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갖고 난리치지 말아야…생명을 살리는 음식이 사람도 살려”
‘밥과 숨’의 작가, 유명 요리연구가, 현재 음식 연구ㆍ사유에 전력
음식이 삶의 철학으로…음식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져
‘밥과 숨’의 ‘작가’ 문성희 씨, 자연요리가다. 1950년, 부산 출생. 어머니를 따라 ‘요리학원 조수 겸 운영자’로 음식을 만났다. 한때 유명 요리학원 원장으로 일했다. 매스컴에도 숱하게 소개되었다.
어느 순간 부산을 떠났다. 유명 요리 연구가의 자리도 가볍게 버렸다. 부산, 충청도 괴산에서 자급자족의 삶을 살았다. 일산으로 또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사람이 사는 것은 밥 먹고 숨 쉬는 것. 밥 잘 먹고, 숨 잘 쉬면 그게 올바른 인생”이라고 말하는 문성희 씨를 만났다.
당황스러웠다. ‘평화가 깃든 밥상’. 문성희 씨가 운영하던 식당 이름이다. 이제 더 이상 ‘식당’ 운영은 하지 않는다. 공간은 그대로 남았다. 음식점이 아닌 다른 용도로만 사용한다. 자연식을 선보이던, 썩 괜찮은 식당이 하나 없어진 셈이다.
작년에는 1주일에 하루 정도 음식점으로 운영했다. 올해부터는 그마저 그만두었다. 밥 한 공기, 미역국 한 그릇, 장아찌와 김치 두어 종류, 정확치 않지만 민들레 튀김이 한 접시 있었던 소박한 밥상이었다.
“음식에 대해서 토론하고 공부하는 모임이 가끔 열립니다. 자연요리학원이라고도 부릅니다만, 풍석 서유구 선생의 저서를 두고 공부하는 모임이 열리기도 합니다.”
풍석 서유구(楓石 徐有榘). 조선 후기의 문신, 농학자(農學者)이자 고위 관료였다.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다. 저서로 ‘임원경제지’ ‘난호어목지’ 등이 유명하다. 문성희 씨는 풍석에 대한 관심이 깊다. 음식, 요리 등과 풍석 서유구의 연결점은 쉬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날의 인터뷰에서도 풍석 서유구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 등장했다.
요리학원 조수에서 한때 유명 요리학원 선생, 원장으로 그리고 풍석 서유구의 저서와 ‘밥’과 ‘숨’을 공부하는 이로. 연결고리가 보이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어? 무슨 이야기지?’ 싶은 부분도 있다.
태어났을 무렵에는 비교적 넉넉한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9남매의 여덟 번째였다. 외할머니가 식솔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는 바람에 어머니는 일본에서 초등학교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가 스물세 살, 어머니가 스물두 살일 때, 두 사람은 일본에서 결혼했다.
문성희 씨 부모님은 해방직전 한국으로 건너왔다. 문성희 씨는 귀국 후 태어났다. 다행히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다. 한국전쟁 때는 피난 온 신부님들이 문성희 씨 집에 거주했다. 살림살이는 넉넉했다.
아버지는 “앞으로의 시대는 기술이 필요하다. 공업학교, 공과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대양공업학교를 세우고 교장, 이사장을 지냈다. 이 학교는 “학교는 개인 소유가 아니라 법인, 종교 재단 등에 속해야 한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멀지 않아 가톨릭 부산교구로 운영권이 넘어갔다. 어린 시절의 일이라서 정확한 내용을 알진 못했지만 당시 분위기로는 거의 ‘빼앗기다시피 한 것’이었다.
1남4녀의 맏딸. 학교를 빼앗긴 후 당장 살 길이 막연했다. 부모님은 서울 행을 결정했다. 서울 종로 5가 광장시장에 밀수 양품점을 열었다. 주로 일제 물건들을 취급했다. 가게 문을 연 지 한 달 만에 5ㆍ16 군사정변이 터졌다. 밀수품, 외국 물품은 강력히 규제했다. 자연스럽게 장사를 접었다. 어머니는 양품점과 삯바느질 등을 거쳤다. 1963년, 문성희 씨 가족은 진해로 낙향했다. 진해는 아버지의 고향이었다.
“요리학원을 시작한 것도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해서였지요. 1970년대 초반이라고 기억하는데, 그때 양품점이나 삯바느질 대신 요리학원을 하는 게 오히려 낫겠다는 생각을 하셨지요.”
박정희 정권 시절이다. 미국에서 들어온 밀가루가 흔하던 시절. 정부는 식량 자급자족을 위해 분식장려운동을 펼쳤다. 육영수 여사가 앞장서서 식생활개선, 분식장려운동을 펼쳤다. 요리, 음식 만드는 레시피가 없던 시절이다.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요리강좌를 보여주고 지방 별로 요리강사들이 온 동네를 떠다니며 요리강좌를 열었다.
