다.

“당시에도 개인의 돼지도축은 불법이었지만 관공서에서도 대충 눈 감아 주었던 것 같아요. 불법이라기보다는 ‘탈법’ 정도였죠. 단속하는 공무원들도 이리저리 한, 두 다리만 건너면 친척이었고요.”

잔치나 집안의 대소사가 있으면 ‘탈법적으로’ 돼지를 도축했다. 그 무렵 처음 순대를 보았다. 고기가 귀하던 시절이다. 아무리 종가집의 큰 살림살이라고 해도 돼지창자를 버릴 리는 없었다. 잔칫날 등 돼지를 잡는 날 집안에서는 당연히 돼지창자를 이용한 순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순대를 보았다는 정도. 하물며 나중에 순대에 관한 책을 내고 순대 전문점을 하게 될 줄이야 몰랐다. 어린 시절 고향 전주에서 돼지도축 현장을 본 것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순대와의 첫 만남이었다.

철이 들면서 제주도의 돼지고기 문화와 돼지 순대를 보았다. 제주도에서는 제사에도 돼지고기를 사용한다. 지금 제주도 돼지고기가 전국에서 주목받고 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제주도 돼지고기, 순대 등은 내륙과는 다른 제주만의 특이한 음식이었다.

육 대표는 대학시절까지 전주에서 보낸다. 전주 인근 익산 원광대에서 신문광고 관련 공부를 했다. 순대와의 인연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남편이 공부를 더 하는 동안 잠깐 잡지기자 생활을 거쳤고, 한글 글쓰기 학원에서도 일했다. 돌아가신 동화작가 이오덕 선생과의 인연도 이 무렵 있었다. 지금은 음식이 사람을 살린다고 믿지만 당시는 글쓰기, 책 등이 어린이를 살리고 우리 사회를 살린다고 믿었다.

한반도 순대의 시작은?

육경희 대표가 힘들었던 부분은 순대에 대하여 별다른 자료가 없다는 점이었다.

조선시대 기록에 순대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내장을 먹지 않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고기가 귀하던 시절, 소 내장이나 돼지내장은 버렸을 리는 없다. 먹지 못할 정도로 맛이 없었을까? 그렇지도 않다. 아프리카 사자는 사냥을 한 후 가장 먼저 내장을 먹는다. 맛있기 때문이다. 내장을 제외한 고기 부분을 남겨두면 다른 맹수들이 먹는다. 마지막 짐승의 대가리 등은 날짐승의 먹이다. 맛있는 내장을 버렸을 리는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냉장ㆍ냉동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냉장, 냉동이 없으면 운반도 힘들다. 오늘날의 유통구조로도 내장은 운송이 힘들다. 현장에서 적절하게 처리한 다음, 냉장, 냉동으로 유통해야 한다. 내장의 경우, 보관이 힘드니 관청 납품은 힘들었다. 더구나 내장을 이용한 순대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내장 처리는 도축을 담당하던 천민의 손에 맡겨졌을 것이다. 순대는 제사상에 오르지 못했고 손님맞이에도 사용하지 않았다. 기록이 없는 이유다. 순대는 기록하지 않는 상민(常民), 천민의 음식이었다.

‘정육(精肉)’과 ‘정육(正肉)’은 같은 뜻이다. 살코기는 바른 식재료다. 정육이니 관청에 납품한다. 도축용 소는 관청에서 선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다. 19세기 이후 상업이 발달하면서 도축장에서 소를 먼저 구입하여 도축 후 관청에 납품한다. 그 이전에는 관청에서 소를 지급하고 나중에 쇠고기를 납품받는 식이었다. 내장은 정육이 아니다. 도축을 담당했던 이들이 현장에서 손쉽게 처분했을 가능성이 많다. 순대도 마찬가지다.

소 내장(牛腸, 우장)에 대한 기록도 많지는 않다. ‘호남 실학자’라고 불리는 존재 위백규(1727∼1798)는 평생 근검절약했던 이다. 친구와 부여 일대를 여행하면서 남긴 기록에 우장(牛腸, 소 내장)이 등장한다. 부여에서 “(안주로)깨끗하게 잘라낸 소 내장을 먹었다(鮮割牛腸)”는 대목이다. 평생 벼슬살이보다는 검박한 실학자로 살았던 이가 먹었던 안주라면 이른바 진수성찬은 아니었을 터이다.

