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1950년대초 ‘국수는 귀한 음식’…수입밀 ‘한반도 국수 역사’ 바꿔
“(전략) 대언(代言)과 속고치(速古赤) 외에는 반상(飯床)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반상에는 다섯 그릇에 불과할 것이요, 진전(眞殿)과 불전(佛前) 및 승려 대접 이외에는 만두(饅頭), 면(麵), 병(餠) 등의 사치한 음식은 일체 금단하소서”라는 내용이다.
‘대언’은 승지 혹은 도승지다. 왕명을 전하는 공식비서(비서실장)다. ‘속고치’는 몽골식 벼슬로 왕의 개인적인 비서쯤 된다. 태종의 수륙재에서 국왕의 공, 사적 비서에게만 반상(밥상)을 허용하라는 뜻이다. 음식은 불과 다섯 종류이다. 5기(器) 밥상이다. 국왕과 불상, 승려 이외에는 만두, 국수, 떡을 내놓지 말라고 했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가난한 시절이긴 했다. 개국 30년, 나라는 섰으나 국가 운영의 세부지침들도 마련되지 않았다. <경국대전>은 한참 후에 나온다.
우리가 하찮게 생각하는 국수는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참 귀한 음식이었다. 국수를 하찮게 보는 것은 우리 시대의 깊은 오해다. 흔히 “언제 결혼하느냐?”는 질문 대신 “언제 국수 먹여주느냐?”로 묻는다. 국수 가락이 길고 곧 장수를 뜻하니 결혼식에 국수를 대접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국수=장수’라면 돌날, 환갑날에 사용해야 한다. 왜 느닷없이 결혼식인가? 국수가 장수를 뜻한다면 경북 안동의 국수제사는 설명이 힘들다.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장수하시라고 국수 제사를 모신다? 뭔가 어색하다.
국수에 대한 이해는 ‘국수는 굉장히 귀한 음식’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귀한 국수는 반가(班家)의 음식이었다. 귀한 음식이니만큼 반가의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의 주요한 도구였다. 반가에서는 제사나 손님맞이에 국수를 사용했다. 상민(常民)들이 만들기 힘들고 손 많이 가는 국수를 찾을 일은 없었다. 일반인들은 평생토록 국수를 보지 못하다가 결혼식 정도에만 국수를 만날 수 있었다.
장례식장 음식으로 국수 대신 육개장(해장국 혹은 갈비탕)이 정착된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국수가 만들기 힘들고 일정한 준비 기간이 필요한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결혼식은 이미 몇 달 전에 결정된다. 국수 재료를 구하고 국수를 만들 시간이 넉넉하다. 결혼식 때 국수를 먹을 수 있는 이유다.
초상은 예고 없이 닥친다. 국수를 준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언제쯤 돌아가실는지 짐작하기 힘들다. 짐작하더라도 살아계신 어른을 눕혀놓고 초상 준비를 할 수는 없다. 초상은 늘 급작스럽게 닥친다. 초상 당일 천막을 치고 나면 바로 조문객들이 들이닥친다. 당장 음식을 내놓아야 한다. 육개장이 국수보다는 한결 편하다. 육개장 역시 별다른 반찬이 필요치 않다. 그릇도 많이 필요치 않다. 국밥 스타일로 내놓으면 아주 편리한 음식이다. 쇠고기로 만든 육개장을 먹기 이전인 조선시대에는 개장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초상집 개장국’이 흔했다.
비단 한반도만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지금은 파스타의 종주국인 이탈리아도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고운 가루를 얻는 제분기계가 사용되었다. 이전에는 파스타는 만나기 힘든 음식이었다. 제분기 사용 전에는 이탈리아 역시 손으로 빚는 수제비 정도의 음식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나마 국수를 만들기 쉬운 밀을 주식으로 사용했으니 국수 비슷한 음식이라도 가능했을 것이다. 밀이 주식도 아니고 또한 구하기 힘든 한반도에서 글루텐 성분이 적은 메밀 등으로 국수를 만든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우격다짐으로 꾸역꾸역 국수를 만들었다. 메밀로 만든 냉면이 한반도에 살아남고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이유다.
국수는 크게 3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칼이나 작두 등 도구로 자른 것이다. 반죽을 한 다음 도구로 자른다. 우리나라 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밀이 아닌 곡물로는 만들기 힘들다.
1960년대 언저리 영세규모의 국수집, 제면소가 급격히 생긴 것도 미국 산 밀가루가 흔해졌기 때문이다. 곡물은 여전히 부족했다. 막 보릿고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최대 목표는 ‘식량자급자족’이었다. 부족한 쌀 대신 밀가루 음식, 분식을 장려했다.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제면소가 세워졌다. 밥, 국수, 수제비를 동시에 먹었다. 혼식, 분식은 이 시대의 키워드다. <음식디미방>에서 ‘진가루=진짜 가루’라고 불렀던 밀가루가 지천으로 흔해졌다. 전국에 가 흔해졌고 일본에서 기술 전수 받은 라면도 시작되었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 아니었다. 쌀 대신에 먹는 천대받는 음식이 되었다. 메밀 대신 밀. 한반도 국수 역사의 키워드는 단순하다. 메밀만 사용하다가 한결 편리한 밀이 등장했다. 우리 밀은 사라졌다. 오늘날 우리 밀 살리기를 열심히 하는 이유다. 메밀 대신 밀이 국수를 대신했다. 국수는 미국 산, 수입산 밀로 만든다. 한반도 국수 역사의 시작이고 끝이다.
국수 맛집 4곳
골목안손국수
봉화묵집
안동국시
행운집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