통영, 의령, 함안, 산청, 하동 등 경남 일대를 떠돌며 어머니는 요리강좌를 열었다. 1969년 부산 계성여고를 졸업한 문성희 씨는 어머니 요리강좌의 조수이자 기획자였다. 경남 일대 군청을 미리 방문, 요리강좌 열 장소를 섭외했다. 강의는 무료였다. 요리강좌를 열고나서 현장에서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주방기구나 식재료를 팔았다. 문성희 씨는 현장에서 팔 물건을 구해오는 심부름도 했다. ‘홍보, 마케팅’도 문 씨의 몫이었다. 미리 현장에 가서 장소를 섭외하고 부녀회장과 더불어 인쇄물을 만들고 돌렸다. 이른바 ‘찌라시’다. 부산 영도에서 양장피 재료를 구하고 국제시장에서 조리 기구를 구했다. 겨자가루, 베이킹파우더, 계란지단 만드는 팬도 구했다. 식재료나 도구는 현장에서 사용하거나 팔았다.
어머니는 지쳤다. 1973년, 어머니는 일본에 남아있던 친척의 도움을 얻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명한 ‘에가미요리학원’에서 공부했다. 어린 시절 배운 일본어가 능숙했다. 요리학원의 스텝으로 일하는 대신 수업은 무료로 들었다. 삯바느질로 돈을 모으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의 생활비로 보냈다.
1977년, 어머니는 부산에 비교적 번듯한 요리학원을 열었다. 학원의 행정업무 등은 모두 문성희 씨의 몫이었다. 조수이자 운영자였다.
“결국 어머니의 요리학원을 물려받았지요. 정식 학원을 운영하고 어머니 대신 요리 강좌를 진행하면서도 즐겁질 않았습니다. 다른 일을 할까, 라고도 생각했지만 마땅한 일도, 계기도 없었고요. 그저 하던 일이니 했지요.”
세상은 등을 떠밀었다.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각종 매체에도 등장하고, 잡지 등에 요리 칼럼도 많이 기고했다. 부산에 있었지만 서울의 중앙일보사 잡지나 경향신문사, 서울문화사 잡지 등에 등장했다.
기회는 엉뚱하게 찾아왔다.
1980년대 초반 신토불이(身土不二), 식약동원(食藥同原) 등의 단어를 들었다. 음식을 만들고, 요리를 가르치는 일이 마치 “꽃봉오리는 보지 못하고 꽃만 본다”고 느끼던 참이었다. 꽃이 아니라 ‘씨앗처럼 땅에 묻히는 일도 중요하다’는 글귀도 가슴에 남아있었다.
‘요리학원으로부터의 탈출구’가 되리라 믿었다. 부산에서 시민운동가로도 유명했던 윤소암 스님을 만났다. 한 달에 한번 사찰음식, 사찰요리를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음식 연구반이었던 셈이다.
1990년대 초, 중반 부산 시내에서 얼마쯤 떨어진 금정산 자락으로 거처를 옮겼다. 40대 초중반의 나이였다. 평상심, 기도, 명상 등이 당시의 ‘키워드’였다. 허망한 ‘꽃’과 ‘꽃그늘’을 벗어나고 싶었다. 인위적인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우연히 알게 된 이가 생식을 권했다. 살아 있는 음식. 생식을 만들고 생식을 먹으며 버텼다. 얼마쯤이나 세월이 지났을 때 방송 등에 ‘생식’이 등장했다.
기공 수련 등으로 7, 8년을 오두막 같은 집에서 버텼다. 지금도 딸아이에게는 미안하다. 지금 어머니를 도와서 혹은 독자적으로 ‘평화가 있는 밥상’을 운영하고 있는 딸아이는 열 살 무렵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어머니를 따라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딸아이를 데리고 산속 오두막에서 7, 8년을 버텼다. 단절. 어머니는 자발적으로 세상과 단절했지만 딸은 그렇지 않았다. 문성희 씨는 일산과 서울로 옮기면서 “딸아이를 다시 세상에 내놓았다”고 표현한다. 딸의 입장에서는 다시 ‘세상 속으로’였던 셈이다.
음식이 삶의 철학이었던가? 아니었다. 아무리 유명해지고 수강생이 많아도, 음식 만지는 일이 좋아서 했던 적은 없었다. 스스로 하고 싶어서 했던 일이 아니었다. 즐거움이 없으니 헌신이 없고, 헌신이 없으니 철학적 사유가 생길 리 없었다.
풍석 서유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소박한 자연식에 대한 것이었다. 문성희 씨. 이제 일흔이 가까워진다. 스스로 ‘아웃사이더’라고 표현하지만 그는 이미 ‘아웃’과 ‘인(IN)’의 경계를 넘었다. ‘자연, 자연 음식을 공부하는 사람’이다. 스스로 옷을 지어 입은 지 오래되었다.
[자연식 밥상 4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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