<시의전서>의 돼지순대

육경희 대표가 찾아낸 순대에 관한 기록은 <시의전서(是議全書)>의 돼지순대다.

시의전서는 조선후기의 기록이다. 작자, 기록 연대 등 모든 것이 불분명하다. 내용에 대해서도 미심쩍은 부분들은 있다. 이미 남쪽을 중심으로 각종 일본 음식들이 물밀 듯이 들어올 때다. 북쪽에서는 중국 청나라 음식이 급격히 전래되고 있을 무렵이다.

시의전서의 ‘도야지 순대’는 특이한 음식이다. 조선시대에는 돼지가 퍽 귀했다. 단종 조에 이미 “중국에서 돼지 키우는 법을 배워온 별좌 이흥덕”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돼지는 여전히 흔하지 않은 가축이었다. 1670년경 기술된 <음식디미방>에도 돼지고기 요리는 딱 2종뿐이다.

육경희 대표의 ‘순대실록’에서 도야지 순대를 모티브로 돼지순대를 내놓는 것은 의미가 있다.

“순대를 찾아서 지방을 다니다가 결국 유럽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어느 순간 순대가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널리 유행했던 그리고 지금도 친근한 음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페인, 프랑스를 비롯하여 이탈리아와 다른 유럽 지역과 동남아의 베트남까지 차근차근 가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육경희 대표는 ‘지구를 여섯 바퀴 돌 정도로’ 먼 길을 다녔다. 순전히 순대를 만나기 위하여. 3년6개월의 기간, 그녀는 1000명이 넘는 사람을 만나고 숱한 자료를 뒤져보고 숱하게 많은 기록을 모았다. 그리고 그 자료들과 기억들로 책을 엮고 대학로의 순대전문점 ‘순대실록’을 열었다.

‘순대실록’의 인기 메뉴 중에는 ‘순대 스테이크’가 있다. 말 그대로 순대를 마치 스테이크 식으로 구워 먹는 것이다. 얼핏 보면 소시지를 길게 늘어뜨려 굽는 것 같다. 소시지나 순대는 비슷한 모양새다. 어쩌면 뿌리는 같을는지도 모른다.

동물의 창자 속에 곡물, 고기, 생선, 채소 등을 넣고 만든 음식. 물론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동물의 피다. 불행히도 순대의 뿌리와 종류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더 공부해서 앞으로 두 번째, 세 번째 ‘순대실록’을 펴낼 예정입니다. 순대전문점 ‘순대실록’의 메뉴도 점점 늘어나고 좋아지겠지요. 이제 겨우 순대 공부를 시작한 셈입니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설명

-<순대실록>의 저자이자 대학로 순대전문점 ‘순대실록’의 대표인 육경희 대표. 단행본 <순대실록>을 위해 ‘지구를 여섯바퀴 돌’ 정도로 많은 경험을 했지만 스스로는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미 두번째, 세번째 ‘순대실록’을 그리고 있다.

-순대의 단면. 순대공부를 하면서 만나고 먹어본 순대의 장점들을 모두 ‘순대실록’의 순대에 반영했다.

-‘순대실록’의 인기 메뉴인 순대 스테이크다. 순대의 역사는 길지만 새로운 순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순대실록’은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순대를 선보이고 있다.

-<시의전서>에 도야지순대가 등장한다. 예전 순대도 반드시 재현해보고 싶었다. 전통순대다.

-순대실록 음식들

[순대맛집 4곳]

범일분식/제주도

간판은 ‘분식’집이지만, 순대전문점이다. 걸쭉하고 깊은 맛을 낸다. 위치는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이다. 순대는 제주도 토속은 아니고 맛이 짙고 내용물이 풍부한 경상도 식이다.

정순순대/전북 익산

익산 중앙시장 부근의 피순대 노포다. 철저하게 피순대만을 고집하고 머리고기 등이 수준급이다. 창업주는 연세가 많아서 아침나절 밑 준비만 돕는다. 아들 내외가 운영.

진양횟집/강원도 속초

오징어순대가 아주 좋다. 계란 푼 물로 앞뒤를 막는 이북식 오징어순대와는 달리 가지런히 썰어서 내놓는다. 맛이 담백하다. 순대 속으로 각종 산나물 등 20여종을 사용한다.

단골식당/경북 예천

맛이 강한 편이다. 순대국밥 등 국물음식을 주문하면 토렴하여 내놓는다. 구이, 무침 등 다른 음식들도 수준급이다. 인근에 좋은 식재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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